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리주의에 대해서 >
-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가 경제학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담 스미스 이래 리카도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자들은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투여된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노동 가치론을 주장했지만, 상품에 투여된 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하느냐는 질문에는 정확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 때 마르크스가 노동의 양을 통해 상품에 투여된 노동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론을 주장했고, 이 이론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로 인해 자본가들은 당황했다. 산업 혁명 이후 산업 자본가들은 기업 운영으로 많은 돈을 버는 반면에 노동자들은 빈곤에 시달렸는데,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기업을 운영한다면 자본가에게는 남는 것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자기들의 이해를 대변해줄 경제학이 필요했다. 이 때 경제학자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공리주의 이론이었다. 후대의 경제학자들은 벤담과 밀의 쾌락과 고통의 개념을 효용이라는 말로 바꾸었고, 효용을 측정하면 상품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는 한계 효용 이론을 발전시킨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현대에 와서 철학의 위기라 일컬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시발점이 바로 근대 철학 사상 중 하나인 공리주의였다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마지막 고전학파의 학자임과 동시에 공리주의자였던 그의 사상을 알아보는 것은 어쩌면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당연한 귀결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정직한 것이 자기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정직이 보편적으로 실천되기를 의욕할 수가 있다. 즉 '모든 사람이 정직한 것은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최상의 정책'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추론 방식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도덕적 관점을 취했다고 주장할 수가 없지 않는가? 칸트는 그러한 의지가 도덕적 관점의 일부라고 생각한 점에서 옳기는 하나 도덕적 관점이 그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공리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18세기말과 19세기는 놀랄만한 변혁의 시대이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근대 민족 국가가 출현하고 나폴레옹 제국이 몰락하고 있었다. 미국의 유혈적 시민전쟁은 급기야 서구 문명 사회에서 노예제도의 종식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산업혁명이 전반적인 사회의 재편성을 초래하고 있었다. 이때의 공리주의 도덕 실천가들은 이전의 낡은 가치들에 진부함을 느끼고 도덕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쾌락 그 자체를 유일한 선으로 여기고, 행위의 유쾌한 결과를 도덕률의 기준으로 여기면서 결정론에 도덕 이론의 기초를 두고자 하였다. 흄은 영국의 사상사에서 도덕 의식의 이론으로부터 기본적인 공리주의적 전제에로의 길을 열어 주었으므로 그를 공리주의의 창시자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보통 공리주의 철학과 관련되는 두 인물은 벤담과 밀이다. 처음 벤담에 의해 공리주의가 널리 알려져 영국의 사회적·정치적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벤담에 의하면 도덕은 신을 기쁘게 하는 문제가 아니며, 추상적인 규칙들에 매달리는 문제도 아니다. 도덕은 이 세계에 가능한 한 많은 행복을 가져오게 하려는 의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벤담은 하나의 궁극적인 도덕 원리, 즉 "유용성의 원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유용성의 원리란,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당사자들의 행복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경향성에 따라, 다시 말해 행복을 증진시키느냐 감소시키느냐에 따라 모든 행동을 시인하거나 비난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그는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는 이익이 없는데 남을 위해 봉사할 것이라고는 꿈도 꾸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남에게 봉사하는 일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는 상황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위자가 행동하도록 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이익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편애(self-preference)는 자신의 이익이 어떤 사람 혹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이롭지 못할 때조차도 언제나 작용한다. 이것은 늘 인간을 형성시켰고 앞으로도 항상 인간을 형성시켜 줄 것이며, 도덕 이론은 이러한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벤담은 영국의 법률과 제도를 공리주의 노선에 따라 개혁하려는 목표를 가진 일단의 철학적 급진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추종자 중 한사람인 제임스 밀은 탁월한 스코틀랜드의 철학자요, 역사학자이며 경제학자였다. 제임스 밀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은 그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공리주의적 윤리설의 지도적 옹호자가 되었다. 그는 최대 행복의 원리에 의하면 그것에 관하여, 그것에 의하여 다른 모든 것들이 바람직한 것이 되는(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을 고려하고 있거나, 아니면 타인들의 선을 고려하고 있거나 간에) 그 궁극적 목적은 가능한 한 고통이 면제되고, 즐거운 일이 풍성하게 존재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근본 법칙은 아주 간단하게 가능한 한 이와 같은 일이 생겨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순수성, 범위 등 일곱 가지 기준을 가지고 쾌락과 고통에 대한 쾌락 계산법을 제시하고자 한 벤담에 비해 밀은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 반대함으로써 쾌락의 평가에 있어서 양뿐만 아니라 질도 도입하고자 했다. 즉 쾌락, 즐거움, 건강, 만족 등의 많고 적음이 행위 결과에 대한 평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이 쾌락의 고상함과 저열함 또는 탁월함과 비열함까지도 그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밀은 좋은 인생에 대한 공리주의적 견해에서 인간의 고귀한 능력들이 가져오는 만족들에 최우선적인 역할을 할당함으로써, 공리주의는 본능의 만족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다.
