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면서

     다음달부터 삼성카드사가 수수료율을 올린다고 한다. 유가 상승이나 미국의 금리 인상이라는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만, 무엇보다도 신용불량자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카드사가 얻는 수익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나 같이 꼬박꼬박 카드 대금 결제하는, 한 번도 연체된 적 없는 우수 고객들만 피해를 본다.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의 비용을 열심히 대금을 지불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대신 지불해야하는 이 현실이 너무나 짜증이 난다. 물론 칸트가 이런 나를 보았다면, "네가 카드 대금을 지불하는 것은 너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 결과에 상관없이 너는 항상 카드 대금을 일정한 시일에 결제해야만 한다." 라고 말할 것이다. 또한 신용불량자들에게는 "마치 네 행위의 준칙이 네 의지에 의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할 것처럼 그렇게 행위 하라."고 엄숙히 꾸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무책임하게 카드를 사용하여, 카드 빚으로 인해 가정까지 파탄 나는 사례가 늘어가는 때에 칸트가 이야기하는 '보편적인 법칙'이 설자리가 있는 것인지 조금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런 면에서 칸트의 저서 중 하나인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가 평범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만큼, 대중적인 현 사회에 일침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본다.

 Ⅱ.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의 시작

     전문적인 철학적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칸트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상식에서 출발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고, 다양한 예를 들고 있으며, 핵심적인 사상을 반복해서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저서들보다는 이해하기가 쉬웠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따라가면서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만약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경향성에 따라 움직이는 모순적인 존재가 될 것이고, 오히려 이러한 어려움이 나의 의무를 더욱 빛내줄 것이기 때문에 내 능력껏 준비해 보았다.
     칸트의 저서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가 의도하는 바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이 저서는 나중에 『도덕 형이상학』에서 다루게 될 구체적인 주제에 대한 기초를 세우려는 것이다. 즉 도덕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칸트의 표현을 빌리면 "도덕성의 최상의 원칙을 찾아서 확정하는 일"이 이 저서가 의도하는 바이다. 이 최상의 원칙이 곧 '정언적 명령법'이고, 우리의 행위가 도덕적 행위의 형식에 맞아야 한다는 명령인 것이다.
     이 책은 모두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이 구분은 평범한 인식에서 출발해 그것의 최상의 원칙을 규정하는 데로 분석해나가고, 그런 다음 그 원칙을 검토해서 그 원칙의 원천으로부터 그것이 사용되는 일상적 인식으로 종합해나가기에 가장 알맞은 방법이라고 한다. 그 구분은 다음과 같다.
제 1장 : 도덕에 대한 평범한 이성 인식에서 철학적 이성 인식으로 넘어감.
제 2장 : 대중적인 도덕 철학에서 도덕 형이상학으로 넘어감.
제 3장 : 도덕 형이상학에서 순수 실천이성 비판으로 넘어감.
 Ⅲ. 도덕에 대한 평범한 이성 인식에서 철학적 이성 인식으로 넘어감.

     칸트는 이 장에서 도덕성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에서 출발해 그것들을 분석함으로써, 그러한 생각을 갖도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제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밝혀내고자 한다. '평범한 이성 인식'이 도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 중 하나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는 특별한 종류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이다. 

"세상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밖에서조차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선한 의지는, 그것이 실현하거나 성취한 것   때문에 또는 그것이 제시된 어떤 목적들을 제대로 달성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려고 한다'는 것 때문에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선하다. (....) 이 선한 의지가 자신의 의도를 도저히 끝까지 성취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달성되지 않고 선한 의지만이 남는다 하더라도, 선한 의지는 보석처럼 자신의 완전한 가치를 자기 안에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빛날 것이다. (....)"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는 저 말로 시작한다. 여기서 칸트는 참으로 선하다는 것을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쾌락이나 행복이라고 하지 않고, '인간의 세상에서든 천사의 세계에서든 어디서나 선한 것은 오직 선한 의지일 뿐'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선한 의지를 통해서만 선한 것이 되며 가치를 지니게 된다. 즉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라는 주장이다. 선한 의지는 오직 '선해지려고 한다'는 것에 의해서만, 어떤 다른 것과 관련되지 않고 그 자체로 그러한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건강이나 행복과 같은 것도 물론 가치를 갖지만, 그것들이 갖는 가치는 다른 것과의 관련 하에서 갖는 '조건적 가치'일 뿐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이 가진 천재적인 능력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선한 목적에 사용된다는 조건에서만 가치가 있다. 결국 그의 천재성은 원자폭탄이라는 무서운 살상무기를 개발하는 데 쓰임으로써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주고 말았다. 그러나 물에 빠진 어떤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선한 의지'를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을 구하려다가 자기도 함께 죽을 수 있고, 또는 물에 빠진 그 사람이 살인마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선한 의지를 그 자체로 칭찬하고 존경한다. 그 선한 의지는 천재성과 같은 성품이나 그 결과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 이렇게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에 절대적 가치를 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류의 동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동기를 칸트는 '의무'에서 찾으려고 한다.

