< 日本(Japan) >

 Ⅰ. 日本經濟의 상황

日本經濟가 지난 2002년 하반기 이후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 버블붕괴 이후 92년부터 2002년까지 10년 간 연평균 1.1%에 불과하던 日本經濟의 성장률이 2003년 들어 2.5∼3.5%의 고성장을 실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 경제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확산되고 있다. 日本 민간 연구기관 뿐만 아니라 정부도 지난 9월 2003년 日本 經濟성장률 전망치를 대폭 상향조정하였는데, 각각 1.8∼2.6%, 2.1% 성장으로 상향조정하였다. 그러나 日本經濟가 회복기로는 접어들었으나 2004년 이후의 성장률은 둔화되고 있다. 버블붕괴 이후 日本經濟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어 급속한 회복은 기대하기 곤란하다는 전망이다. 즉 내수와 개인소비 부진, 부실채권과 부실기업 처리지연, 과잉고용 상태 지속, 중소기업의 부진 등의 고질적인 문제가 日本經濟의 본격적인 성장에 걸림돌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日本은 여전히 미국 다음가는 경제대국이다. 그간의 저성장으로 미국과의 경제력 차이가 벌어졌지만 지금도 기술강국, 제조업 강국이다. 기술관련 특허출원은 많은 분야에서 미국을 앞서고 있으며, 디지털전자 분야에서는 독보적이다. 日本 經濟산업성이 2003년 6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각 분야 상위 10사중 정보통신기기 6사, 승용차 3사, 반도체제조장비 5사, 철강 2사, 종이펄프 2사, 그리고 건설기계 5사중 2사, 유리 7사중 3사, 전선케이블 6사중 2사가 日本기업이다.
日本은 세계 GNP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무역에서도 거의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95년 수출액에서는 미국과 독일에 이어, 수입액에서도 미국과 독일에 이어 각각 제 3 위를 차지하였다. 日本이 자본의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바뀐 것이 1년 간의 플로(flow;흐름)에서는 65년이고, 스톡(stoke;殘高)에서는 68년의 일이었다. 그 뒤 2차례의 석유 파동시기를 제외하고는 경상수지의 흑자기조와 그 누적을 배경으로 대외증권투자·차관·직접투자가 모두 급증하였다. 특히 83년부터 84년에 걸쳐 대외자산에서 대외부채를 공제한 순자산은 373억 달러에서 743억 달러로 늘어 영국에 이어 제 2 위 국가로 부상하였다.

