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토요일,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다. 아침에 기차 타고 수서역에서 내려 예당까지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타고 갔다. 2시 공연은 당일치기하기 좋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다행히 내가 갈 때는 비가 오지 않았다.
존 프록터 역은 엄기준 배우님이었다.
연극은 거의 3시간이었는데, 무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내용을 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무대는 긴장감과 처절함과 광기가 흘러넘쳐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난 달에 부산에서 <베르테르> 뮤지컬을 봤는데, 그 때 베르테르가 엄기준 배우님이고 롯데가 류인아 배우님이어서인지 존 프록터와 애비게일 윌리엄스만 떼놓고 보면 뭔가 베르테르 흑화 버전 같다고나 할까...
1692년 1월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새무얼 패리스의 질녀가 병에 걸렸고 마녀가 사악한 주술을 행했기 때문이란 주장이 나왔다. 소녀들은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마구 불렀고 특별법정이 세워졌다. 결국 19명이 교수형을 당하고 1명이 압살당헀고 17명이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6월 10일에 브리지트 비숍이 처음 교수형을 당했고, 사흘 동안 13명의 여자와 5명의 남자가 교수형을 당했다. 10월에 주지사가 이 특별법정을 해산시키고 재판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석방시키고 나서야 마녀사냥이 잦아들었다.
1950년 2월, 미국의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은 미 국무부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침투해 있다고 공개적으로 고발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과 다르거나 사회 비판적인 성향이 있거나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하면 공산주의자로 몰아가 사회에서 매장시켰다. 줄리어스 오펜하이머나 찰리 채플린도 그렇게 희생되었고 아서 밀러 역시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이 극은 패리스 목사가 자신의 딸 옆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조카인 애비게일과 딸인 베티가 벌거벗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본 뒤로 베티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기에 패리스 목사의는 자신의 지위와 재산이 위태로워질까 걱정이 컸다. 그리고 마을엔 마녀가 악마와 결탁한 이들이 있다고 난리가 났다. 마녀사냥의 시작이었다.
패리스 목사는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저명한 목사인 헤일 목사를 초청하고 헤일 목사는 책을 잔뜩 들고 오면서 이 책들이 도움이 될 것이라 말한다. 그 책 중엔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악마에게 가하는 망치)>도 있지 않았을까.
애비게일은 존에게 집착했기에 존의 아내인 엘리자벳을 고발했다. 메리 워렌은 사라 굿을 고발했고, 자일스의 아내 역시 고발당했다. 신실하다 칭송받던 레베카도 고발당했다. 세일럼은 혼란에 빠졌고 소녀들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고발했다.
존은 아내인 엘리자벳이 끌려가자 이 말도 안되는 일을 멈추게 하기 위해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하지만 아내인 엘리자벳은 남편인 존의 명예를 위해 단 한 번 거짓말을 했고, 모든 것이 끝났다. 파국이었다.
존은 성자가 아니었다. 적당히 깨어있고 적당히 냉소적인 면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죄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살기 위해 자백서에 사인을 하지만 끝내 그 이름만은 넘기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공개적으로 남으면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죄인이 되고 자신의 아이들 역시 자유롭지 않을테니까. 그는 자백을 할 때에도 다른 사람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아서 밀러가 청문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자백하지 않으면 레베카처럼 선한 사람으로 인식될 것이란 사실에 거부감도 느꼈다. 자신은 죄인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그 자백서를 찢음으로써 그에게도 선한 면이 있음을 입증했다. 엘리자벳은 그런 그를 이제서야 진실되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마녀사냥은 17~18세기 초에 광풍처럼 몰아쳤는데, 많은 사람들이 계몽, 이성의 시대라고 불린 때에 어떻게 저런 광기가 휩쓸 수 있는지 연구했다. 여러 의견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흉년, 전쟁, 전염병 등 재난이 심해졌을 때 마녀재판이 많이 벌어졌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재난이 없을 때에도 마녀사냥이 많이 있었기에 완전한 설명은 못 된다. 종교 간 갈등도, 희생자들의 재산 약탈도 완전한 이유가 아니라고 한다. 공동체 내의 갈등은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꼭 한 가지 이유만으로 마녀사냥이 벌어진 것은 아니라고. 이 원인들은 모두 안 맞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맞을 수도 있다고. 키스 토마스의 연구를 보면 마을 내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기독교적 자선 혹은 부조를 하지 못한 이들이 죄책감 때문에 자선 대상을 제거하는 경향이 생겨났다고 한다. 앞에서 메리 워렌이 세라 굿을 지목한 이유가 설명된다. 키스 토마스의 주장은 마녀재판이 결과적으로 공동체 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는 '기능'을 했다는 거다.
이 희곡의 경우에는 복수와 재산 약탈 그리고 자기 기만이 마녀사냥의 원인이 된 것 같다. 자일스의 부인이나 레베카, 존 프록터 등이 마녀재판에서 유죄가 되면 그들의 재산이 모두 압류된다. 그럼 언제나 그들의 땅을 노리던 푸트넘이 헐값에 넘겨받겠지. 애비는 존에게 복수하고, 나머지 소녀들은 자신들의 죄를 숨기고 남에게 전가시킨다. 패리스 목사는 처음에는 동조했다가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무너트리게 될 것을 알고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다. 헤일 목사는 순수하게 성찰하지만 결국 모두를 구하지는 못한다.
극 중에서 애비게일과 소녀들이 희생양의 이름을 외치는데 정말 섬뜩했다. 이 장면은 조지프 매카시가 아무 증거 없이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간 것과 유사했다. 매카시 사후 밝혀진 명단은 159명이었는데 이 중 9명만이 스파이로 밝혀졌다고.
인간은 이성적이라고 하지만 상황과 감정에 많이 좌우된다. 누군가에게 동조하여 희생자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합리화와 자기기만으로 죄책감을 덮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또한 뉘우치고 책임을 지려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서 밀러는 이 극을 통해 인간의 추악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각자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