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배운 주종(酒種)은 맥주였다. 도수가 높지 않은 데다가 목넘김이 부드러워 마시기에 좋았다. 크아, 그래 이 맛이야. 그 당시에 옛 애인은 맥주만 마셨던지라 그 시절 내 몸에 흐르는 피의 팔 할은 맥아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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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이를 먹고 인생의 쓴맛을 경험하고 나서부터는 소주를 마시게 되었다. 싸구려 공업용 알콜 냄새와 기분 나쁜 쓴 맛이 개 같은 내 인생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쓴 맛을 모르면 그게 인간이냐 인삼이지, 끄어억. 무엇보다도 소줏집의 풍경을 사랑했다(맥주를 마실 때는 맥줏집 풍경을 사랑했다).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소맥을 마시기 시작하면서였다. 소맥 맛에 눈이 돌아가 소맥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쇼잉, 그래 쇼잉. 소맥 잔에 젓가락 넣고 흔들면 맥주 거품이 마술처럼 생성되는 그 쇼잉. 처음에는 재미로 소맥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소맥 이외의 술은 마시지 못하고 있다. 어즈버.... 소맥 10년 외길 인생이시다. 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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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맥줏집에 가면 혼자 소주 한 병 시켜 혼자서 소맥을 말고, 소줏집에 가면 혼자서 맥주 한 병 시켜 혼자서 소맥을 만다. 친구들이 늘 하는 말. 너 참 유별나다. 이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이제는 소주를 마시면 소주가 너무 쓰고, 맥주만 마시면 맥주가 너무 싱겁다. 소맥이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맛이다. 섞어 마시면 인생 꼬인다. 한식의 세계화 전략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랍시고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현지인 입맛에 맞는 레시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멍청한 소리다. 한식은 한식일 때 성공할 수 있다. 카레는 인도의 음식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카레를 먹으면서 인도 문화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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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카레는 영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조된 영국 커리일 뿐이고, 일본 카레는 일본인 입맛에 맞게 개조된 카레라이스일 뿐이다(또한 아프리카 카레는 아프리카 사람 입맛에 맞는 카레일 뿐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카레는 이것과 저것이 섞인 소맥인 셈이다. 엉터리 같지만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A급 실력을 갖췄지만 B급 감성으로 노래하는 노라조의 << 카레 >> 에서 지적했듯이 "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이 맛은.... 순한 맛 매콤한 맛 인도에도 없는 맛 " 이다. 인도 요리가 인도에는 없는 맛이니 무국적 요리인 셈이다. 인도인 입장에서 보면 음식의 현지화 전략은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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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한국인 미슐렝 셰프들이 한식이랍시고 현지인 입맛에 맞는 한식을 선보이고는 하는데 그들이 내놓은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맛에 불과하다. 내 경험을 통해 그들에게 충고 한 마디 하자면 : 섞어 만들면 인생 꼬입니다요. 셰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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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손님




내 친구 별명은 " 귀한 손님 " 이다. 고1 때 캐나다 이민을 떠난 친구인데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만나게 된다. 이 친구에게는 독특한 말버릇이 있는데 툭 하면 너희들 ooo 귀한 줄 알아 ! _ 라며 충고를 한다. 예를 들면 너희들, 금수강산 귀한 줄 알아라. 세계 어디를 가도 금수강산 만한 데 없다. 뭐, 이런 식이다. 내가 누구인가. 작명의 달인 아닌가. 친구의 말버릇을 감지한 나는 그에게 귀한 손님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친구도 꽤 만족해 하는 모양이다. 향수병을 모르고 살던 친구가 나이가 들어 신토불이자가 된 것을 보면 해외에 살다 보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친구의 귀한 시리즈 중에서 내가 잊지 못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쩌면 황당한 내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친구의 에피소드를 듣다가 눈물이 났다. 이제부터 친구의 어쩌구니없고, 다소 황당하며 당혹스럽지만 묘하게 감동적인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한가위 추석 선물이라 생각하시라. 몇 년 전, 친구가 무더운 여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국 방문은 주로 여행 목적이라 날씨 좋은 봄 가을에 집중되었는데 그때는 경조사 문제로 한국을 방문한 계절이 8월 땡볕이었다고 한다. 귀한 손님 녀석은 한여름에 거리를 걷고 있었다. 너무 더워서 더위를 식힐 목적으로 놀이터 공원을 향해 가다가 귀청이 떨어질 듯한 소리를 듣게 된다. 매미 우는 소리다. 맴맴맴맴맴 ~ 친구는 이 소리를 듣자 갑자기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증폭되면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고 한다. 기억상실증 환자가 느닷없이 기억이 되돌아오는 경험을 한 것이다. 친구는 캐나다 이민 후 단 한번도 여름 매미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캐나다에도 여름은 있고 매미도 있는데 매미 우는 소리는 없었다고. 그래서 매미 우는 소리를 잊고 있다가 한국의 여름 땡볕 거리를 걷고 있다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매미 소리를 듣고 잃어버린 기억들이 되살아났다고. 