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향욱 사건이 9월 8일 이후에 벌어졌다면 :
만찬 앞에서 가난을 말한다는 것
검색창에 나향욱이라고 입력하면 개돼지'라는 연관 검색어가 자동적으로 노출된다. 쉼 없이 읽으면 " 나향욱(은) 개돼지 ! " 가 된다. 그가 그토록 멀리 내다버리고 싶었던 개돼지는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어, 사면발니처럼 몸에 달라붙어서, 이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문득 그는 개돼지(발언) 때문에 개돼지가 된 것이 아니라 원래 개돼지였기에 개돼지 발언을 한 것은 아닐까 _
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일로 변절한 조선인이 자기합리화를 위해 내놓은 것이 " 조선(인)은 우매하다 " 는 변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향욱 씨의 혐오는 타자를 향한 혐오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혐오가 되는 셈이다. 요샛말로 말하자면 셀프 - 디스인 셈이다. 영화 << 아가씨, 2016 >> 에 나오는 백작(조진웅 분)처럼 친일에 부역했던 조선인이 진짜 일본인이 되기 위해 일본인보다 조선을 더 경멸했던 예는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정희'다. 그는 천황에게 혈서를 써서 충성을 증명했다. 바람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눈보라가 휘날리는 만줄 벌판에서 천황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 오갱끼데스까. 와따시와 갱끼데스 ! " 출세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우리'에 침을 뱉는 행위, 박정희는 성공했고 나향욱은 실패했다. 향욱 씨는 나르키소스보다는 메두사에 가깝다. 나르키소스가 자기애에 따른 죽음이라면 메두사는 자기 혐오에 의한 죽음이니까. 하지만 자기애와 자기혐오는 서로 상반되는 감정이 아니라 뱀처럼 " 서로 얽힌 감정 " 이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일수록 자기혐오 1 도 강하다. 대상에 대한 기대치가 클수록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실망도 그만큼 큰 법이지 않은가. 나향욱을 지지할 생각은 1%도 없지만 사건에 연루된 경향일보 기자도 그리 떳떳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양비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불의에 대항한 정의로운 기자의 울분 따위로 보이는 것에 대한 반감 탓이다.
나향욱의 개돼지로 2주일 살아 보았다 : 링크를 걸어 둔 글에서 내가 공감하는 것은 " 그날 나 씨를 비롯한 교육부 공무원과 기자 등 총 5명이 한정식집에서 39만 원 어치의 음식과 술을 먹었다고 한다. 1인당 약 8만 원이다. " 라는 대목이다. 술값은 교육부가 지불했다고 한다. 이 말은 국민 세금으로 술값이 쓰였다는 뜻이다. 공직자와 언론인이 식사 비용으로 3만 원 이상을 대접받으면 과태료를 내야 한다는 김영란법(2016.9.8 이후 시행) 을 염두에 뒀다면 1인당 식사비 8만 원짜리 자리에서 구의역 컵라면 운운하며 주먹 불끈 쥔 기자 역시 떳떳하지는 않다는 소리'이다. 접대를 당연시하는 기자들의 태도는 언론이 썩을 대로 썩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실천요강에는 "(기자협회) 회원은 취재원으로부터 제공되는 일체의 금품, 특혜, 향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만약에 이 사건이 2016년 9월 8일 이후에 벌어졌다면 기자는 떳떳하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있었을까 ? 그들은 40만 원짜리 공짜 상차림 앞에서 이른 아침 구멍가게에서 산 1000원짜리 컵라면을 먹지도 못하고 죽은 청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2 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뜻은 아니다. 나향욱은 똥 묻은 개가 맞고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기자의 일이라는 것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기자들이 주먹 불끈 쥐며 정의 운운하는 것은 웃기다. 그동안 언론이 김영란법에 대해 유난히 까칠하게 반응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언론 종사자들이 김영란법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기자들은 접대만 받다 보니 접대 문화의 폐단을 잘 모르는 모양 3 이다. 신문사에서 추렴 문화를 장려할 때마다 웃기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클래식 공연 기획자가 기자들의 공짜 티켓 요구(혹은 할인 티켓)에 질려버려서 아예 " 할인 티켓 제로 선언 " 을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기자들, 공짜 너무 좋아한다 ■
1) 박애적 성격이 강한 사람은 자기애가 강한 사람보다 자기 혐오가 약하다.
2)
3) 접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중국집에서 간장 대접 안 준다고 거의 실명 비판에 준하는 비난을 쏟아냈던 기자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