 Ⅱ. 日本經濟의 잃어버린 10년에 대해서

ⅰ) 원인
80년대 말 과잉 유동성, 재테크 붐으로 발생한 버블경제는 91년의 긴축금융과 부동산 규제 강화로 인해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버블관련 업종인 부동산, 건설, 유통 등에 대한 대출이 부실채권화하게 되었다. 90년대 내내 경기침체, 주가·지가 하락으로 부실채권이 계속 증가하였는데, 버블붕괴로 사라진 자산의 10%에 달하는 100조엔이 은행들의 부실채권이 되었으며 10년 간 16개 은행이 파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생긴 부실채권을 정리하지 못한 것이 日本經濟의 잃어버린 10년이 시작과 지속의 원인 중 하나이다.
그밖에도 구조조정 실패, 정치 리더십 부재와 정책의 실패, 관료의 보수성과 조직 이기주의,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분위기와 국내적 시야, 국수주의, 日本의 왜곡된 역사인식 등이 日本經濟의 위기를 불러 온 원인들이다. 특히, 日本의 왜곡된 역사인식에 대해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엔 겐자부로는 "日本의 성숙되지 못한 역사인식이 日本의 폐쇄성과 더딘 변화를 부추기고 있음."이라고 말했고,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를 미화하는 역사교과서는 폐쇄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ⅱ) 경과
日本의 부동산거품 붕괴의 결과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말이 ‘잃어버린 10년(The Lost Decade)’이다. 말 그대로 日本經濟가 10년을 허송세월 했다는 의미다.
잃어버린 10년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더욱 참혹하다. 91년부터 98년까지 日本 6대 도시 상업지가는 평균 16.4% 하락했다. 결국 98년 지가는 90년 최고점과 비교할 때 23% 수준으로 떨어졌다.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89년 12월말 사상 최고치인 3만8915를 기록했던 닛케이지수는 1년쯤 후인 90년 10월 2만 수준으로 수직하락 했다. 1년도 채 안 돼 반토막이 난 것이다. 주가와 부동산이 폭락하면서 금융회사와 개인의 파산도 늘어났다. 日本 정부는 95년 말∼96년 간 부동산금융을 주로 하는 주택금융전문회사의 부실이 가시화하면서 천문학적 규모의 공적자금을 조성했다. 90년대 중반에는 日本 역사상 최초로 예금인출사태가 발생했으며 해마다 결산기만 되면 금융위기론이 日本經濟계를 유령처럼 떠돌았다. 97년 말에는 산요증권, 북해도척식은행, 야마이치증권등 日本을 대표하는 금융사들이 연이어 도산하면서 경영에 책임을 졌던 사람들이 日本식 할복으로 종업원과 고객들에게 사죄하는 일까지 이어졌다. 특히 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日本經濟가 더욱 어려워지자 영국 런던등 세계금융의 중심지에서는 日本의 금융인이나 종합상사맨들이 저녁만 되면 술에 취한 채 “日本은 끝났다”라며 눈물을 흘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日本 히토쓰바시대 야마모토 지야키 연구원은 “日本經濟는 90년대 부동산거품이 붕괴된 뒤 본격적인 회복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21세기를 맞았다”며 “최근 日本經濟가 다시 회복되는 기미를 보이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ⅲ) 결과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며 日本經濟는 지금 사면초가의 상태이다. 實物經濟의 침체와 금융불안의 악순환, 국내요인과 해외요인의 악순환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經濟분야만 어려운 게 아니다. 사회·문화적으로도 日本은 매우 어려운 지경이다. 일에 대한 욕망과 에너지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도 큰 변화 중 하나다. 일에 매여 살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이 크게 늘었다. 소비자본주의의 말로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고도성장기에는 소유, 즉 일에 대한 욕망이 컸지만 이제는 소유에 대한 애착이 없거나 약화했다.

日本의 한 사회학자가 70년대부터 “뭘 갖고 싶은가”라는 똑같은 질문을 초등학생들에게 던졌다. 70년대에는 자동차 전화기 에어컨 등 집안의 소유물을 갖고 싶어했고, 80년대에는 컴퓨터 게임기 등 개인적인 물건으로 선호도가 옮겨갔다. 그러다 같은 질문에 대해 99년의 초등학생들은 대다수가 “없다”라고 대답해 놀랐다고 한다.
과거에는 ‘열심히 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 신화가 있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을 지나면서 노력해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아이들까지 깨닫기 시작했다. 출세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절망,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갇혀 있다는 자각에 부모들이고 아이들이고 손을 들어 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日本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고 있지 못 할 정도로 허약해져 있다. 日本은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며,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모두 희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현재 日本經濟는 서서히 회복되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볼 문제이다.

 Ⅲ. 日本經濟에 대해서

ⅰ) 강점
日本人의 친절함과 성실성이야말로 현재의 日本을 우뚝 세운 강점일 것이다. 기업 내에서 사원 및 이사진 등의 성실성은 도요타, 닛산 등의 대기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전 세계 어디를 가나 日本人에 대한 태도는 협조적이다. 학사논문자격밖에 없는 사람도 노벨상을 받을 만큼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태도는 무척 존경받을 만하다.
게다가 日本經濟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제조업 부문이 회복되고 있는 것은 좋은 조짐이다.
ⅱ) 약점
많은 강점에도 불구하고, 현재 日本이 가지고 있는 부실채권은 日本經濟의 발목을 잡고 있다. 10년 간 90조엔의 부실채권을 정리했으나 아직도 미해결 상태이다. 또한 日本식 구조조정만을 고집하며, 정책적으로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것도 日本經濟의 약점이다. 게다가 實物經濟의 침체와 금융불안의 악순환, 국내요인과 해외요인의 악순환 등 역시 日本經濟의 골칫거리이다.

