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와 페미니즘
한 여자가 시구자로 등장한다. 평범한 외모‘다. 시구자의 공은 늘 그렇듯이 어색한 궤도로 포수 글러브에 들어간다. 그때 한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민다. 청혼‘이다. 소박하지만 따스한 포옹, 관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한다. 그녀는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였다. 이별을 통보하자 앙심을 품은 옛 남자는 무섭게 변했다. 여자는 남자가 마구 휘두른 칼날에 찔려 거리에서 시름시름 죽어갔고, 그때 그녀를 도운 사람‘이 지금 야구장 그라운드에서 여자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였다. 구단이 병실에서 사경을 헤매다가 건강을 되찾은 팬을 위해 준비한 작은 이벤트'였다.
몇몇 여성 연예인의 홍보용 패션쇼'로 전락한 한국 프로야구 시구 문화와 비교하면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시구 문화에는 없지만 미국 메이저리그 시구 문화에는 있는 것, 그것은 바로 < 서사 > 다. 중요한 것은 몸매가 아니라 사연이 아닐까 ? 과연, 클라라를 보기 위해 야구장을 찾는 사람이 있을까 의문이다. kbo는 프로야구를 “ 온가족이 함께 즐기는 스포츠 ” 라고 선전하면서 정작 야구장에서 소비되는 것은 < 여성 몸의 상품화 > 다. 그 짓이 꽤 노골적이어서 불쾌하다. 감동은 없고 섹시만 남은 시구 문화,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 ? 꼴사나운 레깅스 시구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야구장 문화를 보면 곳곳에서 여성의 몸을 상품화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치어리더 문화가 대표적이다.
율동과 떼창 따라 하기‘는 학원 문화에 속한다. 내가 어느 순간부터 야구장’에 가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응원 문화‘다. 다 큰 성인 남자에게 율동과 떼창을 강요하는 “ 몰/아/일/체 ”에 진저리가 난다. 남성 욕망을 자극하는 예쁜 치어리더가 무대 위에서 “ 날 따라 해봐요, 요렇게 ! 날 따라 해봐요, 저렇게 ” 라고 말하면 관중은 " 널 따라 해보마, 요렇게 ! 널 따라 해보마 저렇게 ! " 한다. 줏대가 없으니 지랄이 풍년이다. 야구는 무엇보다도 경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 스포츠'다. 왜냐하면 수시로 관중석으로 날아드는 공과 방망이'가 위험한 무기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에 맞아 중태에 빠진 경우도 있으며 부러진 날카로운 방망이가 관중석으로 날아가 박힌 적도 있다. 날 따라 하다가 중태에 빠질 수도 있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응원 문화를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성 볼보이도 남성 관음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그라운드 밖에서는 치어리더가 상품으로 내걸리고, 그라운드 안에서는 볼걸'이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닌다. 말장난을 치자면 “ 볼걸 ” 은 남성 관음증을 충족시키기 위한 “ 볼거리 ” 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왜 볼걸이 야구 유니폼 대신 미니스커트를 입고 그라운드에 출입하는지 궁금하다. 야구라는 스포츠’는, 축구나 농구와는 달리, 경기장 안에서 땀을 흘리며 뛰는 선수는 물론이고 감독까지 선수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 양복 입은 야구 감독을 본 적 있나 ? 볼보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메이저리그는 심판에서 새 공을 주고, 배트를 수거하는 볼보이’도 팀의 일원으로 간주해서 유니폼을 입는다.
벤치에서 떨어진, 어두컴컴한 구석에 의자 하나 놓아주는 (몸매 보고 뽑는) 한국 볼걸와는 달리, 미국 볼보이는 벤치 안에서 이것저것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가까이서 선수를 볼 수 있으니 볼보이는 무보수 열정 페이‘인 셈이다. 여성의 몸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이런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은 커서 장동민 같은 비뚤어진 여성관을 가진 남자로 성장한다. 요즘은 여성들이 사사건건 남성 권위에 도전한다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아직 멀었다. 더 지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