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인지 된장인지 모를 때 :
희망고문
존 워터스 감독이 연출한 영화 << 핑크 플라밍고 >> 를 봤을 때의 충격은 영화 << 스타워즈 >> 에서 다스베이더가 내가 네 애비다, 이눔아 ! _ 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능가했다. 사실, << 스타워즈 >> 에서 써먹은 " 출생에 얽힌 비밀 " 따위는 대한민국 막장 드라마에서는 흔한 서사적 장치'여서 신선하다기보다는 익숙한 충격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까이거 - 대충 - 막 - 후뚜루마뚜루 만든 것처럼 보이는 << 핑크 플라밍고 >> 는 문화적 충격에 가까웠다. 만듦새가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일 주일만 배우면 존 워터스만큼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당신에게 심어줄 만큼 영화적 완성도는 밑바닥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1)이다. 예술혼을 불태워 만든 영화도 박자가 틀리면 배탈이 나기 일쑤인데 날로 먹어도(대충 만들어도) 배탈이 나기는커녕 예술이 될 수 있다니 말이다. 드랙 퀸(여장 남자 게이)이었던 배우 디바인이 거리에서 개가 싼 똥을 실제로 먹는 엽기적인 장면 때문에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를 향한 삐딱한 퍽유 정신과 완도에서 잡힌 전복도 아니면서 전복인 척하는 볼티모어産 불온한 전복성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영화 미학에서 핍진성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에서 사실적 재현은 종종 윤리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실화를 다룬 영화에서 성폭행이나 살해 장면을 지나치게 리얼하게 재현할 경우 타인의 고통을 " 스펙타클한 볼거리 " 로 전락시키는 비윤리적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타인의 < 고통을 체험하는 것 > 과 < 고통에 공감하는 것 > 은 다른 차원이다. 전자는 스포츠(의 종류 : 극한 체험, 익스트림 스포츠) 영역'이지 에티카'가 아니다.
다음은 세월호 참사 이미지를 재현한 노동식의 < 희망고문 > 이란 설치 작품에 대한 최황 미술평론가의 반론 중 일부이다.
세월호의 침몰 장면, 그것도 마지막에 비현실적 희망으로 에어포켓이라는 개념이 전 국민에게 설명되던 그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을 넘길 수 없다. 이 이미지 내부에는 수장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작업을 본 관객들이 그들의 죽음과 관계된 수많은 장면들을 병렬하며 감상할 수밖에 없다. 이 이미지는 그저 그 죽음만을 향해 뻗어가는데, 작가의 의도나 다른 조형적 장치들은 '죽음의 이미지' 앞에서 맥없이 매몰된다. 이 작업의 문법이 포르노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포르노는 오직 하나의 이미지-감각만을 위해 발단과 전개는 물론 결말에 이르는 연출 전체를 의미 없이 깔아 놓는다. 포르노 내부에 놓인 장소, 시간, 출연자는 사실 '사정을 위한 이미지'를 위해 매장된 것들이며, 여기엔 아무 의미가 없다. 포르노의 장르 구분, 그러니까 어떤 포르노들이 특정 취향을 조준해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그 취향 지향의 목적 역시 사정을 위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전혀 특별하지 않다. 노동식의 작업은 세월호-죄책감을 향한 이미지일 뿐이라는 점에서 포르노다. - 재앙이 재현될 때, 재현이 재앙이 될 때
세월호의 침몰 장면, 그것도 마지막에 비현실적 희망으로 에어포켓이라는 개념이 전 국민에게 설명되던 그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을 넘길 수 없다. 이 이미지 내부에는 수장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작업을 본 관객들이 그들의 죽음과 관계된 수많은 장면들을 병렬하며 감상할 수밖에 없다. 이 이미지는 그저 그 죽음만을 향해 뻗어가는데, 작가의 의도나 다른 조형적 장치들은 '죽음의 이미지' 앞에서 맥없이 매몰된다. 이 작업의 문법이 포르노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포르노는 오직 하나의 이미지-감각만을 위해 발단과 전개는 물론 결말에 이르는 연출 전체를 의미 없이 깔아 놓는다. 포르노 내부에 놓인 장소, 시간, 출연자는 사실 '사정을 위한 이미지'를 위해 매장된 것들이며, 여기엔 아무 의미가 없다. 포르노의 장르 구분, 그러니까 어떤 포르노들이 특정 취향을 조준해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그 취향 지향의 목적 역시 사정을 위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전혀 특별하지 않다. 노동식의 작업은 세월호-죄책감을 향한 이미지일 뿐이라는 점에서 포르노다.
- 재앙이 재현될 때, 재현이 재앙이 될 때
최황은 < 희망고문 > 이라는 작품을 두고 " 포르노 " 라는 익스트림한 표현을 써가며 미술을 빙자한 폭력을 비판한다. 당신이 그의 맥락에 동의한다면 벽화 마을 프로젝트도 미학을 빙자한 폭력이며 포르노'라는 내 주장에 동의해야 한다. < 희망고문 > 이라는 작품이 타자-들의 비극을 전시했다면 < 벽화마을 > 도 가난을 전시한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가난 포르노'다. 당신은 달동네에 그려진 벽화를 구경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가난을 구경하며 허락없이 사진을 찍고 블로그에 사진을 남긴다. 사진 제목은 사람 냄새 가득한 정취 따위'이다. 내 비난에 대해 당신은 안희정처럼 선의 운운하겠지만
구경꾼의 볼거리가 불편하여 이사를 가서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게 되면 자신의 행동을 두고 쉽게 선의라고 우기지는 못할 것이다. 선거 때만 되면 후보자들이 시장을 구경하며 순대 먹는 장면을 연출하는데 그 이미지 정치가 역겨운 것은 서민에 대한 고민 없는 체험 때문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서민 행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익스트림 스포츠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미학에 있어서 " 리얼리티 " 는 양면성을 가진 기교'다. 내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완벽하게 재현한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룡에게 시큰둥한 경우이다. 또한 실사(實事)를 실사(實寫)로 대응한 < 희망고문 > 이 후진 이유이기도 하다.
때로는 쥬라기 공룡의 뛰어난 핍진성보다는 티라노(의 발톱, 심형래 감독)의 싼티와 똥을 꼭 먹어봐야 아는, 존 워터스의 막가는 정치성이 미학적으로 훌륭한 경우도 있다. 볼거리를 만드는 직업을 가진 이의 작업 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볼 권리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이 아닐까 싶다 ■
1) 필립 딕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영화와는 달리 등장인물들은 생활비에 쪼들리는 생활인이 대부분이다. 탐 크루즈를 생각했는데 우디 알렌과 마주친 경우. 읽다 보면 초라한 얼라들. 그러니까 쩨쩨한 쓰빽따끌의 SF 세계에 경악하게 된다. 맙소사, 초라한 에쓰에쁘의 세계라니 ! 딕 아저씨, 상상력은 돈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매끄럽지 못한 결이 묘하게 감동적이다. 그것은 담배와 위스키로 숙성한 썩은 음색과 가창력으로 박자를 아슬아슬하게 타는 탐 웨이츠의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