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습관을  바꿔야  할 때  :



 

 

 


 


바깥은 여름


 


                                                                                                      자본주의 사회에 살다 보니 우리는 누구나 " 소비자 " 가 된다. 위험한 발상처럼 보이겠지만   :   이 사회에서 돈을 주고 상품을 구매하는 행위는 횡단보도 앞에서 교통 법규를 지키는 준법보다 중요하다.

무단 횡단하는 사람은 경범죄로 처벌하면 문제는 해결되지만 소비자들이 대동단결하여 일시적으로 소비 행위를 중단하면 국가는 파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준법을 지키지 않는 행위보다 나쁜 쪽은 소비 행위를 멈추는 것이다. 소비자 주권이니 손님이 왕이라는 소리는 신소리가 아닌 것이다. 이렇다 보니 상품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상대적으로 구매 능력이 떨어지는) 계급은 천대받기 쉬운 구조가 바로 자본주의'다. 사람 대접을 받으려면 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돈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소비자로서의 덕목이 꽤나 부족한 사람에 속한다.

돈을 12월에 내리는 눈처럼 펑펑 쓰고 싶은 욕망은 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어서 사마귀 오줌 싸듯 찔끔찔끔 소비할 뿐이요, 이것저것 가성비 따지며 실속을 챙기는 소비자도 아니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F학점'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성능보다는 디자인에 혹하는 나쁜 소비 습성을 가지고 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을 신뢰하는 쪽이어서 책을 고를 때에도 같은 값이면 표지 디자인이나 타이포그래피'에 신경을 쓴 책을 선호하게 된다. 정성을 들인 레이아웃은 책을 만드는 사람이 그만큼 그 텍스트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람을 볼 때에도 마음보다는 얼굴을 먼저 보게 된다.

여기서 얼굴을 본다는 말은 미추를 평가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라 관상(비스무리한 것)을 본다는 뜻이다. 문학을 평가할 때에도 외모(스타일)을 중시해서 미문에 혹한다. 서정주가 운문으로 쓰인 최고의 미문이었다면 김훈의 << 칼의노래 >> 는 산문으로 작성된 최고의 문장들이었다. 그런데 이명박근혜 시대를 관통하면서 아름다운 문장에 대해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나쁜 나라에서 듣기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문장만을 구사하는 것은 문학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훼손하는 것은 아닐까 _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디오피아 난민 여러분 ! 과식은 건강에 해롭습니다아.     

부정부패로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에서 과식이 몸에 좋지 않으니 소식을 실천하자는 말은 현실의 괴리를 떠나서 당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다. 일제 강점기 때 낙엽을 태우며 커피 향을 생각하며 목욕물 데우는 일에 즐거움을 가지는 이효석의 탐미 정신을 볼 때마다 목욕이라는 사치조차 제대로 누릴 수 없었던 기층민의 곤경과 대비되면서 탐미가 당대의 고민과 연결되지 않으면 기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불행한 시대에 지나치게 낭만을 강조하거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행한 시대에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다.

내가 혜민이나 김난도 그리고 이기주 따위를 경멸하는 이유이다. 이기주 작가 같은 경우는 내 블로그를 구독한 경우이니 그가 성실한 이웃이라면 이 글을 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노파심 하나 투척하련다. << 언어의 온도 >> 는 쓰레기예요. 기분 나쁘라고 하는 소리이니 기분 나쁘셔도 됩니다(그러니까 왜 이웃을 맺고 그러세요).

언제부터인가 김애란의 예쁜 문장이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깔끔하게 다듬은 양파라고나 할까 ?  겉껍질만 제거하면 되는데 지나치게 한 겹, 두 겹, 세 겹을 제거하다 보니 백혈병 환자처럼 창백한 홀쭉한 마늘 모양의 양파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김애란 씨이 ~ ,  양파 껍질을 너무 깠어요. 문장 작법서에서는 불필요한 요소는 남김없이 제거해야 좋은 문장이 완성된다고 강조하지만  지나치게 청결한 문장을 보다 보면 가끔은 질리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불순(물)이 순도의 가치를 높여준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적당한 비문은 완벽한 정문(正文)보다 나은 경우도 있다.

문창과 문체가 고리타분한 이유이기도 하다. 언어의 본질은 순결이 아니라 오염이다. 언어는 외부 침입으로부터 끊임없이 오염되고 사라지고 다시 부활하기도 한다. 섣부른 판단이기는 하지만 이제 김애란에 대한 애정은 접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내 소비 습관을 바꿔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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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조 2017-12-1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애란의 문장을 두고 ˝너무 깔끔하게 다듬은 양파˝라고 하다니요? 세월호 비극 이후 작가의 글을 봤다면 이런 말 함부로 못할텐데, 아쉽네요. ˝피멍이 담긴 문장˝입니다. 세월호 유가족에게 그 문장, 그리고 소설은 그 시절에 무엇에 비할 수 없는 것이었겠죠.

곰곰생각하는발 2017-12-12 10:40   좋아요 0 | URL
이야기 소재로 세월호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함부로 비판하면 안된다는 발상은 지나치게 교조적인 것이 아닐까요. 비판의 영역에서 금기가 어디 있습니까 ?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군함도 비극도 함부로 비판하면 안되는 소재입니까 ?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작가의 기술이겠죠.

페스트 2017-12-1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어의 본질은 순결이 아니라 오염이다. 잘 차려진 언어는 오염의 무질서를 가려버리고, 잘 깍아진 언어는 순결한 오염으로 받들어지기 쉬운거 같아요. 피멍이 담겨진 언어가 있다 칩시다. 피멍의 순결함이라는 절제된 과잉이 오히려 염려되는데요. 오염된 세상을 들여다보는데 정돈된 언어로 보여지는 풍경은 어떠할까. 어 너무 공감되. 고개가 끄떡여지는 그런 언어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나는 문학의 언어는 자신도 오염되어 있어야 한다는 주의라서 그런지 정돈된 것을 보면 알레르기가 돋드라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2-12 12:30   좋아요 0 | URL
이기주 같은 책을 보세요. 용산의 노동자가 불에 타 죽고,
아이들은 세월호 밑바닥에서 숨을 참아야 하는 고통 때문에 손톱이 다 빠지도록
닫힌 철문을 긁고
물대포에 죽은 농민은 사인이 지병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말랑말랑한, 철저하게 계산된 정돈된 문장으로
아름다운 문장을 쏟아내는 것은 기만이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애란의 문장은 너무 정돈되었어요. 너무 청결하다고나 할까요. 채소는 적당히 다듬어져서 내놓아야 보기도 좋고 보관도 오래할 수 있지 아주 속까지 벌겨벗기면 깨끗하긴 한데 보기에는 좀 그렇죠..

수다맨 2017-12-14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애란 소설이 너무나도 잘 만들어진 ‘웰 메이드‘ 같아서 거부감이 들더군요. 김애란의 솜씨가 섬세한 수공예품(단편)을 만드는 데에는 빛을 발하지만 거대한 벽화(장편)를 그리는 데에는 언제나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14 16:55   좋아요 0 | URL
그렇죠. 잘만들어진 월메이드 제품 같다는 느낌. 프로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뭔가 좀 결여된 듯한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두근ㄷ근에서 크게 실망한 탓인지... 바깥은 여름도 그닥 크게 동요되지는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