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정규재하고 인터뷰했다는 소식 듣고 빡쳐 있는데 택배를 받았다. 빈상자인가 싶을 정도로 무게감도 느껴지지않아 뭔가 잘못된건가 했더니 .. 112페이지라지만 베케트의 원고는 63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쓰바, 열받아. 팜플렛 수준이네.
아 근혜일당의 짓거리에 그렇잖아도 분노로 펄펄 끓고 있는데 책도 실망스럽게 너무 얇아..

나탈리 레제의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 최상급 중고가 나왔길래 구입했는데 온걸 보니 표지가 없어..,,;;;
중고도 표지없으면 구매 하지 않는 난데.. 표지가 없어.. 표지가 없어..
왜 이러는거니?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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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7-01-26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팜플렛!? ㅋㅋㅋㅋ 포스트잇님 표정 상상이 됩니다. 웃으면 안되는데. 😭 저도 전에 한번 엄청 얇고 폰트 엄청 촘촘한 책을 배송받고 벙찐 적이 있어서 그 날 이후로는 판본 크기(가로 세로 두께 정보)를 꼭 확인한답니다. 추천 마법사에 뜨길래 뭔 책인가 관심이 생겨서 들어왔다가 뜻밖의 정보를 얻고 가네요. 그런데 내용은 괜찮았나요?

포스트잇 2017-01-26 21:41   좋아요 1 | URL
제가 그닥 꼼꼼치 못해서..일단 흥미당기면 급흥분 상태인지라 정보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요ㅠ 아직 읽기 전이라 내용에관해 말씀드릴건 없구요, 베케트잖아요, 설렁설렁 읽히도록 썼을리 없다고 예상만 하고 있습니다,,;;
 

설레발처럼 설레는 처음 몇장.
사뮈엘 베케트의 ‘전기‘라는데 심상치 않은 글빨을 선보이면서 어, 이책 완전 집중이 필요한 책이구나 싶어지는 책.
나탈리 레제 [사뮈엘 베케트의 말없는 삶].

이런 인상은 역시 편집자의 ‘이책에 대하여‘에 그대로 나와있다. 아마도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누구나 동의하게 될듯하다.

˝사뮈엘 베케트라는 한 인간에 대한, 한편의 산문˝

˝실낱같은 말들과 사색의 편린들을 듬성듬성 잇거나 자르는 가운데 조성된 크고 작은 침묵들. 침묵의 공간마다, 언어의 구멍마다 고인 베케트의 면면은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잿빛 기운 속에, 어둑함 가운데, 조금 오래 거해야 한다.˝

편집자란 저자의 글을 독자보다 먼저 읽는 자이고, 아마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일수밖에 없다는데 동의 할수 있다.

그런데.. 왜 ‘그런데‘나 ‘ 그러므로‘가 ‘운명의 무기‘인 말이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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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게 사뮈엘 베케트는 아직 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봉우리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의 책은 [고도를 기다리며] 단 한권이다. 아직도 읽지 못했다. 

아, [몰로이]를 언젠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지만 분량이 많지 않아 끝까지 읽을 수 있었지, 읽었다고 할 수 없는 작품이다.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은 책, 그런 책 중의 하나였다. 

이런 책들은 우선 왜 내가 전혀 다가오지 않는 책을 꼭 읽으려 하는지 내안의 의도를 찾아야 하는 책이다. 

이름 때문이겠지. 사뮈엘 베케트. 현대문학의 한 봉우리. 그러므로 한번은 올라봐야 하는 작가. 

지난해 선집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집에 포함된 이번 작품은 베케트의 문학평론 [프루스트](1931)이다. 


베케트는 이작품을 쓰기 전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에 관해서 글을 썼고, 그밖의 몇편의 비평과 번역, 시를 쓰면서 연구와 창작 부문에서 열심히 성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글을 쓰던 당시의 베케트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젊은 베케트가 자신의 길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작가로서 프루스트를 읽은 흔적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애초 학자의 길로 들어섰지만 결국 작가의 길로 접어든 베케트가 있다. 베케트는 2년간의 강사 생활 이후 교직이 맞지 않음을 깨달았을뿐더러 학계에 회의를 갖게 되어, 결국 논문 대신 『프루스트』를 택해 자유롭게 집필했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내용은 철저히 소설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집중하고 있다. 베케트는 책 서문에서 프루스트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면모나 시인, 에세이 작가, 번역가로서의 모습은 이 책에 없다고 선언한 후 글을 시작한다. 과연 글은 오직 작품만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해설 중)





  














베케트는 당시 구조가 부재한다고 비판받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실은 디딤돌 위에 다양한 요소들이 쌓여 건축물로 형성되었음을 간파" 한다. 

기억, 습관, 시간이라는 삼두괴물이 베케트의 비관주의, 정해져 있는 실패, 결정되어 있는 비극을 드러내면서 베케트 작품 전반에 드리운 이중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당시 비난받았던 프루스트의 문체를 처음으로 찬사를 보냈다든지, 앙리 베르그송 철학을 바탕으로 읽던 당시의 흐름과 달리 쇼펜하우어 철학과 독일 낭만주의 철학의 특징들을 지적한 것등에서 당시의 인식을 넘어서 있다고 한다. 


나의 프루스트 독서는 지난해 중단된 이후 그대로이다. 사이드 서적들만 모으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언젠가 읽을 그날을 기약하며 더불어 사뮈엘 베케트까지 섭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볼까 기대해본다. 

