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아주 많다. 그 중에 내가 좋아하는 로맨티스트는 드라큘라였다. 오직 사랑하는 여자의 구원 때문에 신을 버리고 홀로 그 시간의 대양을 건너 온 남자. 그 여자를 위해 자신의 영혼마저 버린 그 남자.

 

드라큘라가 자신의 사랑이 구원받지 못하자 순리를 거스르고 신을 버렸다면,

 

여기 이 남자 토드, 죽음은 오직 한 여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위해 순리를 거스르고 인간 세상에 개입한다.

 

천사에겐 행복, 악마에겐 고통, 인간에겐 사랑...

그렇다면 완전한 소멸만이 목적인 죽음에게 '그건' 어떤 것일까.

 

그렇다.

 

이 이야기는 엘리자벳이 진정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위해 그녀의 삶에 발을 들이며 상처 받으면서도 끝까지 그녀를 기다린 토드와 자신의 삶을 진정 사랑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발버둥치지만 결국 의무라는 굴레를 끝내 벗어던지지 못해 괴로워하던 엘리자벳이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장대한 드라마인 것이다.

 

이야기는 루케니의 재판으로 시작한다. 루케니는 왜 엘리자벳을 죽였는가.

 

광기에 휩싸인 채 루케니는 항변한다. 죽음이 배후라고. 엘리자벳은 죽음을 사랑해서 스스로 죽음을 향한 것이라고.

 

자유로운 아버지 밑에서 자유롭게 자란 엘리자벳은 말을 타고 개구리를 잡고 외줄 타기를 즐기는 말괄량이이자 바이에른의 어린 공주였다. 외줄을 타며 놀던 그녀는 그 아슬아슬함을 즐기다 땅에 떨어지게 되고, 오로지 존재의 소멸이라는 목적을 위해 그녀를 찾아 온 토드를, 그 존재 자체를 알아보고 동경한다. 토드는 자신의 의무이자 목적을 잊어버린 채 자신을 알아보는 그녀에게 빠져든다.

 

이름을 불러줘서 꽃이 되었다는 시처럼, 어린왕자를 기다리던 여우처럼, 살아있는 모든 것에겐 공포이자 존재 자체가 허무였던 죽음에게 의미가 생긴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 어쩌면 그것은 삶의 의지, 어쩌면 그것은... 자유!!

 

그토록 삶을 사랑하고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마저 사랑에 빠지게 만든 건 그 아름다운 외모가 아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엘리자벳 역시 죽음이라는 존재를, 다른 세상을 알았으니 이제 이 세상에 완전히 속하기는 어려웠을테다. 다른 세상에 한쪽 발을 내디딘 채 언제나 가슴 한 쪽에 채울 수 없는 갈증을 안고 살아야했다. 사랑한다고 생각한 요제프가 건넨 목걸이는 너무나 무거웠고, 결혼 서약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신 앞에서 다른 남자와의 사랑을 맹세하는 엘리자벳의 대답을 듣는 토드는 상처 입은 야수마냥 웃는다.

 

마지막 춤은 살아있는 엘리자벳과의 마지막 춤이었다. 엘리자벳이 원하는 것을 엘리자벳 자신보다 더 잘 아는 토드는 상처 받았음에도 그녀에게 손을 내밀지만, 삶을 사랑하는 그녀는 선뜻 죽음의 손을 잡을 수 없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겠다는 의지는 그녀의 삶의 근원이자 불행의 시작이었다.

 

황실의 삶은 힘들었고, 제국을 상징하는 대공비의 힘은 너무나 강했다. 황제조차 마음대로 하는 권력을 가진 소피에게 엘리자벳은 단지 황실의 꽃이자 후계자를 생산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믿었던 요제프가 자신이 아닌 어머니를 선택하자 엘리는 요제프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되찾고자 한다. '난 나만의 것'은 믿었던 사랑이 자신의 편이 아니었음을, 자신의 삶은 자신이 만들어가야 함을 알게 된 그녀가 희망이 없는 곳에서 간절하게 부르는 주문이다. 그리고 그 주문은 토드를 움직인다.  

 

하지만 여전히 소피의 힘은 강했다. 아이들을 빼앗기고, 꼭두각시마냥 보이는 삶을 살던 엘리자벳은 이런 삶이 자신의 삶이 아님을 깨닫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는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이용하고, 소피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처지 같은 헝가리를 지원하고, 요제프를 소피에게서 떼어놓는다.