밀은 이타성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윤리적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며 그래서 인간의 행위의 판단 기준이 되는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일 뿐 아니라 관련된 모든 사람의 행복임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이 자기와 관련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을 희생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큰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밀의 최대 행복의 원칙에서 행복이란 많은 일상적인 쾌락과 순간적인 쾌감, 미세한 고통과 불합리한 기대를 가지지 않는 데서 오는 전면적인 만족으로 가득 찬 삶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질적으로 최상의 것이어야 하며, 최상의 것으로 생각되는 행복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는 행위가 창출해 내는 행복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원칙의 진술에서 사용되는 행위의 의미와 그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의무의 근거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밀은 비난받을 만한 행위가 칭찬 받을 만한 성질에서 도출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데서가 아니라 행위자를 판단하는 데서 비롯된다. 어떤 사람이 호감이 가고 용감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의 행위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또 잘 이행되었을 때도 불구하고 악한 행위가 되는 경우도 있다. 덕망 있는 성격은 일반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유익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공헌하기 때문에 바람직하며 숭고한 동기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의 윤리적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행위자의 성격이나 동기가 아니라, 행위 자체의 결과이다. 밀은 의무가 윤리상의 제재에서 나오며 어떤 다른 도덕률의 체계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도덕률을 당연히 지키도록 하는 중요한 궁극적인 제재, 양심의 제재를 밀은 어떻게 생각할까? 밀에게 있어서 양심은 동정심이나 상호 이해심, 동료와 함께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특징지어지는 감정 또는 '집단 감정'이다. 처음에는 이런 감정이 이기주의적인 감정보다 약하지만, 사회 조직과 교육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강한 욕망으로 발달됨으로써 다른 사람의 이익을 고려하게끔 만들어 준다. 일단 이런 감정이 형성되면, 이를 위반하는 행위는 양심의 가책을 낳게된다. 밀은 양심을 본질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라고 말한다. 도덕적 행위의 궁극적인 제재가 되고 의무를 최종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은 발달된 동정심으로부터 나오는 바로 인간의 이러한 양심적인 감정인 것이다.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했던 이론인 공리주의는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행위들은 오직 그 결과에 의해서만 옳고 그름이 판단되어야 한다. 옳은 행위란 단지 최선의 결과들을 가져오는 행위이다. 둘째, 결과들을 평가하는 데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은 행위들에 의해 생겨나게 될 행복과 불행의 양이다. 옳은 행위들이란 불행에 대한 행복의 최대 잉여를 낳게 하는 행위들이다. 셋째, 초래되어질 행복 또는 불행을 계산함에 있어서 어떤 사람의 행복도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계산되어져서는 안 된다. 각 개인의 행복은 똑같이 중요하다. 이러한 공리주의의 주장은 많은 반공리주의 논증을 발생시켰는데 이유는 그것들이 도덕 철학의 몇 가지 근본 문제들을 추가로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인가? 공리주의는 옳은 행위란 최대의 선을 낳게 하는 행위들이라고 말한다.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선이란 오직 하나, 행복이다. 밀의 주장에 의하면 '공리주의 이론은, 행복은 바랄 만한 것이고 더욱이 목적으로서 바랄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바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이 하나의 궁극적인 선이라는 사상은 일반적으로 쾌락주의라고 알려져 있다. 쾌락주의 이론을 조금만 검토해 보면 그 이론이 담고 있는 심각한 결점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장래가 유망한 젊은 피아니스트가 교통사고로 손에 부상을 입어 더 이상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이것이 피아니스트에게 나쁜 이유는 무엇일까? 쾌락주의자들은 그에게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가 자신이 마땅히 어떠했어야 되는가를 생각할 때마다 좌절과 실망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의 불행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반대로 현재 불행한 상황에 대한 이성적 대응이다. 그는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삶을 살수도 있었는데 지금 그녀는 그 일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 바로 불행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쾌락주의는 행복의 본질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 행복이란, 다른 것들은 오직 행복을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만 여겨지지만 그 자체로서 선하고 그 자체로서 추구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이란 우리가 독립적으로, 그 자체의 권리에 의해 선한 것들로서 인정하는 사물들을 얻었을 때 그것에 수반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대응물이다.