"모든 우리 행위의 가치를 평가할 때, 항상 맨 앞에 있고 나머지 모든 가치의 조건이 되는   그 선한 의지라는 개념을 명백히 하기 위해 우리는 의무라는 개념을 다루려고 한다."

     의무라는 것은 행위자 자신이 갖는 어떤 장애와 한계를 넘어서려는 선한 의지를 말한다. 그런 장애와 한계는 오히려 선한 의지를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어떤 행위가 의무에 맞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자기가 어떤 외부적인 목적에 의해 그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이 우연히 의무에 맞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의무에 맞는 어떤 행위가 '의무이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면, 그 행위는 우연적이 아닌 필연적으로 '의무에 맞을' 것이고, 따라서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선한 의지'의 자격을 갖게 된다. 즉 선한 의지란 의무를 동기로 하는 의지, '의무이기 때문에' 하려고 하는 의지인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경향성 없이, 단지 '의무이기 때문에' 행위를 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그 행위는 참된 도덕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본성상 마음에 동정심이 거의 없는 어떤 사람이 성실하지만 냉정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며, 다른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러나 그 사람이 원래 박애주의자가 아니라고 해도, 마음씨 착한 사람이 가진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가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장 높은 그 도덕적 가치를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상, 그 가치는 경향성 때문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에' 자선을 베푼다는 사실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는 그 행위를 통해 달성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 행위를 결심할 때 준수하는 준칙에서 자신의 도덕적인 가치를 갖는다. 즉 이것은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내용을 말하지 않고 오직 형식만을 표현하고 있다. 칸트는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가진 준칙과 그런 내용을 갖지 않고 단지 '의무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하는 형식적인 준칙을 구별한다.
     그렇다면 '의무인 것'을 하기로 한 이 '형식적인 준칙'을 따르게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어떤 경향성도 동기가 될 수 없고, 오직 '법칙에 대한 존경심'만이 동기가 될 수 있다. 내용을 가진 준칙이 '자기의 경향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위 하라'는 것이라면, 내용 없이 단지 형식만을 가진 준칙이란 개별적인 행위자의 경향성을 무시하고 '모든 이성적 행위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그것에 따라 행위 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성적 행위자에게 적용되는 그것이 바로 법칙이고, 모든 이성적 행위자는 그가 이성적이기만 하다면, 오직 법칙에 따라서만 행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이기만 하다면, 오직 법칙에 따라서만 행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욕구와 경향성을 가진 감성적인 존재이고, 그래서 저절로 법칙에 따라 행위 할 수는 없으며 그 법칙을 따라야겠다고 결심하고 의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이성적 행위자에게 적용되는 법칙은 객관적 실천 법칙이고, 개별적 인간이 그 법칙을 따르겠다는 원칙을 정한 것이 준칙이며, 이 실천 법칙을 따르려고 하는 의지가 결국은 이 법칙에 대한 '존경심'이다. 이렇게 해서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가 특별한 도덕적 가치를 얻는 것은 행위자가 '법칙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 행위를 했다는 사실에 있다. '선한 의지'의 원칙은 오직 법칙의 형식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그런 준칙에 따라, 즉 '하나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나 또한 바랄 수 있도록 그렇게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Ⅳ. 대중적인 도덕 철학에서 도덕 형이상학으로 넘어감.

     인간은 완전히 이성적인 존재가 아닌 까닭에 욕구, 공포, 나약함 때문에 이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행위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준칙과 도덕 법칙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듯 욕구나 공포에 의해 영향을 받는 우리에게는 실천 이성의 객관적 법칙이 '명령법'의 형식으로 나타나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을 명령한다.
     명령법에는 가언적인 것과 정언적인 것이 있는데, 가언적인 명령법은 '네가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어떤 다른 것을 해야만 한다'고 명령한다. 이 명령법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기 때문에 '숙달의 명령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언적 명령법에는 이것 외에도 행복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영리함의 명령법'도 있다. 이런 가언적 명령법과 달리 정언적 명령법은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목적)에 상관없이, 즉 무조건적으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령한다.