봉우리...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 일뿐이라구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


    - 김민기 <봉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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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를 받아 훑어보다. 정작 다카시 자신도 보유하고 있는 서적이 얼마인지 몰랐다가 이번 기회에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략 10만권에서 20만권쯤.
여기서 이상한 나의 상상이 떠올랐다.10만권에서 20만권이면 도대체 어느 정도야?(고양이빌딩만이 아니라 다른 연구저작공간에도 책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고양이빌딩에 있는 책들만을 다룬 듯하다.) 지하 2층 지상3층에 옥상까지 가득가득 책이 들어앉았다지만 규모를 짐작하기 힘들었는데 갑자기 10만? 20만? 광화문집회에 모인 사람들 10만 20만의 규모를 생각하니까 어? 어마어마 하네~ 스고이~ 이렇게 감이 똭 오더라는...말도 안되는 얘기 ㅋ

어릴땐 책으로 빽빽히 둘러쌓인 곳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내모습을 곧잘 꿈꿨는데 지금은 그런 끔찍한 책감옥에서 살고 싶지 않다.
언제부턴가 내가 곧잘 상상했던 모습은 집안이 훤해서(훵해서가 아니라) 말을 하면 메아리가 살 정도로 짐이 없는 공간의 집이었다.
책감옥 같은건 싫다. 글감옥은 내 운명이 아니어서 그건 생각할 필요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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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바다] 완독. 

몇 페이지 남지 않았는데도 잘 넘어가지 않더니 마지막 부분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나마 읽을 수 있었다.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마지막에서야 드러난다. 

사건으로만 보면 그다지 반전답다고 할 수 없고, 밋밋하지만, 역시 '스타일'로는 꽤나 인상에 남을만하다. 

그날 독서를 마감했던 한 문장, "삶 자체를 졸인 듯한 향기"를 읽은 후로 고단하다고 느껴질 때 허공에서 내 삶의 향기라도 흩어져있을까 킁킁거려 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그 일' 때문일까, 주인공 맥스에게 드리워진 삶의 비애감은 결국 '익사가 가장 부드러운 죽음이라는 사실'(235)을 늘 마음속에 그리며 살게 했던 것 같다. 

<올드보이>를 떠올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은 자기의 말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무책임했던 반면 맥스에게는 평생 떨쳐버리지 못한 그림자로 늘러붙어 있다. 드러나진 않았지만 숨겨진 맥락속에 읽히는 것은 그렇다.  

최민식은 본것을 전했고, 맥스는 들리는 말한마디를 전했다. 


바다로 바다로 헤엄쳐 가는거야, 더 깊은 곳, 더 깊은 곳으로. 

어린 시절에 구경하듯 목격한 두 아이가 헤엄쳐 사라져간 장면과 아내 애나의 암투병, 결국 병원 침상에서 마감하는 삶.

맥스는 아내의 마지막을 목격하지 못한다. 그 시각 바다에 있었기 때문에.


소설과 무관하게 엉뚱하게 두 장면을 떠올리며, 만일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병으로 병원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마감하는 마지막은 꿈꾸고 싶지 않다. 

내가 꿈꿨던 마지막도 바다였는데 ... 뭐든 장담하지 않아야 한다. 


















2005년 줄리언 반스는 [용감한 친구들](원제는 아서와 조지)로 가즈오 이시구로는 [나를 보내지마]로 각각 후보에 올랐던 모양이다. 스코틀랜드 작가 알리 스미스는 내겐 낯선 작가라서 잘 모르겠다.

줄리언 반스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2011년에 맨부커상을 탄다. 

만일 [플로베르 앵무새]라든지, [남아있는 나날]이 그해 [바다]와 붙었다면 수상내역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묻는다. 

이 소설들이 100년 200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읽힐까. 

많은 독서인들의 서가에 꽂혀 있을까. 그런 소설일까. 































2017년 1월 9일

한차례 완독 후 다시 읽어가고 있는데 이 소설은 순서가 묘하게 배열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맥스가 어떤 인물로 다가오는지를 가늠하는데 중요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니까 이야기 순서상으로 보면, 시작은, 신들이 떠난 날, 자신도 죽어 무덤에 있는 것같은 삶을 살았음이 프롤로그처럼 나온다. 다음이 50년전의 어린시절의 휴양지이자 고향같은 시더스로 돌아온 맥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내 애나를 보내고 왜 맥스는 시더스로 왔을까, '참회의 시간'(53)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맥스 스스로 생각한다. 

맥스는 결국 과거속에 살아왔던 남자였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애나와의 결혼생활, 딸 클레어의 얘기가 끼어들고, 11세 맥스에게 신들로 다가온 그레이스 가족과 로즈의 얘기. 그리고 절정처럼 맥스가 멀리서 보고 들었던 그일. 

그일까지 밝혀진 후, 시더스에서 망가져 가던 맥스는 술에 취해 바다에 쓰러진다. 

쓰러진 맥스는 발견되고, 딸 클레어(약혼한 사위까지)와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아마 지지부진했던 자신의 일, 책을 쓰는 일을 쓰면서 나이들어갈 수도 있을 거라는, "인생은 많은 가능성들을 잉태하고 있다"(240)고 인정하며 노후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잘못알고 있던 일의 전말을 알게 되고, 

소설의 마지막은 애나가 죽음을 맞던날 맥스는 바다에 있었고, 아내의 사망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맥스로 끝난다. 


그러니까, 소설의 마지막 다음이 소설의 처음으로 이어지는 순으로 되는 것이다. 

도돌이표같은 순서다. 

이 반복에서 맥스의 "인생의 많은 가능성"은 어떻게 되는가. 

마지막 문장. "마치 바닷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마치 바닷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 같은 삶을 사는 것인가. 마지막 문장이 참 좋다. 


[바다]를 몇번 다뤘더니 졸지에 [바다]의 매니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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