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을 인터넷으로 볼 수 있게 됐군. (http://sillok.history.go.kr)

큰 일 해냈네.

그나저나 나 또 한눈 팔게 생겼다. 일은 언제 하나?

포스트 잇 : 아울러 민족문화추진회(www.minchu.or.kr) 사이트의 일성록 등도 들여다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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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한국어판 서문도 있건만, 그들이 한국을 잘 아는지는 모르겠다. 엄청난 책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지금까지(본문 521페이지 중 425페이지를 읽고 있는 지금) 한국에 대한 또는 한국 저자들의 책은 단 한권이 없다.

학문의 열등감을 느낀다는 게 무엇보다 크게 다가온다. 게다가 언급되고 있는 책들 중 보고 싶은 책들의 번역서도 없는 걸 확인하면 더 실망스럽다. 한국은 연구해볼만한 건덕지가 없다는 건가?

 

소비에트 사회의 발전과 정치적 변증법에 대해 다루고 있는 탁월한 저서라는 Moshe Lewin의 [The Making of the Soviet System]가 궁금하다. 또 Mao 이후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실천변화, 특히 문화와 관련된 분석을 하고 있다는 Xudong Zhang의 [Chinese Modernism in the Era of Reforms]도 보고 싶은데 역시 번역서가 없다. 

마오의 경제적 근대화 기획에 대해 다뤘다는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Maurice Meisner, [Mao's China and After]) 다행히도 번역되어 있었다.

 

 

요즘 세상에 대한 이해를 좀 깊이 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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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태종무열왕과 통일전쟁시기 신라를 읽는다는 것.

 

문무왕은 진짜로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해 바다에 묻혔나?

 삼국 본기를 읽은 지금까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신라 문무왕 본기였다. 상,하로 기록된 문무왕대는 본기 중 가장 길다. 아버지 김춘추 태종무열왕이 당을 끌여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를 이어 문무왕은 고구려까지 무너뜨렸다. 일이 많았기도 하거니와 문무왕과 당 고종, 신라와 당 사이에 오갔던 외교문서를 거의 그대로 싣고 있기 때문에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헤아리기 힘들게 부식은 이 문서들의 내용을 무척이나 성실하게 옮겨놓았다. 후세에 어떤 뜻이 전해지길 바란 것일까?

 

어쨌든 고구려와 백제를 합하여 한 나라를 이룬 뒤 또 하나의 남은 문제는 당과의 관계였다. 고구려와 백제를 치기 위해 끌어들여 온 외세였지만, 그 외세가 일이 끝났다고 '죽엽군' 사라지듯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훈은 당에 보내는 글에서 문무왕 그는 거의 빌고 있다고 썼다. 맞다. 구구절절하고도 통절하게 이유를 설명하고 선처를 구하고 있다. 문무왕은 당의 (臣)이 되어 충성하고 있음을 빈번히 고한다. 그러다가도 국가(唐)의 은택은 비록 한이 없지만 신라의 충성도 또한 알아 주어야 할 것이외다 처럼 일방적일 수만은 없음을 완곡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곤 군사를 몰아 당 원정군을 쳤다. 대국 당을 앞에 두고 문무왕이 겪었을 신산함을 느낄 수 있다.    

 

태자 시절에 당에 거의 볼모로 가 있으면서 당을 보았고 재위 20년 동안 전쟁의 시기를 살았던 왕은 56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의 마지막 유조(遺詔)의 정조는 허무다.

운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이 한가지라 황천에 돌아간들 무슨 한이 있으랴. . 아! 산곡은 변천되고 세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 옛날 만기(萬氣)를 총괄한 영웅도 마침내 한무더기의 흙이 되어 초동 목수는 그 위에 노래하고, 여우.토끼는 그 곁을 구멍뚫는다. 한갓 자재를 허비하여 역사의 조롱거리를 끼치며 헛되이 인력만 수고롭게 할 뿐 죽은 넋을 살릴 수 없는 것이니 고요히 생각하면 그지없이 슬픈 일이다. 이와 같은 것은 즐겨하는 바 아니니 죽은 뒤 10일이 되거든 고문의 바깥 뜰에서 서국의 식에 의하여 화장하고 필요한 것이 아니면 다 폐하고 율령과 격식도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개혁하라. 소속 관원은 즉시 시행하라.

