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데라는 좋아하는 작가다.

읽은 그의 작품 중 실망스러웠던 건 하나도 없다.

쿤데라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생은 다른곳에]는 1969년 6월경에 완성되어 해외로 밀반출되다시피 해서 1973년 프랑스에서 첫 출판된 소설이다. 쿤데라의 반정부, 반공산주의 비판과 풍자는 이미 체코에서 금지되어 있었다.

 

나는 까치출판사에서 나온 안정효 번역판을 가지고 있다.

펭귄판 영역본을 번역한 버전이다.

보니, 2002년에 구입했던 책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잡고 읽고 있었다.

청소년 시기에 읽으면서 분명 설렜던 책이다. 코 찔찔 아이를 훌쩍 성장시킬 것만 같았던 묵직한 질문들을 건네주었던 책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로부터 아마 ...수십년 지나서 다시 잡았을 때 아, 이건 읽을 시기가 따로 있는 책이구나, 싶었다.

코 찔찔이에서 코 닦을 때로 건너갈 시기쯤에 읽어야 할 책이다.

싱클레어가 이유없는 반항짓을 할 때쯤 그만 읽고 싶어졌다.

독일 교양소설 맥락에서 성장소설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성장소설들은 어떨까,라는 새삼스런 궁금증이 생겨서 가지고 있는 책 중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읽고 싶어졌다.

 

쿤데라의 [생은 다른곳에]는 예전에 구입해서 초반 읽다가 뒀던 책이다.

시인으로 성장해나가는 소설인줄 알았다.

이책을 읽은 후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을 예정이었다.

예술적 감수성을 가진 아이가 성장해나가는 성장소설로 읽어도 될 줄 알았다.

[생은 다른곳에]는 반(反)성장소설(교양소설)에 해당한다고 한다. 소설 내내 주인공 야로밀은 내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다.












쿤데라는 실제로 체코 공산정권이 초현실주의 시인 지바쉬 칼란드라를 처형한 일을 겪었다. 칼란드라가 처형당한 뒤 그의 시인 친구인 폴 엘뤼아르는 친구의 처형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낭독했다. 젊은이들은 춤을 추었다. 쿤데라는 “처형자와 시인이 나란히 앉아 통치한 시대를 가까이서 목격한 증인이다.”(영어판 서문)

이 사건이 쿤데라에게 준 충격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뒤틀린 모성, 망가지는 아들을 상상하게 되고 야로밀이라는 시인과 그의 어머니와 그의 사랑 얘기를 떠올리게 된다.

 

쿤데라가 좋아하는 7장의 구성으로 된 이 소설은 홀수장은 야로밀의 탄생과 성장기, 그리고 시인으로의 탄생, 죽음에 이르는 일대기를 다룬다. 야로밀의 환상적 자아인 자비에르의 꿈이 끼어들고 6부는 반전이라면 반전이랄 수 있는 인물과 얘기가 들어온다.

한번 손에 쥐면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을 가진 소설이 쿤데라의 작품이다.

쿤데라가 환상이라는 초현실주의적 장치를 사용하여 낯설게하기의 효과를 낸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 쿤데라가 택한 시점이 마치 무대에서 상연되고 있는 연극을 내려다보면서 관객(독자)에게 연출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는 듯해서 마치 내레이션을 듣고 있는 듯했다.

그리스극의 코러스 역할과도 비슷한 시점을 택한 건데 야로밀이나 그의 어머니의 뒤틀린 오이디푸스관계를 보게 될 때 그 거리감은 괴이하고도 괴물같은 그들의 밑바닥 감정을 더욱 배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듯하다. 내게는 그점이 흥미로웠다.

 

쿤데라는 이 소설의 제목을 원래 ‘서정시대’로 정했다 한다.