㉠ 보편적인 법칙
   가언적 명령법에서는 목적을 나타내는 조건절이 먼저 주어지지 않으면 그 명령법이 무엇을 명령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정언적 명령법에서는 조건절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 명령법이 명령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 수 있다. 정언적 명령법이란 우리 인간의 준칙이 따라야 하는 하나의 법칙이다. 그러나 그 법칙은 어떤 조건이나 더 상위의 어떤 법칙을 가지지 않는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살인을 하지 말라'라는 준칙에 따라 행위 할 때 그것이 '신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준칙은 '신의 뜻을 따르려면'이라는 조건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고 가언적 명령법에 따르는 것이다. 정언적 명령법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명령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행위 할 때 따르는 준칙에 아무런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준칙이 따라야만 하는 법칙이 있다면 그 준칙 자체가 법칙이 될 것을 명령하는 법칙뿐이다. 그렇다면 정언적 명령법이 명령할 수 있는 바는 우리의 준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정언적 명령법은 단 하나뿐인데, 그 준칙을 통해서 네가 그것을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 삼으'려고 할'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 하라는 것이다."

   어떤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검토해봄으로써, 즉 그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바랄 수 있는지를 검토해봄으로써,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가려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연이란 보편적인 자연 법칙에 의해서 형성되어 있고, 그래서 자연 법칙을 보면서 법칙의 보편성이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일은 곧 준칙이 자연 법칙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의무에 관한 보편적인 명령법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네 행   위의 준칙이 네 의지에 의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할 것처럼 그렇게 행위 하라"

   칸트는 자살, 거짓 약속, 자기 계발, 자선 등의 예를 통해서 준칙이 자연 법칙이 될 수 없는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 연속적인 비운과 거듭된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그 고통을 면하고자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사람의 감정은 삶을 촉진하도록 밀어주게 되어 있는데, 감정에 의하여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법칙으로 하는 자연은 자기 자신에게 모순되며, 자연으로 유지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보편적 자연 법칙이 될 수 없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자살은 용납될 수 없다고 한다.
▶ 돈이 필요할 때 갚을 가능성이 없음을 알면서도 갚겠다고 약속하고 돈을 빌리는 행위는 용납될 수 있는가?
거짓 약속의 준칙이 자기의 준칙임과 동시에 자기를 포함한 세계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모순이다. 즉 지킬 의사도 없는 약속을 함이 보편적 법칙이 된다면 약속은 제구실을 하지 못하므로 거짓 약속은 어떤 경우에도 옳지 않다.
▶ 환경이 좋아 물질에 부족함이 없을 경우에는 재능을 연마하지 않고 향락을 일삼아도 되는가?
이성자로서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의욕 하는 것은 자기가 가진 모든 능력을 발휘함인데 이는 보편적 자연법에 어긋나므로 옳지 않다.
▶ 남을 도울 능력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여 남을 돕지 않아도 되는가?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위와 같은 준칙에 따라 잘 유지될 수 있을지라도, 그러한 원칙이 자연 법칙으로서 모든 점에서 적용되어야 한다고 바라는 일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이런 것을 결심한 의지는 자기 자신과 대립하는데, 다른 사람의 사랑과 동정심을 필요로 하면서도, 자기의 의지에서 생겨난 자연 법칙 때문에 소망하는 모든 희망과 도움 자체를 빼앗기는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들고 있는 예들은, 우리의 행위가 도덕적인 지의 여부를 정언적 명령법이 어떻게 확정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어떤 준칙이 정언적 명령법을 통과한다면 그 준칙에 따른 행위는 허용된다. 정언적 명령법은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 행위는 금지되어, 우리는 그 반대되는 행위를 하거나 아무런 행위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예들은 자기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바랄 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 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칸트는 우리가 도덕적이지 않은 행위를 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를 전혀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도덕적이지 않은 행위를 지시하는 준칙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려고 할 때 모순이 생긴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 약속을 하라는 자기의 준칙을 보편적 자연 법칙으로 바라면 모순에 빠진다고 해서 거짓 약속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왜 우리가 자기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기를 바라야 하는지 밝혀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 목적으로서의 인간성
   이제 정언적 명령법, 도덕법이 필연적으로 우리 이성적인 존재들의 행위의 동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때 경험적이고 우연적인 동기들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이성적인 존재는 법칙에 대한 표상에 따라서 행위한다. 그런데 우리가 준칙이나 법칙을 만들게 되는 것은 목적 때문이다. 어떤 행위를 하려고 결정할 때 우리는 언제나 어떤 목적을 갖는데, 행위가 그 자체로 목적일 수도 있고(정언적 명령법) 다른 더 장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가언적 명령법) 그런데 만약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요구되는 행위라면,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필연적으로 갖고 있는 목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목적을 모든 이성적인 존재에게 적용되는 목적이라는 점에서 '객관적 목적'이라고 하고, '동인'이라고 한다.
   우리의 일상적 행위의 주관적인 목적은 상대적인 가치만을 갖는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들은 대부분 인간의 필요나 욕구, 관심에 봉사하는 한에서 가치를 갖는다. 반면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갖는 '객관적인 목적'은 절대적 가치를 갖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가치는 다른 모든 상대적인 가치가 그 가치를 얻게 되는 그런 절대적인 가치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객관적인 목적'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인간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인간이 행위할 때의 주관적 원칙"이기도 하다.
   도덕법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힘을 갖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갖는 '객관적인 목적'이 필요하고, 그 객관적인 목적이 바로 '인간,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성적인 존재 모두'인 것이다. 정언적 명령법이 명령의 힘을 갖는 것은 이성적인 존재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목적 때문이다. 그래서 정언적 명령법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네가 네 인격 안의 인간성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 안의 인간성까지 결코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언제나 수단과 동시에 목적으로도 사용하도록 그렇게 행위 하라."

