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바다] 완독. 

몇 페이지 남지 않았는데도 잘 넘어가지 않더니 마지막 부분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나마 읽을 수 있었다.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마지막에서야 드러난다. 

사건으로만 보면 그다지 반전답다고 할 수 없고, 밋밋하지만, 역시 '스타일'로는 꽤나 인상에 남을만하다. 

그날 독서를 마감했던 한 문장, "삶 자체를 졸인 듯한 향기"를 읽은 후로 고단하다고 느껴질 때 허공에서 내 삶의 향기라도 흩어져있을까 킁킁거려 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그 일' 때문일까, 주인공 맥스에게 드리워진 삶의 비애감은 결국 '익사가 가장 부드러운 죽음이라는 사실'(235)을 늘 마음속에 그리며 살게 했던 것 같다. 

<올드보이>를 떠올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은 자기의 말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무책임했던 반면 맥스에게는 평생 떨쳐버리지 못한 그림자로 늘러붙어 있다. 드러나진 않았지만 숨겨진 맥락속에 읽히는 것은 그렇다.  

최민식은 본것을 전했고, 맥스는 들리는 말한마디를 전했다. 


바다로 바다로 헤엄쳐 가는거야, 더 깊은 곳, 더 깊은 곳으로. 

어린 시절에 구경하듯 목격한 두 아이가 헤엄쳐 사라져간 장면과 아내 애나의 암투병, 결국 병원 침상에서 마감하는 삶.

맥스는 아내의 마지막을 목격하지 못한다. 그 시각 바다에 있었기 때문에.


소설과 무관하게 엉뚱하게 두 장면을 떠올리며, 만일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면 병으로 병원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마감하는 마지막은 꿈꾸고 싶지 않다. 

내가 꿈꿨던 마지막도 바다였는데 ... 뭐든 장담하지 않아야 한다. 


















2005년 줄리언 반스는 [용감한 친구들](원제는 아서와 조지)로 가즈오 이시구로는 [나를 보내지마]로 각각 후보에 올랐던 모양이다. 스코틀랜드 작가 알리 스미스는 내겐 낯선 작가라서 잘 모르겠다.

줄리언 반스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2011년에 맨부커상을 탄다. 

만일 [플로베르 앵무새]라든지, [남아있는 나날]이 그해 [바다]와 붙었다면 수상내역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묻는다. 

이 소설들이 100년 200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읽힐까. 

많은 독서인들의 서가에 꽂혀 있을까. 그런 소설일까. 































2017년 1월 9일

한차례 완독 후 다시 읽어가고 있는데 이 소설은 순서가 묘하게 배열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맥스가 어떤 인물로 다가오는지를 가늠하는데 중요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니까 이야기 순서상으로 보면, 시작은, 신들이 떠난 날, 자신도 죽어 무덤에 있는 것같은 삶을 살았음이 프롤로그처럼 나온다. 다음이 50년전의 어린시절의 휴양지이자 고향같은 시더스로 돌아온 맥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내 애나를 보내고 왜 맥스는 시더스로 왔을까, '참회의 시간'(53)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맥스 스스로 생각한다. 

맥스는 결국 과거속에 살아왔던 남자였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가, 애나와의 결혼생활, 딸 클레어의 얘기가 끼어들고, 11세 맥스에게 신들로 다가온 그레이스 가족과 로즈의 얘기. 그리고 절정처럼 맥스가 멀리서 보고 들었던 그일. 

그일까지 밝혀진 후, 시더스에서 망가져 가던 맥스는 술에 취해 바다에 쓰러진다. 

쓰러진 맥스는 발견되고, 딸 클레어(약혼한 사위까지)와 집으로 돌아갈 것이고, 아마 지지부진했던 자신의 일, 책을 쓰는 일을 쓰면서 나이들어갈 수도 있을 거라는, "인생은 많은 가능성들을 잉태하고 있다"(240)고 인정하며 노후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잘못알고 있던 일의 전말을 알게 되고, 

소설의 마지막은 애나가 죽음을 맞던날 맥스는 바다에 있었고, 아내의 사망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돌아가는 맥스로 끝난다. 


그러니까, 소설의 마지막 다음이 소설의 처음으로 이어지는 순으로 되는 것이다. 

도돌이표같은 순서다. 

이 반복에서 맥스의 "인생의 많은 가능성"은 어떻게 되는가. 

마지막 문장. "마치 바닷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마치 바닷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 같은 삶을 사는 것인가. 마지막 문장이 참 좋다. 


[바다]를 몇번 다뤘더니 졸지에 [바다]의 매니아가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들이 아니라 최순실과 도둑들이다. 도둑수괴는 박근혜일 것이고. 

오늘 아침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소개된 책.