 Ⅳ. 韓·日 관계

ⅰ) 과거
日本(Japan)의 선조가 한반도의 백제인이라고 할 만큼 두 나라의 교류는 각별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다.
고대부터 한반도는 日本(Japan)에게 정치·문화·경제 모든 분야를 걸쳐 문물을 전해줬다. 그 예로 日本 천황의 시조문제나 서기 610년 고구려의 담징이 日本의 호류사에 금당벽화를 그려준 것, 日本 목조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한반도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유사성,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와 日本 다카마쓰 고분 벽화의 유사성 그리고 日本이 한반도와의 무역을 통해 물자를 공급하던 모습 등이 있어 日本과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또한 임진왜란, 정묘왜란, 을미사변, 쇠말뚝 풍수침탄, 강제병탄, 성노예 문제 등은 씻을 수 없는 아픔으로 우리 역사에 남아있다.

ⅱ) 현재
㉠ 韓國의 對日정책 - 經濟
북한과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나라는 日本과 中國이다. 中國과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응당 日本이 美國 다음으로 중요한 우방이자 정책협조대상국이었다. 그런데 中國과 수교가 이루어진지 10년이 경과하면서 양국 간 교역과 인적교류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中國의 비중이  높아지고 북한 변수에 대한 中國의 영향력이 높게 평가되면서  최근에는 어느 쪽이 더 중요한 우방이고 정책협조대상국이어야 하는지 모호해지고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아직은 전체 교역에서 거래규모가 더 크고 주요자본재와 기술을 수입하는 日本이 더 중요한 국가이지만 수출로만 본다면 對中國 수출액이 이미 對日本 수출액을 넘어섰다. 인적교류도 입출국자 모두를 고려하면 일본이 더 많지만 출국자수만 보면 수년 전부터 中國지역 출국자가 더 많다. 현재 같은 추세로 5년 정도 더 경과하면  교역과 인적교류의 양면에서 中國이 日本을 앞설지도 모른다.
요컨대 정치와 안보측면에서는 북한변수의 중요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中國이 日本 이상으로 주요 정책협조대상국으로 자리 매김 할 것이다. 또 경제적으로도 中國經濟의 규모가 현재처럼 빠르게 커지고 그와 더불어 對中 교역량이 확대되며 인적 교류가 활성화할수록 中國이 日本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정책협조대상국이 될 전망이다.

