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거나 말거나 ? :
볼 턱이 있나
내가 박근혜 따위를 욕하면 당신은 " 옳소 ! " 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사안에 대해서 남성 주류의 욕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 발끈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안철수와 당신은 다르지만 주류의 욕망과 당신'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을 사랑하며 열린 마음을 보이다가도 주류의 욕망을 건드리면 불쾌한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참,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다. 내가 이동진의 << 캐롤 >> 발언을 비판하는 데'에는 영화 << 캐롤 >> 에 대한 잘못된 해석 때문이 아니라 영화 << 캐롤 >> 에 대한 잘못된 태도 때문이었다. 쉬운 비유를 들어볼까 ?
대기업이 떡볶이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비열한 짓'에 속한다. 새누리 극렬 지지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지적'이다.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 << 캐롤 >> 를 이야기하면서 테레즈의 사랑을 동성애'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사랑(테레즈가 하필 사랑하는 사람이 여자였을 뿐이지, 이 영화는 보편적 사랑 이야기야 !) 에 방점을 찍었을 때, 나는 골목 상권(비주류, 소수성)마저 야금야금 갉아먹으려는 대기업(주류,보편성)의 야심처럼 보였다. 1년에 만들어지는 멜로드라마의 팔 할이 주류 이성애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쩌다 한두 편 만들어지는 퀴어 드라마를 굳이 주류로 편입할 필요가 있을까 ? 몇몇 사람이 이 사실을 지적하자 이동진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가 되묻는다. " 와이 ??! 대체 뭐가 문제지 ? "
특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인종, 젠더, 장애, 계급이 보이지 않는다. 좋은 예가 장애인의 보행권을 방해하는 거리 턱'이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보행권을 방해하는 거리 턱을 인식하지만 비장애인은 볼 턱이 없다. 비장애인에게 거리 턱은 보행권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예로 흑인 여자는 거울에서 " 흑인 여자 " 를 보지만, 백인 여자'는 거울 속에서 백인 여자가 아니라 단순히 " 여자 " 를 본다. 전자는 흑인'이라는 결핍을 인식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주류 백인 사회에 속한 백인의 피부색은 결핍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베트남 사람은 거울 속에서 " 베트남 사람 " 을 보지만
한국인은 굳이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배덕자(背德者)여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은 주류이기 때문이다. 주류 백인 사회'에서 백인 여자가 거울 속에서 < 보편적 여성 > 을 인식하는 시선과 주류 남성(혹은 이성애) 사회'에서 이동진이 거울 속에서 < 보편적 사랑 > 을 인식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모두 주류의 주체에 포섭되어 안이하게 주류의 욕망을 대변할 뿐이다. 사람은 거짓을 말하면 웃지만 진실을 말하면 화를 내는 짐승이다. " 보편성 " 이란 주류 기득권이 만든 허울이자 변명이다. 가끔 자신을 양성평등주의자처럼 행동하면서 정작 꼰대처럼 생각하는 인간을 볼 때마다 웃기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마치 좌측 깜빡이를 켠 채 우회전하는 자동차를 닮았다. 그럴 때는 이런 말이 제격이다. 마침 오늘이 세계 여성의 날이다. 삐딱하게 한 마디 하련다. " 야, 이 아저씨야. 운전 똑바로 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