그러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고 했다. 이 황당한 친구의 경험담에 몇몇 친구들은 당황했지만 나는 그 친구가 경험했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친구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물 먹은 습자지처럼 앵앵거리며 말했다. " 너희들, 매미 귀한 줄 알아라, 쨔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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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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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혹은 독자 입장에서 보면 " 완전한 사랑 " 만큼 따분한 사랑도 없다. 최부잣집 셋째 딸과 부잣집 둘째 훈남의 러브 스토리. 양가의 축복 속에서 이루어지는 웨딩 스토리. 워뗘 ? 궁금하신가. 관객은 결핍이 없는 사람끼리 만나서 만드는 완전한 사랑 혹은 안전한 사랑에 대해 관심이 1도 없다. 가수 김현식의 노래 가사처럼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을 해본 우리들은 사랑의 승질머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사랑은 치열하지만 치졸하고, 더럽고, 짜증 나고, 죽이고 싶고, 가끔 미친다는 사실. " 이 세상 모든 사랑, 다 족구하라 그래, C ~ " 관객은 열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열광하는 것은 드러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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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풍의 언덕 >> 의 히스클리프는 결핍의 아이콘'이다. 흑인 고아 소년(인도계로 추정 ㅡ )이 백인 남성의 딸을 좋아한다. 눈부시게 흰 캐서린은 검은 히스클리프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다. 요구와 욕구와 욕망이 서로 어긋날수록.... 보다 강렬하다. 캐서린 또한 완전한(성숙한) 인격체는 아니다. 그녀는 진정한 사랑과 물질적 욕망 사이에서 주체 없이 흔들리는 갈대다. 그녀의 허영과 사회의 허용 사이에서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 남자냐, 저 남자냐의 문제는 캐서린이 결혼을 한 후에도 계속된다. 이 남자냐, 저 남자냐.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소설은 파국을 맞는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의 진짜 악당은 캐서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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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결핍과 결핍이 만나면 떨어질 줄 모른다. 부침개의 설익은 면과 설익은 면이 붙으면 떨어질 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뜨거운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녹여서 붙어버린, 뒤집기에 실패한 반달 모양의 부침개'다. 이 얼마나 징그럽고 징글징글하며 치열한 사랑인가. 자신의 온몸을 녹여서 붙어버린 육체성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 아닐까. 나의 결핍을 상대에게 투사하여 그것을 욕망하는 것은 건강한 사랑은 아닌 듯하다. 그래서 생각한다. 뜨거운 사랑보다는 미적지근한 사랑이 오래간다는 사실. 시들시들한 사랑이 건강한 사랑이다. 가끔 백년해로하는 부부를 보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켜켜이 쌓인 부침개 같다. 양쪽 모두 노릇노릇 익어서 서로 붙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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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침개를 뒤집다가 공중에서 제대로 회전하지도 못한 채 떨어져 안 익은 면과 안 익은 면이 겹쳐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동그란 부침개가 반달 모양이 된 것이다. 이 정도 두께면 부침개가 아니라 팬케이크'였다. 실수를 어떻게 해서든 만회하려고 두 면을 떼려고 수작을 부렸지만 익지 않은 면끼리 붙은 부침개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중략) 가끔, 뒤집기에 실패해서 반달 모양이 된 부침개를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익지 않은 한쪽 면이 익지 않은 한쪽 면과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뜨거운 몸으로 서로를 녹여서 붙어버린 부침개를 보면서 사랑을 읽어내는 내 감성은 아마도 실패한 사랑을 경험한 남자의 뼈아픈 후회일 것이다. 결국 뜨겁고 지독한 사랑이란 설익은 것과 설익은 것이 만날 때에나 가능한 것이다. 다 익은 부침개는 겹쳐 놓아도 붙지 않으니까( 500일의 썸머, 설익은 것과 설익은 것이 만날 때 中 ㅡ https://blog.naver.com/unheimlich1/22302828215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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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익은 면과 안 익은 면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실패한 부침개를 보다가 문득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지독하다. 더럽고 징그럽다. 이해 당사자들은 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나는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라 믿는 편이다. 롤랑 바르트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질병이라고 말이다. 더럽고 징그럽고 지독한 사랑은 죽기 살기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 설익은 면과 설익은 면이 만나면 떨어지지 않는 부침개처럼 사랑 또한 결핍과 결핍이 만나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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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적 사랑의 대표적 소설 << 폭풍의 언덕 >> 을 보라. 히스클리프의 익지 않은 한쪽 면과 캐서린의 익지 않은 한쪽 면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뜨겁게 녹여서 붙어버린 부침개다. 익지 않았기 때문에 붙는다. 사랑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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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의 정치학