   이것은 행위의 목적에 대해, 다시 말해 행위의 동기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을 목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인 한 정언적 명령법에 따라서, 자기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바랄 수 있게끔 그렇게 행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단순히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 목적을 위해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이성적인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존경해야 한다. 누군가를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존경한다는 것은 자기의 인생과 행위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존경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행위는 자기의 목적을 위해 타인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빼앗는 것이며, 도덕법에 어긋난다.  
   앞에서 사용한 네 가지의 예를 기억해보자.
▶ 첫째, 힘든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파괴한다면, 그는 하나의 인격을 단순히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지 않게 지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이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가 무슨 행위를 하든 언제나 목적 그 자체로 간주되어야 하므로 나는 내 인격 안에 있는 인간을 불구로 만들거나 상처를 입히거나 죽을 수 없다. 
▶ 둘째,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돈을 갚겠다는 약속을 듣지 않았다면 빌려주지 않았을 텐데, 이 때 거짓 약속으로 돈을 빌리는 사람은 돈을 빌려주는 사람의 이성을, 즉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거짓으로 약속한 사람의 행위가 잘못된 것은 단순히 진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거짓과 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인간성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느냐의 여부에 있다.
▶ 셋째, 재능이란 계발되어야 할 소질을 의미한다. 이 소질들은 인간의 "자연 목적"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질들의 계발은 인간의 자기 완성을 비로소 가능케 한다. 소질을 계발하지 않는다고 해서 목적 자체로서의 인류의 자기 보존이 위험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목적 그 자체의 발현"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 넷째, 타인을 돕지 않으려고 하는 자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잇는 자연적 목적, 즉 자기 자신의 행복"에 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스스로 목적을 결정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도움, 또는 타인이 행동할 수 있기 위해 필요로 하는 도움, 즉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도움을 베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할 수 있음의 가능성은 동시에 내가 목적 자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 조건이기도 하다.

㉢ 자율성과 '목적의 나라'
   앞에서 살펴본 법칙의 형식인 보편성과 법칙의 내용인 절대적 가치로서의 인간성 이 두 가지 생각이 결합해서, 이성적인 존재인 우리가 스스로 그 법칙을 만든다는 세 번째 생각에 이르게 된다.