 

흔히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해 바다에 묻혔다는 얘기는 후세 사람들의 기원이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왕이 평시에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고 나와 있다. 왜구가 아니라 문무왕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당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고 믿는 편이 더 그럴 듯하다. 그래서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오는 길목이나 서해 바다 어디에 묻혔다면 완전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무왕의 조국은 신라땅이었다. 그리고 신라땅의 바다 동해였다. 문무왕의 나라를 지키는 용의 기원은 뒤를 이은 신문왕대의 만파식적으로 완결된다. 부식은 <잡지>편에 이 만파식적 얘기를 적었지만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부식이 거부했던 아버지 문무왕으로부터 받은 평화와 치유의 악기를 일연은 엄연하게 밝혀 놓았다. 여기에 이르면 삼국사기를 읽으며 거칠어진 마음이 무화되는 듯 하다. 문화선전용이면 어떠리, 고급스런 얘기다. 

2005년 10월 4일자 한겨레신문에 권태호 기자의 <'치우천왕'과 '구역질나는' 삼국사기>

 http://www.hani.co.kr/kisa/section-005006000/2005/10/005006000200510041133245.html 라는 기사가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완성한 후 임금에게 올리는 에서 이 역사서가 명산(名山)에 비장할 것은 못되오나 바라옵건대 장독을 덮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라는 겸양을 겉으로 하여 학자로서의 소망을 밝혔다. 수없이 많은 것들이 세월 속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당했음에도 [삼국사기]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21세기 후손인 한 기자에게 구역질 나는 책이 되었음을 김부식이 안다면 차라리 장독을 덮는 데라도 요긴하게 쓰이길 발원했을까?

 

구역질나는 삼국사기를 이제야 읽고 있다. 삼국본기를 읽은 지금까지 구역질은 나지 않았다. 다만, 참담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기자의 말처럼 보다 웅대하고 원대한 민족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면 오늘의 우리는 아니, 어제의 선조들은 우리에게 다른 오늘을 물려줄 수 있었을까? 김부식 같은 이들이 운을 타고 함께 나 맞서서 천하를 다투거나 또는 간웅이 틈을 타고 나와 신기(神器)를 노리는 처지가 아니면 천자의 나라에 소속된 편방 소국은 사사로 연호를 이름지어 쓸 수 없는 것이다는 식으로 가르쳐 오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는 달라졌을까?

 

삼국본기까지 읽기를 마친 다음 든 첫 번째 생각은 부식의 삼국사기는 (중국에 대한)조공의 역사다 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문장이 몸이 불편하다 이다면, 부식의 삼국사기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문장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일 것 같다. 삼국이 거의 같은데, 특히 고구려 장수왕 본기는 8할이 조공을 보낸 사실의 기록이다. 장수왕 시절, 중국 대륙에서는 남북조(북조-위와 남-남제)외에 송, 연나라 등이 대립하고 있었기에 장수왕의 고구려로서는 이를 잘 활용해야 할 형편이었을 것이다. 장수왕이 현명한 외교정책과 한편으론 한반도 남하 정책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간 걸웅으로 인식되고 있는 지금이다.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삼국사기를 읽으면서도, 한편으론 곤혹스럽기도 하고 잘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중국과 한반도, 일본이 뒤엉킨 것은 부식이 본 삼국시대나 지금이나 근저에는 변화가 없는 듯 하다. 물론 거기에 또 한나라 미국까지. 고구려가 중국에, 신라가 중국과 고구려와 백제에, 백제가 중국과 고구려와 때론 신라에, 일본이 중국과 신라와 백제에 등등으로 그 때 그 때의 국력과 상황에 따라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화친을 꾀하고 그러다 치고를 반복하였다. 사대교린은 배알없는 자들에게서 나온 외교노선으로 치부하기엔 사세가 복잡하다.

 

그렇다해도 곤혹스러운 건 부식의 세계관이다. 부식은 뼈 속까지 중국을 섬기고 사모한 자이다. 편방의 소국으로서 국력만이 아니라 문화, 학문 면에서도 비할 바 없이 대국이자 군자의 나라인 중국을 앙모하고 본받아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그는 사론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고려, 조선, 한말, 그리고 지금까지 죽 이어져온 사대의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진다. 우리는 부식을 지금도 여전히 많이 갖고 있고 보고 있다.

