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라 !



 


"인간은 강력한 공격 본능을 타고난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이다. 따라서 이웃은 그들에게 잠재적인 협력자나 성적 대상일 뿐 아니라 그들의 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웃을 상대로 자신의 공격 본능을 만족시키고 아무 보상도 주지 않은 채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이웃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웃을 성적으로 이용하고,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고 이웃을 경멸하고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이웃을 고문하고 죽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ni hupus.> 인생 경험과 역사에 대한 지식 앞에 누가 감히 이 주장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 (「문명 속의 불만」, 300쪽)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다. 존중할 만한 인물은 있지만 존경할 만한 인물은 없고, 스승도 없으며 멘토도 없다. 인간의 선한 의지를 다루는 영화나 문학 작품을 읽을 때마다 회의가 드는 이유이다.  
프로이트는 << 문명 속의 불만 >> 에서 희극작가 플라우투스의 말을 빌려서 "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 라고 말했는데,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인간은 인간에게 레더페이스1)이다. 예외는 없다, 괴물의 범주에는 < 나 > 도 포함되니까. 인간이라는 자부심도, 자긍심도 없다. 그렇기에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라거나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_ 라는 노랫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휴머니티(제스츄어)일 수는 있지만 리얼리티는 아니다. 하지만 " 참 " 이 가치 없는 개념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정의가 가치 있는 이유는 사실 " 거짓이 참보다 너무 자주 승리한다는 데 있다 ". 
모든 가치는 희소성이 좌우한다. 우리는 이제 불합리한 것이 주류를 장악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맞은 놈보다 때린 놈이 다리를 뻗고 잔다.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을 기독교 신도가 믿어야 하는 이유는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불합리)하다는 데 있다.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영화 << 밀양 >> 은 " 원수를 사랑하라 _ " 라는 서사의 실패에 앞서서 먼저 " 원수를 용서하라 _ " 라는 서사의 실패'를 다룬다. 원죄설에 기반한 기독교적 사랑의 본질은 " 타자(죄인)를 향한 용서 " 이다. 그렇기에 타자에 대한 용서 없이는 타자에 대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영화 속 주인공 신애는 " 신을 향한 사랑(愛) " 을 의미하는데, 그녀는 원수를 용서하는 행위가 실패함으로써 신에 대한 사랑도 실패하게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불합리한 정언 명령은 망상이라기보다는 환상에 가깝다. 환상이 반드시 오류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환상이 반드시 허위를 기반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누구나 백마 탄 왕자와 결혼할 거란 환상을 가지고 있지만 종종 이 가능성 없는 판타지는 현실에서 실현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환상은 망상과는 달리 반드시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원수를 사랑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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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더페이스 : 텍사스 전기톱 학살에서 사람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살인을 하는 살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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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7-09-25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다. ; 제가 선택하려던, 선택하고픈 가치관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선택한 가치관입니다.

환상이 반드시 오류인 것은 아니지만, 오류가 환상으로 남는 것은 싫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25 14:38   좋아요 1 | URL
프로이트가 언젠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 환상은 원망에 기초한다. 사실 공주가 백마 탄 왕자와 결혼하는 꿈을 꾸지는 않잖습니까. 가난한 평범한 여자가 백마 탄 왕자와 결혼하는 꿈을 꾸는 법이니까. 환상은 기본적으로 열망과 원망이 섞인 판타지이고, 반대로 망상은 항상 오류로 결말이 맺습니다. 항상... 망상은 항상 실현불가능하니까.

글샘 2017-09-25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수를 사랑하라...는 극단적 처지의 입장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저렇게라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틱낫한 스님도... 베트남전을 겪고 나서... 미국을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밑바닥까지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사랑이나 용서 이외의 방법은 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저는 할 수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해야 숨쉴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면, 인류의 비극이 아닐는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9-25 15:17   좋아요 1 | URL
저는 개인적으로 용서와 사랑은 조금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서와 사랑은 동급은 아니니깐 말이죠. 용서했다고 해서 사랑했다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용서는 사랑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긴 합니다만. 용서는 가능해요.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용서 2017-09-26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거짓이 참으로 전환하는데는 비경제성+비중심성 의 몸을 얻어야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본성을 의심하고 역류하는 데서 얻는 향락과 같은 것에 참이라는 가치를 두는 것이지요.
그런데 용서라는 것은 수사일뿐이지 않나요. 자신을 위해서 선택한 전략적 수사로 자꾸만 여겨지더라구요.
사랑이라는 게 진정 자신을 내어놓고 타인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던데, 이것도 수사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타인을 위한다는 건, 그건 오만이라고 생각되요.
타인을 위한다는 건, 자신의 착각과 환상이지 않을까요?
혹 사랑이라는게 수사일뿐이 아니라는 경우가 있다면 이런게 아닐까 싶어요.
타인에게 나를 강요하지 않는 정도.
이와 다른 여타의 사랑과 용서는 어쩌면 자기기만이라는.. 끔찍한 생각이 드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9-26 13:34   좋아요 0 | URL
영화 밀양도 용서라는 게 일종의 보여주기 위한 허세라는 점을 폭로하잖습니까.
특히 정치인들이 용서 운운할 때마다 어이가 상실되는 경험을 하게 되죠..

용서 2017-09-26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또 용서를 생각하다가 떠올랐는데요.
남을 향한 용서는 가당치 않고,
자기 자신을 향한 용서만이 허용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무엇을 용서하는가.
나의 분노, 결핍, 모자람, 강팍함 등을 용서하는 거지요. 그래야 거기(감옥)에 가두어져서 덜 옥죄어질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