서정시대란 젊음을 말한다. 쿤데라는 젊음이 지닌 순진성이 혁명의 광기와 열광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고 본다. 더불어 혁명의 시대와 서정시는 가장 잘 어울리는 짝이다. 혁명은 검토나 분석을 당하기를 바라지 않고, 대중과 결합하고 싶을 뿐이다.(211) 혁명은 생을 ‘여기’에 두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 보다 나은 미래를 약속하며 생을 ‘다른’ 곳에 두도록 한다.

야로밀의 어리석은 순진함, 야로밀의 연인 ‘붉은머리’의 순진한 거짓말이 가져오는 비극은 처형자와 나란히 앉은 시인의 비극이다. 모든 것을 대의속에 몰아넣고 만 야로밀의 단순성이 어머니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만나면서 보여주는 괴이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들.

연인에게 남성이고 싶고, 시인으로서 인정받고 싶고자 하는 욕망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야로밀은 쓰러진다. 야로밀의 어리석음은 자신의 순진한 현실인식이 어떤 비극을 가져올지 알지 못한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한다. 오로지 어머니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야로밀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어머니쪽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야로밀이 시인이 되도록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어리석은 순진함을 고수하도록 부추기는 요인인 것처럼 여겨진다.

 

쿤데라는 야로밀이라는 시인을 랭보, 러시아의 레르몬토프, 푸시킨과 마야콥스키, 체코의 볼케르, 영국의 퍼시 셸리, 폴란드의 아담 미츠키에비치 등 시인들의 전기와 함께 몽타주로 보여준다.

랭보는 무서운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고 어머니로부터 도망치는 삶을 살았다.

스물일곱에 결투 끝에 삶을 마감하고마는 러시아의 레르몬토프의 전기도 흥미롭다. 살짜기 읽어본 레르몬토프의 삶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버리자 어마어마한 귀족 가문이었던 외조모가 그를 거둬들인다. 외조모의 엄격한 가풍밑에서 성장한 레르몬토프의 삶 또한 도망치는 삶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랭보를 들여다보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될 것 같다. 영화 <토탈이클립스>를 본지가 까마득해서 어떤 영화였던지 전혀 떠오르지 않고 단지 풋풋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모습만 기억에 가득하다. 이번 기회에 랭보의 전기도 더듬어보고 싶고,

레르몬토프는 읽을만한 거리가 있어서 들여다볼 수 있겠다.

레르몬토프에 관해서는 로쟈님의 [러시아문학강의-19세기편 푸슈킨에서 체호프까지]에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다뤘을 뿐 아니라 박사학위 논문인 [애도와 우울증]은 바로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무의식”이다. 





















성장소설의 맥락에서 읽으려고 계획했던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독서는 자꾸 미뤄질 것 같다.

뿐인가? 5월에 출간 예고됐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문학동네판은 5월을 일주일 정도 남겨둔 지금까지 감감소식이니 뭐, 대순가? 29일 이따우 날짜에 나오는 거 아니냐고 농담처럼 한 말이 실제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역시 설레발은 금물이다.


[전쟁과 평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레르몬토프의 유일한 장편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은 러시아 문학사가 드미트리 미르스키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보다 더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했다 한다. 물론 드미트리는 레르몬토프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는 로쟈님의 [러시아문학강의]에 나오는 얘기다.

그러니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도 읽어볼만 하겠다. 로쟈님에 의하면 레르몬토프의 소설속 자의식을 지닌 주인공의 등장은 러시아문학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근대적 인간의 자의식.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로 이어지는 현대성의 기원을 바로 레르몬토프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니 읽어보고 싶다.

 

쿤데라가 상정한 젊음과 순진성과 혁명에의 몰입이 결국 20세기 사회주의권의 폭력에 이용당한 처참한 환멸만을 남겼음을 확인하는 건 여러모로 생각에 잠기게 하는 독서경험이었다.

그 시대의 그 현장에서 목격하고 겪었을 폭력을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젊음은 그렇게 경망스러웠던가? 그렇게도 화려해보였던 젊음의 뒤안이 그런 빈껍데기뿐이었던가?

