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미는 말은 꽃, 진실된 말은 열매, 듣기 싫은 말은 약, 듣기 좋은 말은 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나라의 개혁가 상앙이 조량의 충고를 얻고자 인용한 말이었지만 결국 그의 충고를 무시하여 화를 당했습니다. 조량은 충고로 백리해를 예로 들었는데, 백리해는 진 목공에게 힘들게 채용이 되어 덕으로서 통치하며 무릇 나라도 부국강병하게 하고 백성과 신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욕심이 없어 왕이 내린 하사품을 받지 않고 땡볕에서도 가리개를 쓰지 않는 등 청렴결백하여 그가 죽자 나라전체가 슬퍼하였습니다. 반면 상앙은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교만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앙을 지지하던 효공이 죽자 반역죄로 몰려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자법자폐’(자기가 만든 법에 자기가 걸리다)란 고사는 바로 상앙을 일컬은 것입니다. 비록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상앙의 변법이 진나라 개혁을 이끈 일등공신임은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중국 역사를 통틀어 전면적인 개혁이 성공한 예는 극히 드문데, 멀지 않은 송대에만 해도 왕안석의 신법은 훌륭한 개혁안이었으나 좌절되어 결국 송나라는 멸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앙의 변법은 개혁을 이끌어가고 성공시킬 수 있었을까요?
상앙은 세 번의 독대로 진 효공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효공의 됨됨이와 개혁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투철함을 파악했습니다. 기존의 실권자들은 개혁에 반대하였지만 상앙이 탁월한 언변으로 반대를 물리치고 왕과 의기투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나무 옮기기와 법을 어긴 태자에 대한 형벌(공자 건과 스승이 대신 벌을 받음)을 통해 법의 신뢰성을 확립하자 개혁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1차 변법은 십오제도의 강화, 가족제도의 개혁, 군공장려, 농업장려 등 사회구조 개혁에 중점을 두었고, 2차 변법은 전통적 부락제 해체, 전국의 성읍과 촌락을 재편하여 31현을 설치, 전세를 국가가 직접 징수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정치제도 개혁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사기에 따르면 10년이 지나자 진나라에서는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가는 이가 없고 도둑이 없었으며 집집마다 사람이 넘쳐났습니다. 또한 전쟁터에서는 모두가 용감하게 싸웠으며 사사로운 다툼이 없어 마을마다 평화로웠습니다.
송나라 왕안석의 신법의 경우 신법 자체는 개혁적이며 근대적이었지만, 여러 차례 중단되었고 신종의 지지가 약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반면에 상앙의 변법은 중단되는 일 없이 구체제의 반대를 효종이 막아주며 절대적인 지지를 보여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앙 변법의 성공은 상앙이라는 걸출한 기획가 한사람의 공이라기보다는 효공이라는 절대적 지지자와의 합작품이라는 평가가 더 어울릴 것입니다. 왕권 국가의 경우 왕과 개혁가의 밀접한 결속력이 개혁의 성공여부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뛰어난 개혁안도 중요하지만 신법의 경우에서 보듯이 왕의 지지가 없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개혁이란 뛰어난 개혁안과 그 개혁안을 알아 볼 수 있는 왕의 안목, 둘의 결속력과 추진력이 더해져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나라 목공과 백리해, 제나라 환공과 관중, 진시황과 이사, 신라 무열왕과 김유신, 고려의 공민왕과 신돈 등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진나라는 효공과 상앙이라는 명콤비의 개혁으로 전국시대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으며, 훗날 천하를 통일하는 기초를 마련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