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그녀, 정희진
"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 는 속담은 " 열에 아홉... " 이라는 관용구'보다 예측 확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과학적 사고에 의하면 전자는 확률이 1/10 이고 후자는 확률이 9/10 이니깐 말이다. 하지만 "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 에서 < 열 > 이 " 고양이들 " 을 지시하는 군집 명사'이고, < 하나 > 가 그 군집에 속하는 독립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 하나 > 와 < 열 > 은 계통과 계열이 모두 같은 한통속이기 때문에 고양이(단수)이 쥐를 잡는다면 고양이들(복수)도 쥐를 잡는다는 사실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 열 > 이 계통과 계열이 동일한 한통속으로 결속된 군집이 아닌 경우라면 사정이 다르다. 호랑이, 사자, 여우, 늑대, 삵, 하이에나 따위로 이루어진 " 열에 아홉 " 이 쥐를 잡아먹는다고 해서
나머지 < 하나 > 도 쥐를 잡는 짐승'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 하나가 " 쥐를 무서워하는 코끼리 " 라면 ?! 확률 < 1/10 > 이 < 9/10 > 보다 정확할 수 있다. 내게는 윤대녕 소설이 그렇다. 신경숙은 윤대녕 소설을 두고 " 내밀하고 매혹적이다...... 윤대녕스러운 것에 이미 얼마간 중독이 되어 있는 이들에게 중독자가 되길 잘했다는 은근한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 라는 출판사 띠지 광고용 덕담을 선물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 윤대녕스러움 > 은 < 윤대녕 스타일 > 이 아니라 < 게으른 자기 표절 > 에 불과했다. 낯선 남자와 낯선 여자가 낯선 장소에서 만나 관계를 맺는, 여성을 남성의 외로움을 해결해주는 캐릭터로 인식하는 진부함에 넌더리가 났다. 윤대녕 소설에서 낯선 여자는 권태에 빠진 남자에게 " 박카스 " 같은 존재다, 오.... 자양강장제'시여 !
이 서사가 반복되다 보니 "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 수준을 벗어나 " 안 봐도 뻔히 아는 "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더군다나 여성이 어머니를 닮아서 모성애의 부재를 자극할 때는 할 말을 잃는다. 이 뻔한 클리셰를 그는 왜 매번 반복하는 것일까 ? 윤대녕의 << 관광버스 소설 >> 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그는 소설가'라는 직업 대신 여행사나 차렸어야 했다. << 페미니즘의 도전 >> 에서 정희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제까지 여성은 남성의 외로움을 해결해주는 사람들이었지,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었다. ( 89쪽 ) " 거칠게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유통되는 < 모성애 신화 > 는 불알후드(brotherhood)가 여성을 착취하기 위해 만든 서사다. 왜냐하면 < 어머니 > 라는 단어에는 " 자기 희생 " 이라는 사회적 함의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코미디 영화 << 수상한 그녀 >> 에서 스무 살 꽃처녀인 오두리로 변신한 오말순은 손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 회춘의 맛 " 을 포기한다. 그녀는 스무 살 처녀를 포기하고 칠순 노모로 돌아온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모성의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한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는 "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 라는 통속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우고 자라서, 이 문장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 약하다 > 와 < 강하다 > 라는 형용사는 < 불완전하다 > 와 < 완전하다 > 를 에둘러 표현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은 " 하자 있는 여자 " 다. 그렇다고 해서 불알후드가 결혼한 여자를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불알후드는 자신에게 필요할 때만 어머니를 호명할 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뭉뚱그려서 < 아줌마 > 라고 부른다. 아줌마'라는 단어가 " 아주머니 " 를 낮추어 부르는 소리이니, 계급 강등'인 셈이다. 이처럼 어머니 찬양과 아줌마 경멸'은 한국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이중적 잣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결혼한 여자'를 높여 부르는 < 여사 > 라는 단어도 조롱으로 사용되니, 여성 입장에서는 이 " 불알후드의 시발스러움 " 을 마땅히 하소연할 데가 없다. 여성이 외치는 메아리'는 태백산맥보다 높다는 부랄산맥 앞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태산이 높다 하되 부랄보다 높을쏘냐. 아, 부랄... 산맥 ! 정희진이 지적한 대로
"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말은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서울 사는 사람의 시각에서 구성된 것이다. 중립적인 말.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 같은 책, 72쪽 ) "
"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말은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서울 사는 사람의 시각에서 구성된 것이다. 중립적인 말.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 같은 책, 72쪽 ) "
좋은 예가 < 유관순 누나 > 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여성인 경우에도 유관순은 " 유관순 누나 " 이지 " 유관순 언니 " 가 아니다.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미혼녀라는 말은 있지만 미혼부라는 말은 없다, 여성 상위라는 말은 있지만 남성 상위라는 말은 없다, 정숙한 여성이라는 표현은 있지만 정숙한 남성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차별적인 언어 습관인 셈이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언어'는 대한민국 50대 중산층 성인 남성의 목소리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한국어는 남성 언어'이지 여성 언어'가 아니다.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 오양 비디오 >> 와 << 백양 비디오 >> 에서 주목할 점은 " ~ 양(孃) " 이라는 호칭의 사용'이다. 왜 언론은 가치 중립적인 " ~ 씨(氏) " 를 사용하지 않고 성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호칭인 " ~ 양 " 을 사용했을까 ?
< ~ 양 > 이라는 호칭이 miss라는 뜻으로 통용된다는 점에서 가치 중립적이어야 할 언론이 오히려 앞장서서 대중의 포르노적 상상을 자극했다. 불 난 데 신나 뿌린 꼴이라고나 할까 ? 내가 아는 한, 이러한 지적을 한 지식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은 한국 지식인 사회조차 남성 언어의 폭력성에 무감각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부자가 행복한 사회보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한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이고 비장애인이 행복한 사회보다 장애인이 행복한 사회가 더 건강한 사회'다. 마찬가지로 남성이 행복한 사회보다 여성이 행복한 사회가 보다 더 건강한 사회'에 속한다. 영화 << 수상한 그녀 >> 는 여성을 공에 비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10대는 농구공이다. 농구공을 잡기 위해 수컷들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20대는 럭비공이다. 마찬가지로 수컷들이 개떼처럼 달려든다. 농구공과는 달리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에서 더 매력적이다. 하지만 30대는 탁구공으로 추락한다. 탁구공을 쫒는 벌떼와 개떼는 없다. 40대는 골프공이다. 잡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멀리 쳐낸다. 그리고 50대는 피구공이다. 보면 피해 다닌다. 이 자조섞인 농담은 한국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가 나쁜 점은 이러한 태도를 긍정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어머니'는 어느 공에 비유해야 하는지 말이다. 피구공 ? 골프공 ?! 탁구공 ?!! 프란츠 파농은 " 흑인은 백인의 타자이면서 동시에 흑인의 타자 " 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여성 또한 남성의 타자이면서 동시에 여성의 타자'이다. 이 견고한 벽부터 깨야 한다.
그렇기에 정희진의 << 페미니즘의 도전 >> 은 남성보다는 여성이 먼저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에서 정희진은 남성에게 이해를 촉구한다기보다는 여성에서 연대를 제안한다. 시작은 손을 잡는 데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