야로밀과 시인의 엄마는 기억해둘만한 쿤데라의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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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세계시인선 리뉴얼판이 나왔다. 민음사 50주년이라는군. 

음... 이건 읽고 싶다. 

고전은 웬만하면 누구나 알지만 정작 읽지는 않는책이라고 하지만, 시의 고전은 그 정도가 더 심하지 않을까. 

내 경우엔 그렇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 얼마나 유명하나. 제목 죽여주잖아. 근데 과연 읽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 또한 예전에 이 시집을 구입했었다. 그냥 읽었다. 뭔 소린지 모른채.


시는 좀체 읽지 않아서.. 아니 어려워서 손대지 않는다는 게 더 솔직한 거다. 

난 시가 어렵더라. 

나 같은 경우는, 돌아보니 그다지 많은 책을 읽지 않고 살아왔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제 인생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읽지 못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가급적 많은 책을 읽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됐다. 

세계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도 내겐 누락된 게 너무 많다. 지금부터 채워나가고 싶다. 

거기에 당연히 시도 있었으면 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후회가 더 진하게 다가온다.  ........ 후회를 입에 담다니 .. 나이가 들긴 들었다. '카르페 디엠'.지나가버린 시간은 좋았다고 윤색될지도 모른다. 윤색이 후회다.) 


요새 나오는 시집들, 문지사나 창비, 민음 등에서 새로 출간되는 시집 중에서 골라 꾸준히 읽어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우리 시인들 사정은 어떤가 싶기도 했다.  

책 구입도 쉽지 않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건 산 책을 읽는 일이다.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총 15권


1. 카르페 디엠 (호라티우스 플라수스)

2. 소박함의 지혜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

3. 욥의 노래 

4. 유언의 노래 (프랑수아 비뇽)

5. 꽃잎 (김수영)

6. 에너벨 리 (에드거 알랭 포)

7. 악의 꽃 (보들레르)

8. 지옥에서 보낸 한철 (랭보)

9. 목신의 오후 (스테판 말라르메)

10. 별 헤는 밤 (윤동주)

11.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에밀리 디킨슨)

12.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찰스 부카우스키)

13. 검은 토요일에 부르는 노래 (브레히트)

14. 거물들의 춤 (헤밍웨이)

15. 사슴 (백석)


특히 3권 욥의 노래는 이번 기회에 읽어보고 싶다. 욥에게서 나올 수 있는 여러 질문들이 흥미롭다. 

빅토르 위고 '죄 없는 자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창작의 영감을 파고들었다. 

욥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글을 읽었던 적이 있는데 자세히 기억이 안난다. 

어쨌든 '믿음'에 대해 생각했었던 것 같다. 

온갖 고통에 휩싸여 있을 때 신에 대한 믿음은 유지될 수 있는가.

신에 대한 믿음만은 아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부터 타인, 또는 신념. 등등.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믿음. 


그외에도 12권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는 찰스 부카우스키 다운 제목인 듯하고. 랭보의 지옥과 사랑이란 개를 보낸 부카우스키의 지옥은 어떠한지도 궁금하다. 

브레히트의 <검은 토요일에 부르는 노래>도 읽고 싶다. 한나 아렌트는 브레히트가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서정시. 


그밖에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한다'는 에밀리 디킨스의 <고독은 잴 수 없는 것>도 읽고 싶고. 

고딕낭만이라는 형용모순처럼 느껴지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에드가 알랭 포의 <에너벨 리>도 빠뜨릴 수 없고, 

초역이라는 헤밍웨이의 <거물들의 춤>은 시로 처음 만나는 헤밍웨이 아닌가.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헤밍웨이에 대한 재밌는 언급을 했다. 

헤밍웨이는 초기작들이 더 좋은데 그건 아무래도 소재에서 힘을 얻어 스토리를 써나가는 유형의 작가였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진단했다. 자원해서 전쟁에 참가하고 사냥이며 낚시를 하고 투우에 빠져드는 생활을 계속해나간 것도. 항상 외적인 자극을 필요로 한 작가.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체험이 부여해주는 다이너미즘은 조금씩 저하하고 만다.

