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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양,유다 ㅣ 세계사 시인선 26
이연주 지음 / 세계사 / 1993년 3월
평점 :
품절
최후 사랑법
그가 나를 실망시킨다 나는 실망한다.
또 다른 그가 나를 모욕한다 나는 모욕당한다.
그와 또 다른 그를 나는 눈 속에 집어넣는다.
전조등 불빛을 올린 자동차 한 대가 내 눈동자
맨홀 속을 들먹거리다 간다.
그리곤 정적이 왔다, 그리곤
내가 아마 돌멩이를 걷어찼다.
돌멩이를 사랑하는 일은 쉽다.
걷어차도 배반 없는, 그러나
애정 없는 섹스.
원망에 찬 그와 또 다른 그가 내 눈 속
눈은 심장이니 내 핏덩이를 할퀸다.
어둡고 깊고 슬프다.
누군가의 잠꼬대와도 같은
최후 사랑법.
- 이연주 시집 속죄양, 유다
사랑은 타자를 동일자로 받아들일 때 발생한다. MBC 드라마 < 다모 > 에서 이서진이 슬픔에 빠진 하지원에게 " 아프냐 ? 나도 아프다. " 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동일자로서의 아픔을 본다. 사랑에 빠진 그는 타인인 그녀를 자신과 동일한 대상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 그가 나를 실망시 " 키면 " 나는 실망 " 하고, " 그가 나를 모욕 " 하면 " 나는 모욕당 " 하는 아픔을 느낀다. 반대로 동일자'라 믿었던 대상이 타자로 변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두려운 대상은 동일자라 믿었던 그가 알고 보니 " 그와 또 다른 그 " 였다는 데'에서 발생하게 되는 언캐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엄마가 딸에게 "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 ? " 라고 물을 때 언캐니적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이연주의 시 < 최후 사랑법 > 은 동일자라 믿었던 대상이 타자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는 내가 사랑하던 그가 아니라 " 그와 또 다른 그 " 다. " 그와 또 다른 그 " 는 더 이상 그가 아니다. 시인은 사랑하는 대상과의 타자화 과정(분리)을 견디지 못한다. 시인은 " 네 몰락이 내 가슴을 흔든다(몰락에의 사랑) " 고 고백한다. " 타인을 이해한다 " 는 것은 " 차이를 긍정한다 " 는 마음,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차이'다. 타인 = 차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 차이를 긍정할 때 비로소 동일자가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타인의 차이를 용서하지 못했고, 그 차이 때문에 두려워했다. 사랑의 반대말은 두려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