㉡ 日本의 對韓정책 - 經濟
日本의 한반도 정책 특히  韓國에 대한 전략은 21세기에 접어들어 다소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20세기 후반 韓國經濟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韓國은 인근 시장으로서 또 규모가 큰 무역파트너국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구 식민지국가로서 군대위안부 문제 등 청산하지 못한 빚도 없지 않아 마음속으로 껄끄러운 상대이기도 했지만 정치나 안보 면에서 美國, 中國, 러시아 등에 비해 비중이 월등히 작았기 때문에 애써 무시하거나 가급적 모른 채 하고 지내려 했던 것이 對韓정책의 기본흐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던 韓國이 21세기에 접어들어 정치나 안보측면에서 日本의 주요 정책협조대상국의 하나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北韓 변수가 자리하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北韓의 핵 개발 의혹이 부상되고 대포동 미사일이 日本 쪽으로 발사되며 北韓의 괴선박이 日本연해를 들락거리고 게다가 국내적으로는 납치자 문제가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北韓 발 위협이 日本人들에게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韓國의 DJ정부는 발족이후 긴밀한 대북협상루트를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이 日本의 주된 정책협조대상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中國經濟의 급부상으로 위기감을 느낀 日本은 수 년 전부터 韓日 양국 간 자유시장 확대를 목표로 韓國 측에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조기에 체결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양국은 수년간의 준비모임을 거쳐 2003년 말부터 정부간 공식교섭에 들어가기로 합의한 바 있다. 양국의 기본적인 방침은 관세장벽, 비자 등 기왕의 각종 장벽을 허물어 확대된 시장을 만들자는 것으로 이 협약이 체결되면 日本은 이를 바탕으로 韓日 양국이 정치, 안전보장 등 각 부문을 포괄하는 전면적인 파트너쉽 체제를 확립해 나가자고 촉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역사·사회적 문제
日本 지배계층의 왜곡된 역사인식이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나 계속되는 日本 고위층들의 망언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다. 과거의 만행을 사죄하고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한 게 없다는 식의 발언과 태도로 韓國을 비롯한 中國, 동남아 지역의 국가들에게 불쾌감을 넘어선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게다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등은 다음 세대의 日本人 역시 과거를 모르는 부끄러운 인간으로 교육시키려는 日本 우익층의 음모이다.
올해부터 日本 문화가 전면적으로 개방되었다. 우리는 좋은 것은 받아들이되, 우리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日本이 가지고 있는 국수주의와 만행을 기억해야 한다. 그 이후에 문화를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아닌 것은 버려야 한다. 우리의 인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이다.
 