이 시들은 어떤가 궁금하다.  


아, 김수영의 <꽃잎>도 빼면 섭하다. 

김수영도 제대로 다 못 읽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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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순이 후다닥 지나버리고 이제 중순에 접어들었는데 문학동네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언제 나오나요?

진짜로 29일 뭐 이따우 날짜에 나오는건 아니겠지요?

알라디너들의 서재에 민음사 세계문학스페셜 콜라보 이벤트로 표지를 새롭게 한 고전작품 소개가 눈에 띄는데...

나는 전혀 끌리지 않음....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 같은 작품 번역이나 좀 했으면 좋겠다. 

또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도 간절히 원하고,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새번역으로 봤으면 한다. 

닉 혼비는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찰스 디킨스의 [햄릿]이라고 했다. 캐릭터의 향연.


표지 같은 거에 무신경하다보니 욕심 나는 게 없는데...

책다운 판형이라든지, 좋은 번역은 언제나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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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6-05-1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문학동네판 <전쟁과 평화>를 저도 기다립니다.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도.

포스트잇 2016-05-11 10:18   좋아요 0 | URL
문학동네판 전쟁과 평화는 5월 출간 예정이라 기다리고 있답니다. 박형규 교수의 번역이고요. 4권 분량입니다.
아직도 번역안된 고전들 좀 차근차근 내줬음 합니다. 세계문학전집이라고 나오는 데만 몇 군데인데요.
기다리자고요.
 

아침이면 순례처럼 도는 블로그에서 이책이 소개된 것을 보고 직감처럼 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책 소개에서 잠깐 스치듯 봤는데 최근 옥시 사태로 인해 다시 한번 뜨끔하고 이책이 새삼스러워졌다.

옥시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건 이미 이명박 정권 때인 2007년이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기조로 한 정책들을 맘껏 펼치던 정권시기였다.

 

2012년에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 보다 해로운가]로 나왔는데 제목을 [위험한 정치인]으로 심플하게 바꿨다.

뉴욕대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1900년부터 2007년까지 자살률과 살인율을 검토한 결과 대통령 권력교체 기간과 변화주기가 관계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공화당 대통령이 집권할 때마다 자살과 살인이 늘어났다는 사실에서 뭘 봐야 하는건가.

물론 통계의 위험, 단순화시킬 때 발생하는 오류를 조심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얘기는 일단 통념상, 직감적으로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다.

보수가 집권하면 언제나 사람들이 더 많이 죽는다.

(쓰바, 우린 그냥 보수도 아니고 극우꼴통정권이 집권하고 있다)

 

누구에게 투표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목숨이 달렸다...이건 우리에겐 더 실감나는 중대사 아닐까.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나라가 이모양이고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사는 우린 왜 자꾸 잘못된 결정을 반복해서 하는가.

 

죽음과 정치의 미스터리?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이 죽음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누가 죽음을 몰고 올지 잘 판단할 필요가 있다.

자꾸 주도 정당들이 우클릭을 해대는데 이또한 정신차리게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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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는 1967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 하버드대학에서 시에 대해 강연한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는 30여년이 지난 뒤 나온 강연집이다.

 

당시 이미 시력을 잃어 앞이 보이지 않았던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다.

 

가끔 저는 집에 쌓인 많은 책들을 바라보면서 그 책들을 다 읽기 전에 죽을 것이라고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새 책을 사고 싶은 유혹을 견딜 수 없답니다. 서점에 들어가서 제 취미 - 예를 들어 고대 영시, 또는 고대 노르웨이 시 - 에 딱 맞는 책을 발견할때마다 저는 이렇게 되뇝니다.

 "저 책을 살 수 없어서 얼마나 애석하냐. 이미 집에 한 권이 있으니 말이야." 

 

나는 이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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