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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월; 초선전
박서련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7월
평점 :
중국 4대 미녀를 일컫는 말이 있다. 침어낙안 폐월수화(沈魚落雁 閉月羞花). 춘추전국시대 오나라를 패망으로 이끈 서시, 흉노가 득세하던 시기에 한나라를 위해 흉노의 선우와 정략혼을 한 왕소군, 삼국지연의에 등장하여 동탁을 제거하는 데 일조했던 초선, 당 현종의 며느리이자 한 시대를 휘어잡았던 양귀비가 그 주인공들이다.(4대 미녀에 초선이 들어가고 조비연이 빠진 건 저 말이 너무 입에 달라붙어서일까.)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버린 채 가라앉고,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날갯짓을 잊어버려 떨어지고, 달이 창피해서 숨어버리고, 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는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일까.
사실 저 이야기들 중 실존인물이 아닌 이가 있다. 바로 초선이다. 초선은 뜬금없이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의 가기(歌妓) 혹은 수양딸로 등장하는데, 빼어난 외모와 총명함, 뛰어난 연기로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하여 한 왕조의 문을 닫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처음과 끝은 지워진 듯 사라진 듯 없다. 마치 서시가 오나라를 망하게 한 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어쩌면 쓸모가 다한 존재의 뒷 이야기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남은 건, 그저 한 나라를 무너뜨릴만큼 아름다웠다는 전설 뿐.
하지만 그런 여인들에게도 부모가, 어린 시절이, 고난이 있었다. 그녀들은 늙어죽을 수도 있었고, 행복할 수도 있었다. 박서련 작가는 그런 초선의 삶을 되살려냈다.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니고, 아름답고 싶어 아름다워진 것도 아닌, 그저 살아있기에 살고자 했던 한 사람으로서의 초선을 말이다.
아주 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 부모는 기아에 허덕이다 옆집 아이와 '나'를 바꿨다. 잡아먹기 위해서였다. 옆집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살기위해서였다. 그리고 다리 밑 거지 아이들과 함께 살게 되었고, 대장을 만났다. 때는 후한 말, 십상시도 난리고 황건적도 난리고 탐관오리들도 난리고 군웅들이 할거한다고 난리던 시절이었다. 난세는 기회라지만 거지 아이들에게 그런 것보다는 당장 한 끼 밥과 비를 피할 곳이 더 중요했다. 대장은 '나'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주었고, 구걸하기에 보다 쉬웠던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그리고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거지 아이들은 황건적에 합류했고, 관군에게 쫓겼다. '나'는 그 난리통에 뒤쳐졌고, 운명을 만났다. 왕윤은 '나'를 주웠고, '나'는 주워들은 대로 황건적들에게 가족을 잃은 귀족 행세를 했다. 그렇게 '나'는 왕윤의 양딸이 되었다.
처음으로 따뜻한 밥을 먹었고, 부드러운 이불을 덮었고, 고운 옷을 입었다.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은인인 왕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정말 여자는 관리가 될 수 없습니까?"
"여인으로서 관모에 손댈 수 있는 자는 오직 초선뿐이란다."
"그러면 저도 초선이 되겠습니다."(p.52)
초선관모는 담비(貂)털과 매미(蟬) 날개로 만들어져 망가지기 쉽기에 삼공이나 그 이상 가는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의 집에나 황제의 곁에만 그 관만을 모시고 손보는 여인을 둔다. 그런 여인을 초선이라 부른다. 그 때부터 나는 초선이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 말하지 않았던 초선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초선이 어떻게 왕윤의 수양딸이기도 하고 가기(歌妓)이기도 했는지, 어째서 초선이었는지, 왜 왕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는지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왕윤이 구해주기 전까지 어떤 기준도 없던 여자 아이가 자신을 구해 준 이에게 연정을 품고 서로를 이용하며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하기까지의 과정을 말이다.
초선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못났든 잘났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자신을 구해 준 왕윤을 사랑했고, 자신에게 쾌락을 알려 준 여포에게 약간의 마음 한 자락을 내주기도 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동탁을 마냥 혐오하지만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지막에 사랑했던 이의 비겁하면서도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있었겠지.
그녀가 정말로 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한 사람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다 늙고 병드는 것마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을 원했을까. 자신의 아름다운 머릿결이, 백옥같은 얼굴이, 짙고 풍성한 눈썹이,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하얗게 세고, 누렇게 뜨고, 다 뽑혀 듬성듬성해지고, 다 빠져버려도 그저 웃는다.
그녀는 살아남았고, 그녀가 이겼다.
그러한 모든 순리는 허망한것이로되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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