ⅲ) 미래 ( 전망 & 대책 )
한창 韓·日간 FTA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韓·日 양국 사이에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어 경제적인 면에서는 국경이 없어지게 될 전망이다.
中國의 급부상과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日本이 가지고 있던 경제적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난 12월 11일∼12일 간 日本의 동경에서 개최된 日本-아세안 특별 정상회담에서 中國의 뒤를 이어 "아세안 우호 및 협력조약(Treaty of Amity and Cooperation : TAC) 에 서명하는 행사를 치렀다. 아세안을 둘러싼 中國과 日本의 경쟁이 매우 치열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직은 日本과 中國이 비슷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中國이 日本의 영향력을 앞지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中國과 日本을 잘 관찰하고 분석해서 그 사이에서 기회를 잡아야 한다. 예전에 고려가 송나라와 거란 사이에서 이익을 취했듯이 우리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우호적인 태도로 두 나라를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하면서 이익을 취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 韓·中·日, 동남아 지역이 유럽처럼 단일경제체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과제는 몇 십 년 동안 계속 논쟁거리가 되어온 日本의 과거 참회이다. 인정해야 할 과거의 잘못들을 인정하고, 왜곡된 역사 교과서를 개정하고, 성노예 문제 등 사과해야 할 문제는 사과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전범들의 위패를 격하시키거나 없애야 할 것이다. 日本이 과거를 참회하지 않는 한 동남아가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아픔은 동남아시아 단결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Ⅴ.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任那日本府說)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간 日本이 任那日本府라는 통치기관을 두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학설.
이 학설은 日本이 조선을 침략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식민사관의 하나인 타율성이론의 대표적 산물로서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과 궤를 같이한다.
日本人들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태고부터 외세의 간섭과 영향을 받아 타율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면서 任那日本府說을 제기했는데, 쓰에마쓰는 이를 체계화한 바 있다. 그의 설에 의하면, 3세기 중엽에 이미 왜인은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즉 임나가야(任那加耶)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왜왕은 그 중계지를 통하여 三韓을 통제했다. 또한 370년경에는 대규모 군대를 보내 백제와 신라에 편입되지 않은 대부분의 三韓 소국을 정복하여 직접 지배하고 양국을 간접 지배했으며, 任那의 지배체제를 이때에 성립시켰다. 왜는 任那의 지배범위를 계속 확대하여 북서쪽은 금강 유역, 북동쪽은 낙동강 상류유역까지 이르렀다. 任那는 400년 무렵에 광개토왕이 파견한 고구려군 5만 명의 침입을 받은 이래 쇠퇴를 거듭하다가 562년 신라의 대가야 정벌 때에 임나관가(任那官家)가 토멸됨으로써 멸망했다. 그 뒤에도 왜는 任那 故地에 대한 연고권을 가져서 646년까지 任那에게 공납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니혼쇼키 日本書紀〉를 주된 사료로 이용했는데 이 책은 8세기 초에 왜의 왕가(王家)가 자신들을 미화하기 위해 편찬한 사서로서 原 사료 편찬과정에서 많은 조작이 가해진 것이다. 특히 5세기 이전의 기록들은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설화적인 서술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 왜가 任那지역을 200년 동안이나 군사 지배했다면, 그 지역에서 그들의 문화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하는데, 가야지역에 대한 고고학 발굴자료는 4세기 이전의 이 지역 문화요소가 연속적으로 계승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처럼 문헌사료의 해석과 고고학 유물의 분석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쓰에마쓰의 任那日本府說을 정설로 받아들였던 日本 학계는 1960년대 北韓의 김석형이 '삼한 삼국의 日本열도분국설'을 제기하자, 큰 충격을 받아 1970년대 이후 기존의 任那日本府說에 대해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주요한 연구경향은 〈니혼쇼키〉 사료의 신빙성 문제를 치밀하게 고증한 다음, 그에 입각하여 종래 任那日本府의 성립시기나 그 실체를 제한시켜 설명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이후 대부분의 日本人 연구자들은 〈니혼쇼키〉에 나오는 5세기 이전 사료의 신빙성을 부인함으로써 任那日本府의 성립시기를 6세기 전반 무렵으로 늦추어보고, 그 실체 또한 왜가 任那를 군사 통치한 지배 기관이라기보다는 왜왕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독점적으로 수용하려는 목적으로 任那에 파견한 사신 또는 관인집단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任那日本府의 존재 이유도 왜 왕권의 지배 욕구보다는 백제·신라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야세력의 노력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도 역시 왜가 설치한 任那日本府가 가야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식민사관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한편 국내 학자들은 한동안 이에 대해 무시해오다가 최근에 이르러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국내 연구자들은 대세론(大勢論)에 근거하여 우선 〈니혼쇼키〉에 나오는 왜의 任那 지배를 부정하고 대신 백제의 가야지배라는 해석을 시도했다. 따라서 任那日本府의 실체도 왜가 가야지역을 정벌하고 설치한 지배기관이 아니라 백제의 근초고왕이 369년에 가야지역을 정벌한 다음, 그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파견군사령부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가야지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는 것을 밝힌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 간에 걸쳐 가야가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설명은 앞에서 언급한 고고학 유물의 분석결과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니혼쇼키〉에 보이는 任那日本府가 반백제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으므로 그것을 백제의 가야지배기관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국내연구자들의 한계는 가야사 및 日本 고대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 고대사논쟁의 일각을 차지했던 任那日本府說은 1875년 발굴된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한 구절에 그 유래를 두고 있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 『광개토대왕비문』 신묘년 조 -
▶위에 신묘년 기사에 대한 해석을 놓고 일본측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였으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근거: 日本서기.
·비문해석: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日本은 任那지방에 日本府를 두고 한반도 남단을 지배하여 신라와 백제가 약               200년 간(369∼562) 日本의 야마토 조정에 조공을 바쳤었다.

이에 대한 반박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를 근거로 하였을 때 日本의 한반도 지배에 관한 사료가 없다.
·日本이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영역에서 日本의 유물이 발견된 바 없다.
·日本서기의 신빙성 자체에 대한 의문.
·비문의 변조가능성에 대한 의혹.