 

어쩌다 범우문고의 [조선사 연구(초)](신채호)에서 김부식에 대한 강렬한 적대감이 느껴지는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1대사건을 읽었다. 어느 부분을 읽다가 나는 웃음이 터졌다. 부식의 골치거리라는 말이었다. 소국이 일관하지 못한 채 주장을 내세워 대륙에 맞서려 했던,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었던 세력이나 인물들이 바로 부식의 골치거리들이었다. 단재의 글에서 귀여운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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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히 2008-01-28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 저두 삼국유사 읽고싶어용
 

 

장예모 감독의 <연인> 중의 한장면. 이 영화 보면서 숨막힐 듯 아름다웠던 장면은 이 사람들이 등장하는 대나무 숲의 엄청난 녹색(감히 형용하기 힘들어서 극장에서 봐야만 그 감동을 느낄 수 있다)의 향연이었다.

[삼국유사]에는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 얘기가 나온다.

 13대 왕 미추(재위 262~284)는 신라 왕씨였던 박씨, 석씨, 그리고 김씨 세 성중, 김알지의 후손으로 처음 김씨로 왕이 된 자이다. 신라는 이후 17대 내물왕부터 마지막 56대 경순왕까지 모두 이 미추왕의 후손인 김씨가 이었으니 신라 김씨 왕가의 시조로 추존되었다. 시조이다 보니 그에 걸맞는 전설이 필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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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된 책이 있어 구하러 헌책방들을 돌다가 1978년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삼국사기](신호열 역)를 발견했다. 본문은 밑줄 하나 낙서 하나 없이 아주 깨끗한 헌책이었다. 교보문고 라벨이 붙어 있었는데 누군가 구입했다가 떠들어보지도 않고 얌전히 보관하다 내놓은 것인지, 동대문 헌책방까지 굴러들어온 그 내력을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얌전한 책이었다.

 

  삼국유사는 오래 전에 솔출판사(이재호 역)와 을유문화사(김원중 역)에서   나온 것으로 구입해놨다가 조금씩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구입 직후 얼마간 떠들어 보았을 뿐 이후 더 흥미가 당기는 책들을 보느라 책꽂이에 그냥 꽂혀 세월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삼국사기를 보고 싶기는 하였으나 썩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사마천의 [사기]도(까치에서 나온 것을 보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열전을 재미있게 읽었을 뿐 세기, 본기 조금씩 읽다가 매우 지친 적이 있었다. 언제쯤 다시 들여다 볼지 알 수 없다. 사기나 유사를 읽는 일은 아는 것이 새로운 앎을 낳고 그 새로운 앎이 또 다른 앎을 추동시키며 나아갈 수 있을 때 지치지 않고 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생각지 못했지만  삼국사기를 발견했으니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한길사에서 나온 삼국사기 같은 경우 그 딱딱한 판본이며 책이 무기가 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한 무게를 느꼈을 때 감당할 수 없었다. 나중에 다시 삼국사기를 산다면 이재호가 역한 솔출판사 것을 사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다. 학자가 아닌 나는 역자의 신뢰성이나 성실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오며 가며 앉거나 눕거나 편히 읽을 수 있는 책이 좋다. 오래 전에 나온 신호열 역의 이 삼국사기는 문고판으로 2단 세로쓰기, 총 854페이지, 두 권으로 분권되어 있는 책이다. 손에 잡기도 편하고 세로쓰기라 가독성에 있어서는 조금 불편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정도 사람에게는 은근한 향수를 느끼게 하면서 제법 읽는 맛이 나게 한다. 이 삼국사기는 동서문화사에서 기획한 Worlds Great Books 15, 16편이다. 그 그레이트한 책이 아담한 문고판으로 나왔다. 한길사 역시 그레이트북 시리즈에 삼국사기도 있다. 둘 다 그레이트다.

이미지를 삽입하기 위해 알라딘 상품찾기를 해 보니 삼국사기 판매량 순은 [어린이 삼국사기]가 앞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삼국사기를 본단 말인가? 놀랍도다. 봤더니 열전 중심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가. 무슨 수로 어린이에게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든지 눈이 오지 않았다등이 중요하며, 또는 뱁새가 황새를 낳았다라든지, 용이 금성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 같은 사실(?)들이 이런 역사책에 버젓이 올라야 하는지를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며,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겨우 신라 본기 21대왕 소지마립간을 읽었지만(69페이지 본 것이다) 관심을 당긴 것은 5세기 초에 있은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대의 얘기이며 박제상이라는 걸출한 충신의 얘기이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구구절절한 얘기로 소개하고 있다. 

