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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떠나온 세계
김초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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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후의 라이오니>는 <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에도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이다. 그 주제에도 어울리고, '방금 떠나온 세계'라는 주제에도 어울리는 이야기인가 보다. 이 이야기는 로몬인들 중에서 쓸모없다 여겨진, 심약한 로몬인인 '나'와 '셀'과 '라이오니'의 사연이다. 나는 시스템에서 '3420ED'의 회수 업무를 할당 받아 간 그 곳에서 나는 '라이오니'로 오해 받는다. 다른 기계들은 나와 라이오니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의 대장인 '셀'은 나를 '라이오니'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로몬인 사이에서 섞이지 못하는, 심약하다고 표현하지만 다정한 '나'를 알아본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다시 위로 받게 된 '나'는 그 자체로 괜찮지 않을까.
<마리의 춤>은 나와 다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한다. 모그라 불리는 시지각 이상증을 겪는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살아가고 있었다. 적은 수라 하더라도 그들의 상태나 사고방식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정상'과 '비정상'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로라>는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신의 신체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개조하려 하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킨다. 오히려 타인은 아무 관심이 없다. 가족, 연인, 친구 등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상황이라니. 결국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그 포용하는 마음이 타인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일까. 끝내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하니까 받아들이는 것일까.
<숨 그림자>를 읽다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이 필연적으로 떠오른다. 후각은 추억을 불러오니까. 공기 중 냄새 입자로 대화하는 숨그림자 사람들 사이에서 목소리로 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조안은 완벽한 타인이다. 냄새로 대화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영원히 섞이지 못할 조안과 그런 조안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단희는 시작은 불편한 감정이었을지 모르나 다정한 마음은 전해졌을 것이다. 말로 의사를 전달하는 우리는 눈빛을 보내겠고, 숨그림자 인들도 자신의 냄새를 숨긴 채 눈빛으로 마음을 표현할지도 모르겠다. 멋진 장면일 것 같다.
<오래된 협약>은 <닥터 후>의 한 에피소드를 떠오르게 한다. 닥터와 동행자는 행성이 아니라 거대한 생명체 위에서 살아가는 우주선 속 사회에 착륙한다. 그 사회의 사람들은 그 희생을 감당할 수 없어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하고, 다시 그 기억을 찾는 여정을 반복하다 결국 진실을 선택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오래된 협약>은 좀 더 성숙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희생과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 그래서 타인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어쩌면 어떤 존재의 관대함으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지 공간>은 전체 속의 나와 개인인 나를 생각하게 한다. 결국 '나' 자신으로 '나'를 볼 수 없다면 전체 속 부품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공동체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와 공동체가 함께 존재해야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역사에 거대한 사건들도 기록해야 하고, 개개인의 일기도 남아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지 공간에 들어갈 수 없는 이브는 나름대로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인지 공간 자체의 결함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다수와 다르다고 사회에서 배제해 버린다면 그 사회는 결코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소수라고 생각한 것들이 의외로 거대한 흐름을 만들기도 하니까. 때론 시대에 따라 누군가의 일기가 충격적인 사건의 기록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브의 말처럼, 인지 공간은 저 많은 별들을 다 담을 수 없다. 방금 떠나 온 세계에서 나는 친구와 함께 좀 더 다채로운 삶을 알아갈 것이다.
<케빈방정식>은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가 떠오르기도 하고. 저 멀리 떨어진 별과 대화하는 느낌이다.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천천히 그 이야기가 흐르는 것을 음미한다고나 할까. 모두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각자인 개인을 이해하는 것은 '상대의 시간'을 이해하는 것일까. 관람차는 둥글고 가장 낮은 곳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누구 하나 독점하지 않는다. 각각의 관람차는 각각의 모든 위치를 가지고, 떠난다.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나와 다름이 결코 장애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그저 그냥 그대로 그러함일 뿐이라고나 할까. 내가 연예인처럼 예쁘게 생길 필요도, 운동 선수처럼 근육질이 될 필요도 없다. 모두가 똑같이 생기고 모두가 똑같이 근육질이면 얼마나 재미없는 세상일까. 세상은 다양하고 다채로운 삶들이 가득하고 혐오나 폭력이 아닌 이상 우리는 그 다양성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세상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