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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4
보리스 비앙 지음, 이재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평점 :
가장 완전한 방법으로 복수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그런 방법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쩌면 이 책은 '복수'의 방법보다 그 '복수'란 것을 하게끔 하는 상황을 이해하는 방법을 찾는 게 훨씬 편한 일일 것 같다. 개인인 '리 앤더슨'의 슬픔은 끔찍하게 차별 받는 '흑인'의 슬픔이 되고, 개인인 '리 앤더슨'의 복수는 그저 개인의 복수가 되어버리는 동시에 흑인이라는 인종을 대표해서 흑인은 잔인하다는 편견을 부추기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니다, 이 장르에서 그런 선의는 베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저 리의 행동을 따라가며 그에게 어떤 명분도 없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안타깝고 화가 나지만 무덤에 차마 침을 뱉지는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보리스 비앙의 <세월의 거품>을 좋아한다. 여전히 그 몽환적인 세계에서 서서히 터져가고 터질 수 밖에 없는 거품들의 아픔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리는 흑인이지만 외모는 백인이고, 백인이 갖고 싶어하는 탄탄한 몸을 가졌다. 하지만 형과 동생은 달랐고,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동생은 백인에게 살해 당한다. 그저 백인 여성과 사랑했다는 이유로. 형은 체념하지만 리는 달랐다. 리는 동생의 죽음을 누군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외모를 이용하여 백인 여성들을 유혹했고, 백인 남성들과 어울렸다. 그의 현재 우선 목표는 부유층 백인인 애스퀴스 가문의 자매들이다. 애스퀴스 가문의 자매를 선택한 건 상류층이라는 이유도 있다. 미천한 흑인이 저 높은 계급의 여성들을 취하는 것이 훌륭한 복수라는 것이다. 그녀들을 처리하고 나면 다른 백인들도 죽이고, 상원 의원도 죽이고, 백인 편에 붙은 흑인들도 죽이고... 동생을 위해 복수한다고 하지만 글쎄, 그렇다면 애초에 동생을 죽인 그 백인 여자의 부모를 죽였겠지.
루는 리를 원했지만 그가 흑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아주 역겨워한다. 죽이고 싶다고 할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부모를 죽인 원수도 아니고, 집안을 망하게 한 사기꾼도 아닌 그저 흑인이라는 이유로. 어린 여자애까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뿌리 깊게 박힌 인종차별은 어디서부터일까. 하지만 루가 살해당한 건 그녀가 인종차별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백인이자 여성이기 때문이다. 리는 백인 여성들을 유린했고, 백인 남성인 덱스터에게는 순종했다. 덱스터가 계획에 필요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게다가 리는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보고 그들의 아픔을 외면한다.
그렇게 자신이 당한 차별을 그대로 행하면서 복수를 입에 올리는 리 앤더슨. 그에겐 강간, 폭력, 살해가 복수를 완성하는 방법인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런 알량한 연민이 드는 건, 인종차별을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차별을 겪었기 때문이리라. 그 차별이란 것이 리의 동생이 겪었던 그런 참혹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 보다 작다 한들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는 리에게 연민을 느끼다가도 그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리의 복수가 정당하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갔더라면 그저 재미있게 읽고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의 행동이 거듭될수록 계속 생각하게 된다. 마음 속 불편함이 커질수록 리는 불한당이 되어버리고 마침내는 알량한 연민마저 거둬들이려고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그 연민을 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냥 차라리 백인들 무덤에 침이나 뱉지, 그랬다면 더 동정했을텐데. 그런 동정 따위 필요없다 하겠지만.
서문에서 설리번은 백인만큼이나 '냉혹한 흑인'을 상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연히 만날 수도 있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증명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