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 : 낫은 기역(ㄱ)보다는 니은(ㄴ)에 가깝다
낫은 기역(ㄱ) 자를 닮았지만 동시에 니은(ㄴ) 자도 닮았다. 낫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기역(ㄱ)으로도 보이고 니은(ㄴ)으로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항상 낫이라는 낱말을 떠올리면 기역 자보다는 니은 자가 먼저 연상이 되어서 어릴 때 "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 " 는 속담을 이해할 수 없었다. < 낫 > 과 < 기역(ㄱ) 자 > 가 닮았나 ?! 낫 놓고 니은(ㄴ) 자도 모른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의문.
사실, < 낫 > 이라는 사물의 형태와 < 낫 > 이라는 낱말은 모양새가 닮았다. 낫이라는 낱말이 낫이라는 사물을 닮았으니 상형 문자와 비슷하다고 말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런가 ? < 자신 > 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 자식 > 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게 된다. 자신이라는 낱말에서 종성 니은(ㄴ)을 이리저리 돌려놓다 보면 자식이 되니까 왠지 두 단어는 한배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인은 자신과 자식을 한몸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효(孝)를 바탕으로 한 가족주의는 자신과 자식을 동일자로 생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 나 > 는 < 너 > 다 ! 이런 말을 하면 어버이연합으로부터 종북 좌파 빨갱이 개 호로새끼'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하지만 피아(彼我)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합일의 욕망이 같잖다.
나는 나고 너는 너지, 어째서 나는 너가 될 수 있느냔 말이다. 서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가족 동반 자살이 한국에서 유독 많이 발생하는 이유도 그 심리를 파고 들면 자신과 자식을 하나로 연결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선택이다. < 나 > 가 불행하니 < 너 > 도 불행할 거란 생각. 자식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 따위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피아 구별이 불가능한 애착은 자신의 욕망을 대상(자식)에게 투사하게 만든다. 좋게 말하면 애착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집착이다. 상황이 이 지경이다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게 많다. 명절만 되면 가족끼리 싸우는 원인도 서로가 투자 대비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어쩌면 나에게 이럴 수 있니, 라는 원망에는 자식에게 투자한 비용에 비해 수익성에 낮다는 판단이 작용한 결과인 것이다.
이 얼마나 자본주의적 가족애'인가. 가족 드라마는 가족애를 찬양하면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이라고 말하지만 그 내면에는 투자 심리가 내포되어 있으니 웃긴 꼴이다. 아가페적 사랑과 헌신이 반드시 정답은 아니다. 자신과 자식은 서로 뜻이 다른 단어'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그 유명한 영화 << 사이코 >> 는 관객에게 부모와 자식 간 피아 구별이 불가능해지면 좆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준다. 이 영화는 자신(어머니)과 자식(노먼 베이츠)이 분리되지 못하고 하나가 될 때의 비극을 다룬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 가족끼리 왜 이래 ? >> 라는 드라마'가 떠오른다. 가족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한 무리한 요구들이 한국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
맹랑한 목소리로 가족끼리 왜 이래, 라고 되묻지 말자. 가족끼리 그래도 된다. 부패 지수가 높은 나라일수록 가족주의에 집착한다는 통계가 있다. 딴청은 능청스럽게 핵심은 간략하게. 영화 << 사이코 >> 에 대한 리뷰의 맺음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