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자본을 읽다   





 

새것(new)은 낡은 것(old) 때문에 고통받는다

 

- 맑스, 자본론 서문 中

                                       너무 당연해서 멍청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 도서관에 가면 冊이 있다(많다). 冊을 읽기 위해 도서관에 간다. 하지만 꼭 읽어야 할 책을 읽기 위해 도서관에 가는 것은 아니다. 읽어야 할 책은 대부분 사서 읽으니까. 그러다 보니 목적 없이 도서관에 간다, 생각없이 코를 파는 것처럼 !  곰곰 생각하기 위해서 코를 파는 건 변태 같잖소.  그곳에서 21세기가 간절히 원했던 조용필이 그토록 싫어했다던 산기슭의 하이에나'가 된 나는 중뿔나게 이곳저곳 어슬렁거리게 된다. 인문학 코너에서 잠시, 철학 코너에서 잠시, 문학 코너에서도 잠시, 심지어는 정기간행물 앞에서도 쓸데없이 잡지나 뒤적거린다. 세상에나, 시바. 무슨 놈의 잡지가 이렇게나 다양하나 ? 나는 월간지 << 건강한 항문 >> 을 발견하는 순간 괄약근에 힘을 주었다. 대장항문학과에서 발간하는 잡지였다.

나 같은 치질 환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유익한 정보가 가득한 잡지였다. 특히, 항문의 다양한 생김새를 그림으로 보여준 챕터는 압권이었다. 국화 무늬 항문, 배추 무늬 항문, 방동사니 무늬 항문. 아, 이토록 많은 항문 앞에서 나는 웃었다. 항문은 꽃이로구나. 앞으로 케겔 운동을 열심히 해서 멋진 괄약근으로 돌아오리라. 괄약근 꽉 조이며 주먹 불끈 쥐었다. 축 늘어진 배추 무늬를 도톰한 국화 무늬'로 새기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앉아서 책은 읽지 않고 이 코너 저 코너 돌아다니다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결국 존 코너(맙소사, 도서관에서 미래의 지도자 존 코너를 만나게 되다니 !) 까지 만나게 된 주된 원인은 책이 많다 보니 무슨 책부터 골라야 할지 감이 안 오기 때문이다.

 

이 책도 한 번 찔러보고 저 책도 한 번 찔러보다 보면 어느 순간 아, 아아. 다 읽지도 못할 책, 찔러나 보는 수준에 그치게 된다.  도서관 책상 위에 읽을 책을 부랄산맥만큼 높이 쌓아두었지만 정독(精讀)하는 책은 거의 없을 뿐더러 완독(玩讀)하는 책도 별로 없다. 그러니까 도서관에서 읽는 책은 모두 1,3,5,7,9......  띄엄띄엄 읽는 수준에 그친다. 그때, 문득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생각. 도서관과 자본주의'는 서로 닮았다 ! 자본주의는 선택을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자본주의 체제 이전은 < 둘 중 하나 : 흰 고무신과 검정 고무신 > 를 고르면 되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 열에 하나 : 흰 고무신, 검정 고무신, 비단 구두, 백구두, 하이힐.... > 를 고르는 시장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 백이면 백 >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 체제인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는 너무 많은 신발 앞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물건이 많으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행복한 고민일 것 같지만,

사실...... 물건이 많다는 것은 오히려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실패할 확률도 높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상품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고른 상품이 반드시 마음에 든다는 보장은 없다. 같은 가격 대비, 더 근사한 신발을 발견하게 되면 후회가 몰려온다. 설령, 마음에 쏙드는 신발을 10% 세일 가격으로 샀다고 해도 다음날 90% 폭탄 세일하는 가게가 나타나면 만족은 후회'로 변한다. < 선택의 자유 > 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만족을 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주게 된다. 내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정독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까닭은 도서관에 있는 책이 모두 시시껄렁한 책이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 많은 책이 꽂힌 공간 안'에서 책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기에 그렇다. 읽을 책은 많은데 하나만 읽어야 할 때 생기는 선택 장애'가 독서 행위'를 방해하게 된다. 결국에는 도서관을 나오면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읽지 않은 것도 아닌 상태가 된다. 자본주의라는, 세계화라는 시장경제'는 거대한 도서관'이다. 수천 켤레나 되는 신발 진열장 앞에서 우리는 감탄과 함께 이런 소리도 한다. 이런, 신발 !!! 풍요로운 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사회'는 아니다. 세상의 수많은 신발이 당신을 불행하게 만든다. 세상에나, 이런 개같은 신발이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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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5-07-1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제 남편이 저더러 선택장애래요 ㅜㅜ 뭐 하나 고르려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신경 안 쓰고 대충 사고 적당히 넘어가는 멋진 성격을 가졌다면 좋으련만

곰곰생각하는발 2015-07-14 14:24   좋아요 0 | URL
저도 선택 장애`를 가지고 있씁니다. 그래서 아예.... 포기를.. 예를 들면 뭐 먹을까 ? 라고 할 때 선택에 따른 실망이 두려워 저는 무조건 타인에게 고르게 합니다... 훅훅,,,,

samadhi(眞我) 2015-07-14 14:25   좋아요 0 | URL
상대방에게 짐을 떠넘기는 거 옳지 않아요 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5-07-14 14:2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네에. 후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