▶위당 정인보의 해석 :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
北韓의 박시형도 주어를 고구려로 해석하는 데 동의한 것처럼 주체가 왜인지 고구려인지도 논란 중이다. 정인보나 박시형은 신라를 공격한 주체 세력을 왜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호태왕의 공적비이므로 주어는 당연히 고구려의 호태왕이 되어야 한다.

▶추가
1981년 이 비문을 연구해 온 이형구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日本人이 위작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의미가 된다. 

 Ⅵ. 韓·中·日 3국 관계

ⅰ) 과거
韓中日 삼국의 관계는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中國의 시조 헌원황제 시절부터 中國과 韓國의 관계는 경쟁적이었다. 헌원황제와 치우천왕의 전쟁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치우천왕은 B.C. 2716년부터 B.C. 2696년까지 실존했던 인물이다. 또한 지나(中國)족의 대족장 공손헌원(헌원황제. 中國의 시조)과 10여 년 동안 70여 차례가 넘도록 싸운 오랑캐의 황제이면서 마지막 전투에서 헌원에 의해 목이 잘렸다. 그리고 다들 잘 아는 당태종이 고구려를 함락시키기 위해 원정 갔을 때 전쟁의 신으로 추앙 받던 치우천왕기를 떠받들고 갔다가 안시성에서 한쪽 눈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 발굴되고 있는 유적지나 유물들, 싸움터 그리고 먼 선조 대부터 치우의 무덤을 지켰다는 무덤 지킴이의 말까지 모두 치우천왕의 패배는 부정되고 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시작해서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설치한 한무제,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던 수와 당,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나당 연합군, 발해를 멸망시킨 여진족, 고려와 대등 외교를 했던 송나라, 서희의 한 마디에 강동 6주를 내주고 돌아간 거란족, 고려를 짓밟은 원나라 몽골족, 조선과 사대관계를 맺었던 명나라, 병자호란으로 치욕적인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 그리고 6·25 때 인해전술로 南北韓 분단에 큰 역할을 했던 中華人民共和國까지 韓中의 역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사이사이 많은 문화와 경제의 교류가 있었고, 中國이라는 거대 왕국을 옆에 두고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던 韓國의 자주성과 독자성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 또한 日本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위에서 기술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韓國과 日本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다. 日本과 中國 사이에도 역시 많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주로 한반도를 거쳐 日本에 문화 등을 전파하였는데,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종교와 성리학이나 주자학 등의 전파가 주된 문화였다. 또한 원나라는 고려를 통해 日本을 침공하려 했으나 태풍 때문에 두 차례나 실패했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침공한다는 목적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과 정묘재란이 발생했다. 이 때 유명한 장군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그 후 격동하는 근대로의 전환을 거쳐 日本에서는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근대화가 빨리 진행되어 동남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淸日 전쟁, 러日 전쟁 등을 일으켜 한반도 및 만주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고, 난징대학살, 관동대학살, 대한제국에 대한 약탈, 성노예 문제, 731부대의 생체실험 문제 등 엄청난 만행을 자행했다. 결국 日本은 진주만 공격으로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내다가 무참히 패배하여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그 뒤 패전을 딛고 韓國전쟁 때 전화위복을 맞이하여 현재의 日本이 서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ⅱ) 현재
잃어버린 10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日本과는 달리 中國은 빠른 경제성장으로 동아시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韓國의 경우 對日本 수출액보다 대중국 수출액이 많고, 中國에 투자하는 회사도 많고, 中國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그러나 작년부터 日本이 회복하는 기미를 보이면서 韓中日 자유무역협정지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ⅲ) 미래
韓中日 3국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본다면, 역사적 문제가 해결되고, 관세가 없어지며, 단일통화가 등장하여 결국에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문제의 해결이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면, 경제가 통합된다 하더라도 단일공동체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中國人과 韓國人이 가진 反日정서를 감안해 볼 때 경제통합 역시 필요악으로 치부될 가능성도 있다. 미래에 경제통합 및 동아시아 단일공동체 형성은 꿈이 아니라 이루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 아시아가 살아남을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다.