나라살림연구소 정창수 소장의 인터뷰에 의하면 지난 5월부터 정부 예산을 들여다보면서 이상한 예산들이 책정되어 있다는 걸 감지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상하다고만 여겼던 항목들은 이후 박근혜최순실게이트가 속속 드러나면서 전모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특검 또한 이미 이 책을 구입했고, 연구소 연구원들의 의견 청취를 이미 한 상태다. 

조만간 뉴스공장을 통해 이른바 최순실 예산을 조목조목 따져볼 거라고 예고했다. 

정창수 소장은 한마디로 최순실은 '단순한 아줌마가 아니다'고 말한다. 

최순실을 도운 관료들의 도움으로 완성된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국가예산 빼먹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올해 국회에서는 총 1조 몇 단위의 최순실의 예산에서 고작 몇 천억 깎았을 뿐 6천억 정도는 고스란히 예산으로 편성되었다고 한다. 

국회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알았더라도 강력하게 제지할 수 없었을 거라고 정 소장은 말했다. 

정소장은 연구소에서는 알지 못한 국방예산에서도 특검이 최순실의 검은손을 밝혀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했고, 특히 문화스포츠쪽 예산, 예를 들어 로또를 넘어선 스포츠토토 붐업에도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을 거라고 일단을 알려줬다. 

모르던 세상이다. 앞으로의 방송이 기대된다. 

이 책이 어렵지 않을까 조금 걱정되지만 예산을 이해해볼만한 기회가 되기도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맨부커상 후보작들이 하도 쟁쟁해서 ‘황금의 해‘라고 불리던 2005년 수상작.
손댄지 1개월은 됨직하나 여전히 완독하지 못하고 읽다말다, 다시 들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아일랜드 모더니즘...만만치 않네.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나 다시읽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정선의 [소설의 첫 문장 : 다시 사는 삶을 위하여]는 문장이나 글쓰기 기본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장편이나 경장편소설의 첫 문장을 모으고 단상을 덧붙인 책이다. 

에세이. ......소설에 대해 더 많은 걸 알려줄까 해서 구입했기에 결국 내가 책 정보를 더 꼼꼼히 살피지 못하고 덜컥 산 내 잘못이다.  

수많은 소설이 있구나. 출판되어 우리 곁에 있구나. 더 많은 소설을 읽고 싶다. 뭐 이런... 생각만 더 들었을 뿐. 

에세이를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구나. 

평소에 즐겨찾기 하는 알라디너가 칭찬하던 책을 읽고 싶어 도서관에 갔다. 

좀 지난 책이었기에 보관실에 보관되어 있는 책이었다. 

도서관 직원이 내가 내민 청구번호를 보고 다소 시간이 걸려 찾아 내민 책을 보고서야 아뿔사 에세이구나, 했다. 

이 또한 내가 책 정보를 세밀하게 챙기지 못한 잘못이었다. 

빌리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대출하지 않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읽고 싶은, 기꺼이 구입해서 읽는 에세이는 어떤 종류인지 새삼 생각할거리를 갖게 됐다고나 할까. 

생각좀 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토너]의 존 윌리엄스의 1972년 소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최초 황제로 등극한 아우구스투스의 전기다.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라 각종 기록물, 서한, 저술 등의 기록을 편집하여 아우구스투스의 삶을 통찰할 수 있도록 한 독특한 전기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책 말미에 붙어 있는 대니얼 멘더슨의 해설에 따르면 1부는 아우구스투스의 대중적, 정치적 무대에서의 성공을, 2부는 사적이고 정서적 무대에서의 실패를 다룬다고 한다. 

나는 아직 1부도 채 읽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2차 삼두정을 이루던 정적들을 차례차례 물리치고 황제에 오르기전 마지막 결전 BC31년 악티움해전을 앞두고 있는 지점에서, 나는 이 소설을 계속 읽어야할지, 중단하고 차라리 아우구스투스 관련 서적을 읽는 게 나을지 고민하고 있다. 

[스토너] 보다 작품성을 더 인정받고 전미도서협회의 상을 받기도 했다는데 독특하게 전기를 엮어가는 사고의 발상과 집필의 수고로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차라리 아우구스투스 평전이나 로마 공화정과 제국에 대한 서적을 읽는 게 나은 게 아닐까 흥정하게 된다. 

2부 사적이고 정서적 무대에서의 실패는 [스토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아우구스투스의 '실패'는 결국 딸 율리아와 관련된 슬픔 때문이기도 하다. 

[스토너]의 딸 그레이스와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

결국 이 소설을 계속 읽게 된다면 2부의 궁금증 때문일 것 같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는 건 편지나 기록물 등 타인의 회상이나, 말, 기록에 의해 부조될 분 정작 아우구스투스 본인의 목소리는 소설 마지막에서야 나온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제안'할 뿐 ''재현'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창작 원칙이 흥미롭긴 하지만. 

결국 내가 쫓는 건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인물, 아우구스투스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인물인가.. 일텐데 소설적 부조에 의해서보다는 전기물, 역사서를 읽는 게 빠르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