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존재의 집
인간은 말한다(spricht). 우리는 깨어 있을 때도 말하고, 꿈속에서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말한다. 우리가 아무 말도 소리 내지 않고 경청하거나 읽을 때에도 우리는 말하며, 심지어 특별히 경청하거나 읽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떤 일에 몰두하거나 한가로이 여가를 즐길 때에도 우리는 말한다.
ㅡ 하이데거, < 언어로의 도상에서 > 中에서
쉬운 표현을 어려운 문장으로 꾸미는 게 쉬울까, 아니면 어려운 표현을 쉬운 문장으로 꾸미는 게 쉬울까 ? 두말할 것도 없이 어려운 표현을 쉬운 문장으로 꾸미는 것보다 쉬운 표현을 어렵게 꾸미는 게 더 쉽다. 조용필이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라고 노래했을 때, 이 표현은 남자의 복잡한 심사'를 매우 선명하게 그려낸 탁월한 문장이었다. 셰익스피어 또한 인간의 뒤틀린 심사'를 간결하게 묘사할 줄 아는 작(사)가다. 햄릿의 성격은 딱 잘라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배우 최민식옹께서 햄릿에게 " 누구냐, 넌 ? " 이라고 반문할 것이 분명하다. 사랑이 넘치는 인물 같다가도 느닷없이 잔인하며, 나약한 순간에 불같이 강한 성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싸움닭 기질이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막상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겁쟁이로 추락한다.
그렇기에 햄릿은 누군가에 의해 특정 유형으로 정의 내리는 순간 상대방으로부터 앙칼진 말방구 공격을 받기 십상이다. 햄릿을 결단력 없고 나약한 인물이라고 정의 내리면, 햄릿이 결단력 없고 나약한 인물이 아니라는 증거를 들이대며 딴지를 걸 사람은 많다. " 닝기미, 조또 ! 결단력 없고 비실비실한 놈이 그 수많은 사람 죄다 죽였겠어, 그려, 안 그려 ? " 사실, 연극 << 햄릿 >> 은 " 환각과 속임수와 광기로 짜인 줄거리'는 결국 주인공들이 없어서(모두 죽어서) 중단된 " 연극이다. 임성한 드라마 << 오로라 공주 >> 에서 등장인물이 이유없이 죽고, 쓸데없이 죽고, 어이없이 죽고, 황당하게 죽고, 심지어는 떡대 : 드라마 속 개 이름 마저 죽어서 시청자에게 " 막장 드라마 " 란 거센 항의를 받았다면,
<< 햄릿 >> 도 같은 이유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 오필리어도 죽고, 플로니어스 재상도 죽고, 거투르드 왕비도 죽고, 클로디어스 왕도 죽고, 레어티즈도 죽고, 햄릿도 결국에는 죽는다. 주요 등장 인물들이 모두 죽었으니 감독 입장에서는 난처한 상황이다. 쉽게 말해서 어...... 동열이고 없고, 어..... 종범이도 없는, 감독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요즘 해태(기아) 잘하고 있나 ? 이런 마당에 햄릿이 결단력 없고 나약한 인물이라고 ?! 그런데 < 햄릿 > 을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하면 오히려 더 심한 앙칼진 말방구'가 예상된다. 한마디로 햄릿은 굉장히 복잡한 인물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복잡한 성격을 " to be or not to be " 로 해결한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쉬운 단어 활용'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이 난다.
나랏 말쌈이 듕국과 달라 꽃 둏고 여름 할 때 서로 사맛디 아니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백성도 to, be, or, not 정도는 알지 않은가 ? 이토록 복잡한 인물을 이토록 쉬운 단어로 정의를 내리다니, 놀랄 노 자'다. 야구 선수는 공과 방망이를 가지고 놀고, 시인과 소설가는 언어를 가지고 논다. 철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 ㅡ 學 " 은 대부분 언어를 다룬다. < 신학 > 은 텍스트를 독해하고 숨은 뜻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해석학'이다. 해석학은 언어의 은유를 파고들며, 분석철학은 언어의 규칙을 증명하려는 수작(秀作)이고, 프랑스 철학은 언어의 다의성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이 지점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철학과 언어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독일 현대 철학의 거성'이지만 인간성은 그닥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히틀러에 빌붙어서 승승장구한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이 철학 교수는 1933년 5월 1일 나치당에 입당한다. 당원 번호는 3,125,894번'이었다. " 하일, 히틀러 !!! " 히틀러가 게르만 혈통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건강한 육체를 강조했다면 하이데거는 게르만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독일어를 위대한 민족어'로 내세웠다. 그는 그리스어와 독일어를 모르면 철학을 결코 배울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에게 모어'는 존재의 집이었다. 타 언어'를 사용하는 철학자가 들으면 부아가 날 만한 소리'다. 하지만 독일 사람인 그가 독일어로 사유의 영역을 확장한 것은 비판받을 일은 아니다. 모국어에 대해 무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 누가 돌을 던지랴.
오히려 비판받아야 될 사람은 자기 나라말은 버려둔 채 하이데거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이다. << 문학의 아토포스 >> 를 쓴 진은영은 시인이면서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니, 그 누구보다도 언어를 가지고 노는 직업군인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은 온통 내 나라말이 아닌 다른 나라말이 넘치고 넘친다. 홍대 두리반'이나 쌍용 투쟁 현장을 바라보며 문학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지만 그닥 와닿지 않는다. 책 구성도 기막히다. 하인리히 하이네 Heinrich Heine의 << 독일. 겨울동화 >> 라는 독일 시 인용으로 첫 페이지'를 시작하더니, 이 책 마지막 페이지는 신형철의 발문이 삽입된 " 나는 여행을 쉴 수가 없으니 인생을 그 찌꺼기까지 다 마시련다(앨프리드 테니슨, < 율리시스 >) " 라는 인용구로 매조지한다.
노동자가 원하는 것은 < 따순 밥 > 인데 이 책은 정작 < 빵과 버터 > 에 대해 말한다. 그녀의 걱정이 군걱정으로 들리는 이유이다. 이 책이 랑시에르 입문서'라면 비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 노동 현장을 걱정하며 소통과 연대를 강조하면서 정작 엉뚱한 소리를 하면 비판받아야 한다. 그녀가 자주 말하는 " 시인적 모럴 " 이라는 표현이 어색한 이유는 무엇일까 ? " 시인적 모럴 " 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다면 대통령적 모럴, 검사적 모럴, 이발사적 모럴 따위도 자연스러워야 한다. 접미사 < -的 > 은 가급적, 국가적, 기술적, 문화적, 비교적, 사교적, 전국적 따위로 활용된다. 그래야 자연스럽다. 진은영의 시인적 모럴'이 어색한 이유이다. 끝까지 읽었으나 그 의중을 끝까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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的 , 너는 누구냐 http://blog.aladin.co.kr/749915104/7499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