 

그녀가 주도권을 잡았을 때, 내가 춤추고 싶을 때를 정하겠다는 그 의지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너무나 강렬했으며 너무나 멋졌다. 죽음이 아무리 삶의 의지를 꺾으려 할지라도 그녀는 당당히 말한다.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고. 엘리자벳을 향한 토드의 노래와 몸짓은 마치 구애 같았고,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된 엘리자벳은 그 구애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녀가 원한 것은 '진정한' 자유. 소피의 함정은 엘리자벳이 떠날 수 있는 구실이 되었다. 이미 비어버린 마음을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녀는 이제 평생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다닌다. 모든 것을 버리면 얻을 수 있는 그것. 토드는 끊임없이 손을 내밀지만 엘리자벳은 번번이 그 손을 뿌리친다. 

 

모든 것을 버리지도, 제대로 된 자유를 얻지도 못한 그녀가 위로를 받는 곳은 정신병원이었다. 자신의 이익과 목적만을 쫓아다니는 인간들에게 진저리가 난 그녀가 미친 사람들 속에서 안식을 얻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계속되는 근친혼으로 비텔스바흐 가문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미쳐 죽거나 미친 채였고, 멀쩡한 정신으로 비어버린 가슴 한 쪽의 갈증을 오랜 시간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웠으니까.

 

인간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 시인 하이네의 시를 벗삼고, 아버지처럼 살고 싶었지만 자신은 실패했다는 생각에 우울해하던 그 때, 아들인 루돌프가 아버지인 요제프와의 반목으로 그녀를 찾아와서 절규한다.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아들의 울부짖음에,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던 그녀는 다시 그 속박 속으로 갈 수 없다고 읊조린다. 그건 루돌프에게 말한 것일까, 자신에게 다짐한 것일까. 사실 7년 넘게 소피가 키웠고, 20년 넘게 아들을 떠났던 엘리자벳이 루돌프에게 자신을 내어 줄 수는 없었겠지.

 

요제프에게 외면당했을 때 엘리가 자신의 삶을 선택했다면, 루돌프는 어머니가 자신을 외면하자 죽음을 선택했다. 의지할 데 없이 혼자 살아남아야 했던 루돌프는 삶을 살아갈 의지가 없었고, 죽음은 기꺼이 그를 데려갔다. 죽음이 손을 뻗어 데려가지 못한 이는 여전히 단 한 명.

 

아들의 죽음은 모든 것을 가지지도, 버리지도 못한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삶의 의지를 내던질만큼. 생이 다하는 그 때까지 삶의 끈을 놓지 않던 그녀가 자포자기로 죽음을 부르자, 토드는 답한다. 이것은 진실로 너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 이런 너는 아니라고. 누구보다 그녀를 이해했던 오직 단 하나의 존재. 그렇게 토드는 또 다시 엘리자벳을 기다린다. 온전히 자신에게 오기를...

 

아들의 죽음으로 이제 삶을 정리할 수 있게 된 엘리자벳은 자신을 옭아매던 이 세상의 사랑을 끊어낸다. 삶의 미련이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요제프에겐 악몽, 엘리자벳에겐 축복...

 

때가 왔다. 그녀는 진정 삶을 사랑했고,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을 채우려고 노력했고, 이제 그 답을 찾았다. 진정 그녀가 원하는 자유, 사랑, 삶... 평생 그녀를 덮었던 베일은 벗어던지고 자신보다 더 자신을 이해하는 존재에게 입맞춤을 허락한다. 기억은 지우고 자신은 무(無)로 돌아간다....

 

얼마나 사랑하면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것조차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것이 죽음의 존재 목적이라 하더라도 이전에는 모르던 감정을 알았는데, 이제 영원토록 비어버린 가슴 한 켠 끌어안아야 할텐데. 마지막 떨리던 그 손은 그래서였을까.

 

죽음은 허무, 존재하지 않음. 어쩌면 그렇게 둘은 온전히 하나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너와 나가 하나인 상태.

 

엘리자벳과 토드가 서로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둘은 언제나 함께였고,

이제 사랑은... 혹은 자유는 그렇게 완성됐다.

 

엘리자벳이 루케니의 손에 죽은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루케니는 루돌프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니까.

 

융통성 없는 군인이자 제국의 주인이었던 요제프는 엘리자벳을 너무나 사랑해서  제국마저 그녀에게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원한 것은 단 하나였고, 그것은 요제프가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이었다.

 

극 내내 흐르는 루케니의 광기는 너무 슬퍼 울지 못한 자의 비웃음이었다. 너무 힘들고 슬퍼 우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시대의 민중들... 전쟁, 권력다툼, 급변하는 경제 상황들 속에서 살고자 발버둥치던 그들 모두가 루케니이고, 죽음이 데려간 사람들이자 죽음을 숭배한 이들일 것이다.

 

신엘리는 완벽했고, 식토드는 강렬했으며, 민제프는 가여웠고, 훈케니는 울부짖었다.

 

 

엘리자벳 : 신영숙

토드 : 박형식

루케니 : 이지훈

요제프 : 민영기

소피 : 이소유

루돌프 : 최우혁

(2019.03.24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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