전왕의 적자 그 중에서도 장자가 왕위를 잇는 것이 아직은 확고히 이루어지지 않은 때라 왕족과 호족들의 세력 다툼이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던 당시이다. 시조 혁거세의 직계와 또 다른 알에서 나온 김알지의 후손, 왜에서 물 건너온 석연찮은 석씨(탈해왕) 등이 초기 왕권을 다투던 세력인데, 5세기에 이르러 이 세력간의 노골적인 왕위 다툼이 이루어지는 듯 싶다. 게다가 고구려,백제, 그리고 왜구 정도가 아니라 신라를 강력히 위협하는 왜국까지 삼국 중 가장 뒤처져 있던 신라는 사면초가로 어려운 외교전략을 구사해야만 하는 위태로운 시기였다.

 

17대 왕인 내물왕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왜가 위협하자 아들을 볼모로 보내고 고구려가 또 위협하자 다음 왕이 되는 실성을 볼모로 보낸다. 실성은 이찬(최고 관직 이벌찬 다음 관직으로 왕이 될 수 있는 진골만이 차지하는 관직이었다)의 아들이었다. 이렇게 내물왕은 볼모 외교전술을 구사하며 간신히 버텨나갔다. 내물왕이 죽기 전해에 실성은 10년간의 고구려 볼모 생활에서 풀려나 돌아왔다. 아마 이때 실성과 고구려 사이의 모종의 연계가 있었지 싶다. 고구려에서 돌아온 실성은 내물왕의 뒤를 이어 18대 왕이 된다. 삼국사기에도 실성왕은 자신을 볼모로 보낸 내물왕에 대한 원한을 언급하고 있다.

 

실성이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사정이 크게 나아진 것이 아니라서 왜와 고구려는 또 다시 볼모를 요구한다. 그러자 실성은 내물왕의 아들인 미사흔과 복호(이재호나 김원중은 모두 보해로 표기했다)를 왜와 고구려로 볼모로 보내 버린다. 16년간 재위에 있던 실성왕은 내물왕의 장자 눌지마저 고구려의 아는 자를 이용해 청부살인을 요청했으나 이 실성왕의 지인 고구려 사람은 눌지의 외양과 풍신이 상량하고 단하여 군자의 풍도가 있음을 보고 눌지에게 귀국의 왕이 나에게 그대를 죽이라고 하였으나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며 못 죽이겠으면 그냥 곱게 돌아갈 것이지 원한을 심어줄 말을 토로한 채 돌아가 버린 것이다. 눌지는 실성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 때부터가 흥미롭다.

왕이 된 눌지기  즉위하자 착수한 일이, 아버지인 내물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형제인 미사흔과 복호를 어떻게 신라로 데려올 것인가였다. 대신들과 상의한 끝에 모두가 추천한 지방 군의 태수 박제상을 택하여 거사를 성사시킨다. 삼국사기에는 눌지왕 2년(418년) 왕의 아우 복호가 고구려에서 내마 제상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 왕의 아우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해 왔다는 두 문장으로 정리되어 있다. 대신 박제상 열전에 보다 상세한 얘기가 나와 있는데 삼국유사와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사기와 유사는 분명 다르다. 그것은 김부식을 비롯한 사기 편찬자들과 일연의 입장 차이이며 서술의 차이이다.

 

삼국사기 열전 박제상 편에는 눌지왕이 믿을만한 원로 대신 몇을 불러

내 아우 두 사람이 고구려, 왜국 두 나라에 볼모가 되어 여러 해를 돌아오지 못하니 형제의 정인지라 그리운 생각을 억제할 수 없소. 살아 돌아오게 되기를 원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문했다고 나온다. 박제상은 날래고 꾀가 있어서 원로 대신들의 추천을 받았는데, 눌지왕 앞에 와 부복하며 말하길, 신이 비록 어리석고 불초하오나 감히 명령을 받들지 않으오리까 라는 한 마디를 날리고는 예를 갖춰 고구려로 들어가 왕(장수왕)에게 성誠신信을 언급하며 볼모를 구사하는 것은 진실로 말세의 일이라는 유교적 냄새가 다분한 어투로 점잖게 언술을 편다. 이에 감복한 것인지 어쩐지 장수왕은 복호를 내주어 박제상은 그와 함께 무사히 눌지왕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눌지왕은 나는 두 아우를 생각하기를 두 팔 같이 여기는데 지금 단지 한 팔만 얻었으니 어찌하오 한다. 박제상 왈 고구려는 대국이요 어진 임금이기에 신이 말 한마디로 깨우쳤거니와 왜인 같은 자는 말로써 깨우칠 수가 없고 마땅히 그럴 듯한 꾀를 써야 할 것이라고 명령을 욕되이 하지 않겠다며 가족도 보지 않은 채 왜로 건너간다. 그리하여 박제상은 꾀로 미사흔을 본국으로 도망치게 한 후 자신이 볼모가 된다. 온갖 고문을 당하며 누구의 신하인지를 선택하라는 물음에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될 수 없다는 청사에 빛날 충언을 남기며 결국 장작불에 사지를 태운 후 베어 죽임을 당한다.