한국인은 " 한국인의 정 " 을 한국인 고유의 정서라고 자랑하지만 < 정 > 이라는 단어는 한자어다. 한자어 情을 대체할 수 있는 순우리말은 없다. < 한 > 도 마찬가지다.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恨 또한 한자어'다. 한국 고유의 정서라면서도 정작 우리는 한국 고유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순우리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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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국인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단어는 무엇을까 ? 내가 보기에는 < 눈치 > 같다. 눈치는 한국인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가 좀 힘들다. 눈치라는 감각의 5할을 차지하는 것은 낌새다. 이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세계 언어가 있을까. 눈치는 sence와도 결이 다르고 tact와는 미묘하게 결이 다르다. 이 단어들에는 낌새라는 야리꾸리하고 시금털털한 냄새가 없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왜 눈치가 발달했을까.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은 한국인 친구가 부모와 통화할 때 신기한 경험을 한다고 한다. 어_로 시작해서 어_로 끝난다는 것. " 어... 어 ? 어 ~ 어. 어어어. 어 ?? 어.. 어, 어 !!!!!!!!!!!! 어, 어어, 어, 어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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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하자면 " 안녕, 왜 전화했어 ? 뭐라고 ? 그래, 그래, 무슨 뜻인지 알아. 그래서 ? 뭐 !!!!!!!!!! 맙소사. 시발. 아 미치겠네. 그래, 알았어. 알았다니까. 미치겠다, 증말. 응응. 그래 전화 끊어. " 외국인은 모르지만 한국인은 친구가 사용한 어' 가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고 있다. 첫 번째 어는 기뻐서, 두 번째 어는 슬퍼서, 세 번째 어는 칭찬의 의미로, 네 번째 어는 놀라서, 다섯 번째 어는 당황해서, 여섯 번째 어는 초조해서, 일곱 번째 어는 다급해서 나오는 말이다. 이처럼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시시때때 달라지는 것을 언어학에서 고맥락 언어( (High-Context )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적 특성을 화용론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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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어_로 시작해서 어_로 끝나는 친구의 통화를 보면서 1) 말 자체보다는 그 말이 오가는 상황, 분위기, 인간관계, 표정, 눈빛, 태도, 시간, 장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어_의 뜻을 이해한다. 눈치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한국인이 다른 사람보다 눈치가 발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어의 특성에 적응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반대로 영어권 언어는 저맥락 언어다. 영어권 언어는 주어도, 목적어도, 행위자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명시하기에 굳이 맥락을 살필 필요가 없다. 명확함은 영어권 언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한국인보다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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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 언어가 " 자기중심적 사고 언어 " 라면 한국어는 " 타자중심적 사고 언어 " 다. 여기서 타자의 계급이 중요하다. 눈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약자의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쪽은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인간 유형이고, 다른 한쪽은 권력형 인간 유형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신분이 낮은 사람 앞에서 굳이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최근의 한국 정치를 보면 눈치를 보는 이와 눈치를 보지 않는 이가 명확히 구분이 된다. 이재명은 눈치를 많이 보는 반면에 유시민은 거리낌이 없다. 유시민은 이재명을 향해 권력자 행세를 한다며 입에 거품 물며 쌍욕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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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는 유시민이야말로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을 구별하지 않고 배설하는 권력자'다. 유시민을 보면서 깨닫게 된다. 인간은 눈치를 챙겨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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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인은 " 대화를 듣기 " 보다는 " 대화를 본다 ". 서양인들이 대화를 귀로 들으면서 의미를 파악하는 반면에 한국인은 대화를 눈으로 봐야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드라마 천국이자 강국인 이유는 드라마라는 장르가 대화를 눈으로 보는 데 최적화된 장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 대사를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한국 시청자들은 대사가 오가는 상황, 분위기, 표정, 눈빛, 태도, 장소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의미를 파악하는 데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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