ⅳ) 경제통합문제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동북아 지역에서는 자유무역협정을 통한 지역경제통합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동북아의 韓中日 3국은 다양한 형태의 FTA 체결을 추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3국간 FTA도 검토하기로 함으로써 동북아지역의 경제통합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역패권 경쟁, 영토분쟁, 과거사 문제, 中國의 사회주의적 경제체제, 경제적 격차 지속 우려 등으로 동북아 3국간 경제통합에 대한 논의가 어려웠으나, 냉전의 종식으로 정치 및 군사적 대립관계가 약화되고, 금융위기 이후 韓中日 3국은 인근국가와의 경제협력 강화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동북아 韓中日 3국간 FTA를 통한 3국의 긴밀한 경제협력은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되며, 경제발전 단계 및 인적·물적 자원의 차이에 따른 보완성에 비추어 일단 뭉치면 세계 최강의 경제블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韓中日 3국간 갈등관계를 협력의 동반자관계로 발전시키는데 경제적 협력 강화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정치, 이념, 역사인식의 차이에 기인한 韓國과 中國의 對日本 관계와 中國과 日本간 패권경쟁 등이 지역적 갈등과 불안정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경제적인 부분부터 협력하여 만든 화해 분위기가 이념 등의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풀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참여정부는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을 국정운영지표의 하나로 설정한 만큼 韓中日 FTA 체결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동북아 경제협력체를 형성하고, 장기적으로 이를 유럽의 EU와 같은 경제공동체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中國과 日本은 동아시아 패권경쟁국으로 동북아 경제통합을 주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지리적, 경제발전단계면에서 중간자적 입장에 있으며, 지역패권을 추구한다는 우려가 작은 韓國이 韓中日 FTA 추진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Ⅶ. 세계 속의 日本

항복문에 따라 일본은 1895년 이후에 획득한 영토는 모두 포기하였다. 日本을 점령한 연합국은 日本의 비무장화·민주화를 추진하였고 1947년에는 정치·사회·교육 개혁안을 포함시킨 새 헌법이 통과되도록 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보수적인 자민당정권 아래에서 日本의 經濟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비무장화에 따라 국방비의 부담이 없어졌고 韓國의 6·25에 따른 특수 등을 발판으로 삼아 성장을 거듭하여 20세기 후반에는 세계 대부분 나라의 가장 큰 무역상대국이 됨과 동시에 가장 큰 무역흑자국이 되었다. 그러나 日本은 막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과거 주변국들을 침략한 역사를 왜곡하고 무역에 있어서 불공정한 행위를 함으로써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20세기말에 들어와 日本은 경제력에 걸맞게 세계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나라가 되기를 요청받고 있다.

 <참고문헌>

1.  삼성경제연구소. 日本經濟 되살아나고 있는가.
2.  韓國일보 - 세계2위 경제대국 유지비결.
3.  www.empas.com 백과사전
4.  삼성경제연구소. 잃어버린 10년, 日本의 교훈
5.  <韓國經濟 희망을 찾아서> 日本의 '잃어버린 10년'
6.  韓國일보. '10년 잠 깬 日 보통국가로 변화 모색' 전문가 좌담
7.  韓日역사문제연구소. 우리역사 바로알기
8.  日本의 21세기 대외전략과 韓日관계. 배준호 한신대 교수
9.  삼성경제연구소. World Report 제100호
10. 한국브리태니커 온라인
11. 살아있는 한국사 1권
12. www.cyworld.com  미니홈피 화양연화
13. 대외경제정책연구원. 韓中日 FTA 필요성과 韓中日의 입장.
14. www.daum.net 다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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