"(....) 보편적으로 법칙을 주는 의지는 이성적인 존재 각각의 의지라는 이념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법칙을 따르겠다는 동기를 갖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우선 우리는 어떤 '관심' 때문에 법칙을 따른다.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제재가 따르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떤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비난받거나 추방되거나 지옥에 떨어지고, 그 법칙을 지키면 칭찬받고 보상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법칙을 따라야 할 동기가 충분하다.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 자신이 법칙 자체를 제정하고 승인했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법칙을 따라야 하고 자기 자신도 그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칙을 따른다. 칸트는 첫 번째 경우의 동기에 대해 '타율적'이라고 말하는데,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 때문에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우의 동기는 '자율적'인데, 우리가 스스로 그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가 도덕적이려면, 따라서 정언명령에 따르는 것이려면 그 행위의 동기가 자율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타율적인 동기를 갖는다면, 그 때의 명령법은 가언적 명령법이다. 만약 정언적 명령법이 존재하고, 따라서 도덕성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자율적인 동기를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의무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 그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했기 때문이다.
   칸트 이전의 도덕 철학자들은 도덕성의 원칙을, 즉 의무의 근거를 인간이 밖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의무의 근거는 인간이 갖는 자기 지배의 능력, 즉 자율성에서만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성의 법칙을 우리의 행위에 부과하고, 행위를 함으로써 그 법칙을 세계에 부과하는 것이다.

"의지가 자기의 준칙에 의해 스스로를 동시에 보편적으로 법칙을 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행위 하라."

   이 원칙에 따라서 행위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목적의 나라'에서 법칙을 제정하는 입법자로 생각하게 된다. 이 곳에서 시민들은 외부의 어떤 것으로부터 법칙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지켜야 할 공동의 법칙을 스스로 제정하고 또 그 법칙에 스스로 복종한다. 이런 나라에서는 우리 자신이 법칙을 제정하는 시민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인간에게 존엄성이 주어질 수 있다. 바로 이 존엄성이 선한 의지의 무조건적이고 제한 없는 가치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도덕 법칙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힘을 가지려면 우리가 어떠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즉 우리는 자율적인 존재여야 하고, 스스로를 '목적의 나라'의 시민으로서 법칙을 제정한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우리가 실제로 '자율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우리가 자율적인 존재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도덕 법칙에, 정언적 명령법에 따라서 행위 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Ⅴ. 도덕 형이상학에서 순수 실천이성 비판으로 넘어감.

