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개봉했던 장예모의 영화 ‘영웅’은 이제껏 다뤄왔던 진시황의 모습이 아닌 보다 긍정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아주 놀라웠던 것은 모든 진시황의 악행이 ‘파검’이 모래밭에 그렸던 ‘天下’ 그 하나만으로 상쇄되어 버린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미화된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마치 일본이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듯하여, 곧 중국의 중화사상을 극명하게 표출시킨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진시황의 통일정책은 어떠할까요? 교수님의 강의안을 참고하여 몇 가지 알아보았습니다.


   BC 221년은 매우 중요한 해입니다. 상징적으로나마 남아있던 주왕조가 멸망(B.C 256년)하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제나라마저 멸망하여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해이기 때문입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자신을 황제라 칭하였으며 옛 방식이 아닌 군현제라는 새로운 통치체제를 채택하였습니다. 또한 도량형과 문자, 화폐를 통일, 도로를 정비하는 등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방궁, 여산릉, 만리장성 축조와 같이 거대한 토목공사를 추진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그리고 정치사상의 투쟁을 해결한답시고 분서갱유를 일으켰고 천하순행을 통해 불로불사약을 얻고자 발버둥 치며 국고를 낭비하였습니다. 특히 분서갱유는 다분히 역사적 교훈을 주는 사건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정치사상의 투쟁은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상적인 의견의 대립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것은 올바른 정치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서의 결과 사상의 통일은커녕 고대문화의 위대한 업적을 파괴하는 문화말살정책이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갱유는 유생들의 육체는 죽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와 진 황실의 통치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천하통일이라는 명분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목숨보다 소중할까요? 통일 정책을 수행하면서 상살된 사람이 수 천 명일 것이고 토목공사로 희생되거나 갱유로 죽은 사람들만 해도 엄청날 것입니다. 그리고 파괴된 문화의 가치는 어마어마하여 후대의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습니다. 진시황이 진왕 정이었을 시절 형가의 손에 살해되었더라면 중국역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중국에는 ‘협’이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들은 대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알아 준 이에게 스스로 보답하기 위해 행동하였습니다. ‘예양’, ‘섭정’, ‘전광’ 등이 그러한 인물들이었고, 진왕 정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 역시 ‘협’이었습니다. 사마천은 『사기』의 자객열전에서 그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형가는 위나라 사람으로 독서와 검술을 좋아해 그 방면의 전문가였으나 알아주는 이가 없어 일자리도 없이 그냥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나라의 유명한 인사들과 폭넓은 교제를 했으며, 연나라의 현자 전광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연나라의 태자가 진왕 정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그를 암살하려고 할 때 전광은 형가를 추천하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태자의 말에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합니다. 그리고 형가는 진왕 정의 암살을 맡게 됩니다. 계획대로 번어기 장군의 목과 독이 발린 비수가 준비되자 형가는 자신의 일을 도와 줄 사람을 기다리지만, 초조해진 태자의 성화에 진나라로 떠납니다. 진왕 정을 만나 번어기 장군의 목과 연나라의 지도를 내놓으며 거짓 항복을 꾀했던 형가는 진왕 정이 지도를 펼치자 그곳에 숨겨두었던 비수로 그를 찌르려고 하지만 소매만 베어냅니다. 신하들은 허둥대고 진왕은 장검을 뽑지 못하고 계속 도망치다 한 신하가 칼을 등지고 뽑으라는 말에 겨우 칼을 뽑아 형가를 내리칩니다. 여덟 군데가 베인 형가는 웃으며 기둥에 서서 자조하다 진나라 신하들의 칼에 찔려 죽고 맙니다. 암살이 실패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화가 난 진왕 정은 연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후대에서 진시황과 형가의 평가는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폭정필망이라는 말의 대명사격으로 쓰이는 진시황에 비해 형가는 협객이자 의사로서 칭송받습니다. 천하를 통일한 황제와 일개 자객의 평가가 이렇게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요? 형가는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자신의 행위 준칙대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시황은 그렇지 못했지요. 무릇 위정자일수록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예를 갖춰야 하는 법입니다. 정치는 냉혹하다지만, 진시황이 살던 시대만 하더라도 제자백가가 자신의 사상을 주장하던 때 아닙니까. 패도보다는 왕도를 중시하던 그 시절 진시황은 자신의 큰 야망을 실현시켜 줄 사상은 법가뿐이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상앙은 자신의 법 때문에 죽었고, 이사 역시 인심을 잃고 정쟁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진시황 역시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을 통일하려다 나라의 기반을 무너뜨리지요. 어쩌면 진시황은 정말 어리석은 황제일지도 모릅니다. 정치사상들이 넘쳐나던 시기에 그것들을 적절하게 운용할 생각은 못하고 오로지 아집으로 하나만을 고집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 밖에도 폭군들이 자주 하던 거대 토목공사의 시행이라든가, 무리한 도량형의 통일 등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더없이 괴롭혔습니다. 그렇기에 진왕 정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의 평가가 더 높아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데메트리오스 2005-10-09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의 과제를 3건이나 하신 건가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예전에 본 영화 '영웅'이 떠오르네요^^ (그런데 저는 주나라 멸망을 B.C. 256년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오랜만에 들렀는데 태클을 걸어서 죄송합니다^^;;)

꼬마요정 2005-10-0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메트리오스님~~ 와~ 반가워요~~^^ 정말 오랜만이네요..그쵸? ^*^ 동생 과제가 매주 있거든요.. 옆에서 하도 도와달라고 성화여서, 타자는 동생이 치고 저는 열심히 읊었죠..^^ 그리고 주나라 멸망은 B.C 256년이 맞습니다. 221년은 사실 제나라가 멸망한 시기이지만... 제가 그 때 헷갈렸거든요... 부끄부끄.. 당장 고칩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