 

왕의 눈물

사기는 그러하고 삼국유사는 구구절절하다.  

신하들과 호걸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베풀며 술과 음악을 즐기고 있을 때 눌지왕은 돌연 눈물을 떨구기 시작한다. 왕의 눈물에 신하들이 어쩔 줄 몰라했을 것은 뻔한 일. 눌지왕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이미 아는 대로 신하들은 박제상을 천거하고 박제상을 만난 왕은 그를 매우 가상히 여겨 그와 잔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고 헤어졌다.

 

고구려로 간 박제상의 행적은 사기에서 기록했듯 점잖게 장수왕을 설득하는 언술이 아니었다. 장수왕을 만나기는커녕 볼모로 있던 복호가 그 동안 인심을 쌓아놓은 덕에 도망치는 두 사람을 고구려 군사들이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활을 쏜 봐주기에 놓여날 수 있었던 것이다. 사기와 유사의 기록 중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이제 와서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단지 김부식의 인식과 일연의 그것 사이의 차이리라. 사기와 유사의 차이리라.

 

이렇게 신라로 돌아온 박제상은 동생을 만난 왕이 왜국에 있는 또 다른 동생 생각이 간절해져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며, 눈물을 머금고 주위 사람들에게 또 말한다. 마치 몸 하나에 팔뚝이 하나 뿐이고 얼굴 하나에 눈이 하나 뿐인 것 같소.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없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소?

 

생각나는 우화가 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아이들에게 돌아갈 생각으로 떡 광주리를 이고 바쁘게 고개를 넘는 어머니에게 호랑이는 한 고개 넘을 때 마다 나타나 이렇게 구슬렀다. 어머니는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허망한 기대를 했을 것이다. 박제상은 그 길로 왜국으로 떠날 수밖에. 동생이 둘 뿐이었던 게 다행이었을까? 이후 얘기는 사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삼국유사의 눌지왕과 박제상 간에 오간 정황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눈물로 하는 왕의 정치가 생각난다. 고구려 측에서 죽였든 눌지 자신이 죽였든, 어찌됐든 실성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되 무력한 왕인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던 모양이다. 무력한 왕이 할 수 있는 것이 눈물을 쏟는 일이었을까?  

 

고대국가들이 중흥기를 맞기 위한 여러 가지 조건들 중에서 특히 강력한 왕권은 중요하다. 분산을 청산하고 중앙집중을 이룰 때 비로소 중기, 중흥기로 이어진다. 눌지왕은 바로 신라가 상고(上古 혹은 上代 )시대를 벗어나 중고(中古 혹은 中代)시대로 도약하는 전 단계의 정지작업을 한 왕으로 보인다. 눌지왕은 아버지 내물왕으로부터 이어지는 왕위를 자신의 가계의 적자들로 잇게 했다. 이윽고 우리는 지증왕 , 법흥왕, 그리고 진흥왕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눌지는 실성왕을 죽이면서 실성왕의 모계였던 석씨 가문을 철저히 짓밟아 버렸다 한다. 왕이 될 수 있는 벌족 가문의 세력을 제압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벌족 가문 출신자들로 이루어진 대신들의 힘도 왕권 밑에 두어야 했다.

 

그러나 왕은 무력했다. 무력한데 어떻게 왕권을 강화할 것인가? 그것이 아마도 눈물로 하는 정치가 아니었을까?

 

외교적 사안을 형제간의 천륜으로 전도시킬 수 있는 길에 형제들을 적국에 볼모로 보낸 왕이 눈물로 호소하는 방법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달리 또 있었을까? 일연은 그런 저간의 상상을 한 것인지 삼국사기에는 언급도 없는 눌지왕의 눈물을 끌어대며 이야기를 엮어 놓았다.

박제상은 이 연극에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적격의 캐스팅이었다.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될 수 없다는 충신의 전범으로서 그는 눌지왕이 원했던 왕의 충직한 신하상을 뭇대신들과 백성들에게 심어주고 장렬히 죽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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