결과만이 중요한 것인가? 공리주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상은,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그 행위의 결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다른 문제 역시 행위의 옳음을 결정하는데 중요하다는 사실이 판명된다면, 공리주의는 근거가 흔들리게 된다. 예를 들어 한 공리주의자가 어떤 지역을 방문하던 중, 한 흑인이 백인 여자를 강간한 결과로 인종간의 폭동이 일어나 백인 폭도들이 경찰의 묵인 하에 흑인들을 때리고 죽이고 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치자. 그때 공리주의자가 그 범죄 현장에 있었는데, 그의 증언이 특정한 흑인의 유죄 판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그가 신속한 범인 체포가 그 참상과 린치를 그치게 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공리주의자로서 그 사람은 틀림없이 무죄한 사람에게 형벌을 받게 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공리주의에 의하면 거짓말은 그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죄한 사람의 처형을 초래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함축을 지닌 공리주의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적 압력과 교육이 내적인 힘과 더불어 힘과 더불어 밀이 생각하는 바처럼 우리의 행위를 결정한다면(밀은 어떠한 선택의 자유나 자기 결정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다), 도덕적 의무에 관하여 말하는 의미를 무엇일까? 어떤 경우에도 불가피한 행위를 도덕적으로 해야 할 의무가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에도 불구하고 밀의 공리주의는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세기와 19세기의 정치경제학자들 중에서 밀이야말로, 경제적 생산이 정체되는 '침체' 상태를 적어도 산업화 된 국가들에서는 위기 신호와 사회적 파국의 전조로 해석하지 않고 더욱 정의롭고 더욱 태연하고 더욱 개화된 사회적 삶의 가능성으로 해석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후진국들에서나 생산의 증가는 의미있는 일이 된다. 최고의 선진국들의 경우 경제적 관점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개선된 분배이다. 그 분배를 이루기 위한 불가결의 수단은 인구 증가의 더욱 강력한 제한이다. 부와 인구가 무제한적으로 증가하게 될 경우 지구에서 사라질 어떤 그런 것들에 힘입고 있는 지구의 쾌적함이라는 저 위대한 환경을 지구가 잃는다면, 그것도 더욱 개선되고 행복해진 주민들이 아닌, 그저 숫자상 엄청나게 증가된 주민들을 부양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 잃는다면, 이러한 세태가 불가항력적으로 닥치기 훨씬 이전 에 사람들이 침체 상태에 만족하고 살기를 바람이다.'
<참고자료>
1. 인간본성에 관한 논고. D. Hume.
2. 도덕철학. 제임스 레이첼즈 지음. 서광사.
3. 도덕과 입법의 원리들. 벤담. 1789.
4. 현대윤리사상. J.V. 맥글린, J.J 토너 지음. 서광사.
5. 공리주의. J.S. 밀. 1861.
6. 윤리학. 윌리엄 K. 프랑케나 지음.
7. 철학의 거장들 중 J.S. 밀. 디터 비른바허 지음.
8. 탐구. H.J. 맥클로스키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