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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봄밤과 오아시스
그 옛날, 이창동의 << 오아시스 >> 를 극장에서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지적 장애를 가진 남자와 지체 장애를 가진 여자의 사랑이어서 좋은 느낌 ?! 아니다, 굉장히 불쾌했다.
전작인 << 초록 물고기 >> 와 << 박하사탕 >> 을 좋게 보았단 터'라 일종의 배신감마저 들었다. 문제는 불쾌한 감정이 어떤 원유에서 비롯된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는 데 있었다. 혹시, " 불편한 마음 " 을 " 불쾌한 마음 " 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 불편한 영화와 불쾌한 영화는 하늘과 땅 차이'이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화를 다시 보았지만...... 여전히 불쾌했으며 여전히 그 이유를 알지 못해서 여전히 답답했다. 기껏, 내가 내놓은 변명이라고는 어떻게 살아 있는 나뭇가지를 벨 수 있는가 1) 였다. 나는 핏발 선 얼굴로 외쳤다. 나무가...... 아프잖아 ~
어이가 없는지 친구들은 빈정거리기 일쑤였다. 니미. 인물 났다, 인물났어 !!! 내가 봐도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 불쾌한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때 나는 동성인 설경구에게 감정이입을 한 것이 아니라 문소리 입장에서 이 영화를 이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간단하게 말해서 : 어떻게 항거불능에 가까운 여성(문소리)을 성폭행하려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문소리) - 라는 영화 설정이 남성중심적인 섹스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문제 제기였던 것이다. 이기적 욕망과 폭력을 사랑으로 환유하는, 후진 잰더 감수성을 가진 감독에게 불쾌했던 것이다, 물론 그때는 이 감정의 낌새를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
권여선 소설집 << 안녕 주정뱅이 >> 에서 첫 번째 단편 < 봄밤 > 을 읽고 났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영화 < 오아시스 > 였다. 주정뱅이와 앉은뱅이의 사랑(봄밤)은 지적장애자와 지체장애자의 사랑(오아시스)과 겹치지만 결은 사뭇 다르다. 단편소설 < 봄밤 > 에는 영화 < 오아시스 > 에서 보여지는 " 이기적 휴머니즘 " 이 없다. 오히려 영경과 수환의 사랑은 서로에게 이타적이다. 수환은 영경의 술 마실 욕망을 긍정하며, 영경은 수환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마음을 긍정한다. 그들은 서로의 욕망과 희망을 이해한다. 여자는 잠시 떠나고 남자는 죽음을 준비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최근에 읽은 최은영 단편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에 나오는 곰이라는 개 이야기'가 떠올랐다.
" 곰은 마지막 며칠 동안 너무 아파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 그런데도 곰아, 부르면 애써서 고개를 들고 꼬리를 치는 거야. 곰아, 밥 먹어, 말하면 곰은 안 아픈 척 밥에 코를 대고 먹는 시늉을 했어. 그런 곰 앞에서 울었어. 곰이 단순히 아픈 게 아니라 죽어간다는 걸 느꼈거든. 한 밤을 자고 나서 개집에 가니 곰이 사라졌더라. 그애가 사라지고 한 달 내내 울면서 학교를 다녔어. 울고 또 울었지. 내가 괜히 곰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 곰이 집을 나갔다고 생각했어. 자기가 아픈 걸 보고 내가 마음 아파하니까 죽으러 나간 거라고 생각하며 자책했지. 아무리 슬프더라도 내색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울지 말았어야 했는데. "
- 최은영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사랑하는 주인 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집을 떠나는 늙은 개처럼, 더 아픈 사람이 덜 아픈 사람을 위로한다. 수환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때에 맞춰 죽음을 맞이한다.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다. 돌이킬 수 없는 사랑만큼 어쩔 수 없는 사랑도 간절하다. 이 소설이 가장 낮은 자의 비극을 다루면서도 " 비극적 기품 " 을 유지하는 이유이다. 봄밤으로 시작해서 봄밤으로 끝나는, 회복불가능한 사랑 때문에 생강처럼 마음이 아려서 책을 덮었다. 오늘은 이 단편 하나면 족하다. 핑계삼아 저녁에 술 한 잔 해야겠다 ■
1) 지체 장애 여성이 달밤에 집앞에 있는 나무 때문에 집안에 나무 그림자가 생겨서 무섭다고 하자 지적장애 남성은 그 나무를 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