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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왕 - 정보라 소설집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7월
평점 :
첫 이야기를 읽는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마치 남자들의 이야기를 여자로 바꾼 것 같다. <높은 탑의 공주>, <달빛 아래 기사>, <사랑하는 그대와>는 서양에서 당연하게 내려오는 이야기인 사악한 용과 아름다운 공주와 용감한 기사와 악독한 왕비의 이야기를 비틀었다. 왜 공주는 늘 아무것도 모른 채 왕비에게 당해 속수무책으로 어딘가 갇혀야 하고, 그걸 또 굳이 용감한 기사가 구하러 가야 하고, 공주를 납치한 것 외에 혹은 납치된 공주를 지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안 한 용은 계속 공격 받아야 하는지 말이다. 공주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용을 불러 자신이 위험한 상황을 피하고 싶었고, 왕비의 마법에 걸린 기사는 공주를 배신했으며, 다른 나라에서 온 왕비는 외로운 곳에서 어디에도 정을 둘 곳이 없어 방황하던 차 아들이 공주에게 푹 빠지자 공주가 미워진 시어머니였다. 그리고 언제나 늘 죽어서야 자신의 말을 할 수 있었던 여자들 대신에 기사나 왕이 죽어서야 자신의 말(言)을 전한다. 그것도 좀비가 되어서. 읽다가 말(馬)은 무슨 죄인가 싶었다.
그래도 은은한 달빛 아래 죽어서야 사랑을 되찾은 이들이 행복한 듯 해서 좋았다. 결국 이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던 이들이었으니. 지은 죄 때문에 벌은 받았으니 이제 둘이 행복해 보이는 것을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언제나 늘, 전래동화 속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이는 할머니다. 여기서는 유모이고. 할머니의 지혜를 가볍게 여기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사막의 빛>은 몽환적인 이야기이다. 루시의 아이이고 정교회라길래 키예프 쪽인가 했는데, 작가가 우즈베키스탄을 다녀와서 쓴 이야기라고 하니 이해가 갔다. 기근으로 자신을 판 소녀는 저 멀리서 온 상인들과 함께 산 넘고 물 건너 술탄에게로 간다. 가는 길에 자신이 맡게 된 항아리와 그 안의 물고기를 꼭 안은 채. 이야기는 점점 더 환상적으로 흘러간다. 땅 위를 나는 양탄자를 타고, 탑에서 뛰어내리는 소년을 만나고... 누구보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따뜻한 왕비와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 줄 이를 원하던 다정한 술탄이 있는 이슬람의 세계는 소녀의 세상과는 너무 달랐다. 한마음으로 신을 찬미하는 곳에서 소녀는 안심했고 배불렀다.
동양의 용은 물의 신 혹은 강의 신 혹은 바다의 신과 같은 존재이다. 고향에 가서 가족을 만나고픈 소녀의 소원은 이루어질까. 누구나 이런 환상에 조금은 미소 짓다가도 그 환상 안에서도 현실이 있음을 깨닫는다. 땅 위를 나는 양탄자가 멋져 보이지만 모래바람 때문에 눈도 뜨기 힘들고 흔들리는 몸을 계속 바로잡아야 하니까. 이것은 마치 <원피스>에서 루피를 구한 샹크스가 한 쪽 팔이 잘린 채 루피를 위로하는 감동적인 장면의 이면에 바다에 떠 있기 위해 하염없이 발놀림을 하는 샹크스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여자들의 왕>은 독특한 이야기였다. 나는 사울과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를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이야기는 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 싶었고,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과 딸인 미갈은 다윗을 살리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남녀를 바꿨다. 다윗이 무찌른 골리앗은 '나'를 조롱한 거대한 남자였고, '나'를 사랑하고 돌봐 준 이는 미갈이 아닌 여자들의 왕의 아들인 '그'였고, '나'를 친구처럼 대하며 여자들의 왕인 어머니를 경계하게 한 이는 요나단이 아닌 '누이'였다. 물론 누이는 요나단과 좀 많이 다르긴 했다. '누이'는 왜 자신의 남편을 옆에 세웠을까? '누이'는 왜 결혼을 해야 했을까? 누이가 오히려 사울 같아서 이야기는 단조롭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아름다운 우정을 노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하지만 늘 헌신하는 이보다 욕망하는 이가 매력적인 건 소설이니까.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는 저 먼 나라의 연대기와 작가의 집안의 기억이 뒤섞인 이야기이다. 10세기 쯤 동슬라브인들의 역사에는 올가라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사라진 국가의 이야기지만 잊혀지진 않은 장엄한 이야기. 자신의 목을 잘라 왕과 왕자를 구한 장수는 연대기에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과 결혼한 공주가 낳은 딸에게 전해졌다. 그러면서 '나'의 할머니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할아버지는 6.25 때 게다짝을 신은 채 북한군에게 끌려갔고, 발이 망가져 1.4 후퇴 때 외삼촌을 만났으나 같이 도망치지 못했다고. 할머니는 당시 가정선생님이었는데, 10살이나 많은 할아버지가 공개 구혼을 한 덕에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을 해야 했다고.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기다린다고 혼자였던 평생이 사실은 자유를 누린 시간은 아니었을까. 정말 할머니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아들과 결혼한 공주가 낳은 딸은 손가락이 여섯 개였고, 꿈에서 목이 잘린 갑옷을 입은 이를 보고 깨닫는다. 그렇게 미토콘드리아 DNA처럼 모계로 내려오는 기억들은 그렇게 전해지고 잊혀진다.
나는 그리그의 <페르귄트 조곡> 중 '솔베이지의 노래'를 좋아한다. 돌아온 탕자를 기다린 솔베이지의 지고지순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에 결혼을 하지 않을 방패로 페르귄트를 사용한 것은 아닌가 해서. 솔베이지는 자유롭게 살았을까? 부디 그러했기를 바란다.
<어두운 입맞춤>은 뱀파이어 이야기이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를 비틀었다. 이야기 구조는 <벙어리 삼룡이>와 비슷하다. 주인과 아내와 머슴의 삼각관계 구도. 하지만 <벙어리 삼룡이>와 달리 주도권은 여자에게 있다. 그리고 드라큘라의 목을 친 건 미나였지만, 여기서 온은 그러지 않는다. 여자와 서로의 정신이 연결되지도 않는다. 어쩌면 온은 <드라큘라>의 루시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욕망과 약간의 호기심 외에는 어떤 것도 없어 보이는 여자에게 사랑 같은 감정을 호소하는 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런 감정이 의미 없어지는 것을 알려주려고? 정말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순간이라도 '온'정을 느끼고 싶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