     앞에서 우리는 도덕 법칙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상적인 생각을 분석해서 도덕 법칙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냈다. 도덕 법칙은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바랄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 행위 하라'였다. 그리고 도덕 법칙에 복종할 수 있으려면 의지의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도 이끌어냈다. 이제 남은 일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도덕 법칙에 복종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율성을 '실제로'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도덕 법칙이 명령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선한 의지와 준칙의 보편적 법칙성이 양쪽을 다 포함하고 있는 세 번째 인식과 연결되어 서로 결합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한다. 칸트는 이 세 번째 인식을 '자유'에서 찾는다.
     칸트는 "자유라는 개념이 의지의 자율성을 설명하기 위한 열쇠"라고 하면서 자유의 개념을 두 가지로 나눈다. 의지는 이성적인 존재의 인과성인데, 이성적인 존재에게는 의지가 행위 하는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인과성은 바깥의 다른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일 없이 작용할 수 있고, 그렇게 할 때에만 '자유롭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러므로 만약 이 의지가 자연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의지가 아니게 된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 이외의 어떤 다른 원인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아야 한다. 이 때 자유의 개념은 자기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따라서 소극적 의미이다. 이러한 소극적 개념만으로는 이성적 존재가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없다.
     자유에는 적극적인 개념도 있다. 의지는 인과성이고, 인과성이란 법칙에 따라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자연의 인과성이란 자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자연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유도 "비록 의지가 자연 법칙을 따를 때의 속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법칙이 없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특별한 종류이긴 하지만 불변하는 법칙에 따른 인과성이어야만 한다." 자유로운 의지는 자기 자신의 법칙이나 원칙을 가져야 하고, 이것은 자기 아닌 다른 것에서 올 수 없으므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준 것이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법칙을 주는', 다시 말해 '자율적'인 의지여야 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법칙에 스스로 복종한다는 것, 즉 자율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의지란 도덕 법칙 아래 있는 의지와 동일하다.
     이렇게 해서 자유와 도덕성은 연결된다. 즉 자유의 개념 안에 스스로 도덕 법칙을 만들고 복종한다는 개념이 이미 포함되어 있게 된다. 자유로운 의지란 도덕 법칙에 복종하는 의지이고, 우리가 자유로운 의지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도덕 법칙에 복종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과연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자유는 모든 이성적인 존재의 의지가 갖는 속성으로서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성의 판단에 따라 어떤 행위를 한다고 생각할 때, 지금 결정한 것과 전혀 다른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이성이 판단해서 결정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이성적인 존재의 의지는 오직 자유의 이념 아래에서만 자기 자신의 의지일 수 있으므로, 실천적인 관점에서 모든 이성적인 존재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자유와 이성적인 존재가 연결된다. 즉 이성적인 존재라는 개념 안에 자유라는 개념이 포함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유와 도덕성이 연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이성적인 존재가 연결됨으로써, 칸트가 제기했던 과제인 무조건적으로 선한 의지와 준칙의 보편 타당성을 연결하는 종합적 명제의 가능성을 밝히는 과제가 달성되었다. '자유'라는 세 번째 개념이 도덕성과 이성적인 존재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유가 두 개념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달성된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모든 이성적인 존재는 왜 이 원칙을 따라야 하는가? 도덕성의 원칙에 따라 행위 하려고 한다면 도덕성의 원칙에 복종하려는 관심을 필연적으로 가져야 한다. 즉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그 도덕성의 원칙을 따르기 위해서는, 도덕성의 원칙 자체가 행복에 대한 나의 관심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정도로 강력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다시 말해 "도덕 법칙이 어떻게 구속력을 얻는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세계를 이원화시킨다.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의 사물들로 구성된 세계인 감성계(현상계)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사물들이 아니라 그렇게 나타날 수 있게 해 주는 사물 자체들의 세계, 자유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인 지성계(예지계)가 있다. 우리는 양쪽 모두에 속해 있다. 이로써 우리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것이 도덕성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미리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성계뿐 아니라 지성계에도 속한다는 데 근거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제 다시 칸트는 "정언적 명령법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돌아온다. 지성계가 감성계의 근거, 따라서 감성계의 법칙의 근거를 포함하기 때문에, 지성계에 속하는 존재인 우리가 감성계에 속하는 존재인 우리에게 법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감성계에 속하는 존재인 우리는, 지성계에 속하는 우리가 준 법칙을 명령법으로 생각하고, 이 명령법에 맞게 행위 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칸트는 "모든 실천 철학에 대해 고찰"한다. 우리가 실천하는 데에서 이성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유는 단지 이념일 뿐이기 때문에 경험될 수 없고, 따라서 자유라는 이념은 결코 설명될 수도 개념으로 파악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도덕 법칙에 관한 관심도 설명될 수 없다. 그렇지만 목적들 그 자체의 보편적 나라라는 훌륭한 이상이 우리에게서 생생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우리 자신도 그 목적들의 보편적인 나라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도덕성에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가치를 주고 '관심'을 갖는다.

 Ⅵ. 마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칸트가 살았던 18세기와 비슷하다. 도덕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이고, 사실 도덕이 무엇인지조차 헷갈리기도 한다. 안락사, 복제 인간 등의 문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듯하다. 이런 시대에 칸트의 윤리학이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칸트의 철학이 세워진 이후로 많은 지지를 얻었고 또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물론 그의 논리 전개나 철학에 비판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그의 말이 다른 어느 구절보다도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면서 이 글을 마친다.

 < 참고자료 >      
     
1.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책세상. 2002. 임마누엘 칸트 지음.

2. 쉽게 읽는 칸트. 정언명령. 이학사. 2002. 랄프 루드비히 지음.

3. 호모 에티쿠스. 한길사. 2003. 김상봉 지음.

4. 서양근대철학. 창작과 비평사. 2003. 서양근대철학회 엮음.

5. 철학의 거장들 3. 한길사. 2001. 오트프리트 회페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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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06-25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찬히, 시간을 갖고 꼬마요정 님의 서재를 둘러봤어요. 로맨스에서 칸트까지 관심도 다양하고, 볼 거리도 많은 서재네요.

방명록에 글을 남기려다가 칸트에 관한 레포트(?)에 몇 자 적습니다. 카드사의 수수료율 인상으로 레포트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합니다. ^^..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를..

꼬마요정 2004-06-25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상경계열 전공이다보니 아무래도 사고방식이 경제적이게 된답니다..^^;;
제 서재를 칭찬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0^
브리즈님의 서재는 신비스럽고, 왠지 지중해를 연상시켜서 참 좋아하는데...
브리즈님두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