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사랑 : 상처받은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러브스토리
ㅡ 짙은 선홍색
아그파'나 후지'는 망하더라도 < 코닥 > 은 살아남으리라 생각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외로워도 슬퍼도, 디지털 카메라가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를 잡아먹는 날이 와도 코닥 필름은 건재하리라 생각했다. 코카콜라 없는 " 청량 " 음료를 생각하면 " 처량 " 한 마음이 들 듯, " 코닥 " 없는 세상은 " 그닥 " 생각하기 싫었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의 역습에 제일 먼저 망한 쪽은 업계 1위인 코닥'이었다. " I will be back...... " 이라는 인사도 없이 코닥은 " 꼴까닥 " 침몰했다. 다음은 넘버 투인 아그파'가 적자에 허덕이다가 파산 신청을 했다. 아, 배고파 ! 21세기, 그러니까 2000년 이후 필름은 사양 산업이었다. 영화판도 마찬가지'였다. 필름 영화는 디지털 영화 앞에 목이 잘렸다. 모든 영화는 디지털化가 진행 중이고 이제는 완성되어 가는 중이다.
디지털化에 대한 저항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캔 로치'와 친구들이 촬영 현장에서 필름으로 영화를 찍기는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필름으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이제 옛일이 된 모양이다. 신문기사 모퉁이에 캔 로치에 대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는데 그가 필름으로 영화를 만드는 작업을 고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요즘에는 영화 현장에서 필름을 사용하지 않다 보니 필름 편집용 테이프를 구하기 힘들다는 웃지 못할 일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디지털이 필름을 날름 잡아먹어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꽤 많다. 선견지명이라고 할까 ? 로저 코먼이 만든 영화사 < 뉴월드픽쳐스 > 는 원래 < 뉴월드필름 > 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가 필름이라는 단어는 언젠가는 영화'가 다른 것으로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뉴월드픽쳐스'로 이름을 바꿨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무엇으로 영화를 만들건 간에 결과는 그림 picture이 될 테니깐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그는 < 뉴월드픽쳐스' > 를 팔고 후에 < 콘코드필름' > 을 만들었다. 앞뒤가 안 맞는 소리. 내가 다녔던 일터는 필름 창고'였다. 보스는 충무로에서 자수성가한 양반이었다. 술만 마셨다 하면 눈보라아아가 휘이날리이이이는 바람찬 충무로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영화 제작자 겸 영화 수입업자로 성공한 이야기'를 회상에 젖어 말하고는 했다. 그닥 감동스럽지는 않았다. 그가 제작한 영화와 수입한 외화는 팔 할이 형편없는 영화'였다. 큰 돈을 굴릴 수 없으니 작은 영화를 제작할 수밖에 없었고 그럭저럭 본전은 때리는 싸구려 에로 영화만 수입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 어느 날 토요일이었다. 보스는 내게 필름 창고'를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맙소사, 그날따라 데이트가 있어서 옷에 신경을 썼는데 필름 저장고 정리'를 하라고 하니 화딱지가 났다.
말이 좋아 필름 보관소'이지 연탄 창고나 다름없었다. 보스가 눈보라가 휘이이날리는 바람찬 충무로에서 그동안 제작한 영화들과 수입 외화는 100편이 넘었는데 이걸 분류하고 필름 세척하는 작업은 반나절만에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랴. 목구멍이 포도청인 걸 ! 그때 필름 창고에서 발견한 필름이 << 짙은 선홍색 >> 이었다. 감독 아르트로 립스타인, 루이 브뉘엘의 서자. 조도로브스키와 함께 멕시코 영화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 보스가 이 영화를 사들고 온 이유는 간단했다. 미국 화폐 달러'에 비해 맥시코 화폐 페소(peso)가 저렴하니 싼 맛에 산 것이다. 나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무엇에 홀린 듯 이 필름을 시사실 영사기에 걸어 돌려 보기 시작했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회사에서 철야 당직 근무를 할 때 심심해서 보았지만
일하다 말고 컴컴한 시사실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고 하면 그럴듯한 " 그림 " 이 나오니 그리 한 것이다. 미리 양해를 부탁드린다. 영화는 웃으면서 잇힝, 하며 코 팔 정도로 재미있는 영화가 아니라 아, 하다가 결국에는 오오, 하게 되는, 똥 쌀 정도로 훌륭한 영화'였다. 모 이웃이 표현한 말을 빌리면 맛이 간 루이 브뉘엘이 << 보니 엔 클라이드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 을 찍은 것 같았다. 아르트로 립스타인 감독이 루이 브뉘엘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했으니 정확한 지적'이다. 이 작품은 << 허니문킬러 / 1969년 >> 를 리메이크한 영화'였다. 당시에는 이 영화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최근에 보게 되었는데, 한편 웅이네 가족은.....
ㅡ 허니문 킬러
<< 짙은 선홍색 >> 이 정신줄 놓은 브뉘엘이 만든 영화'라면 << 허니문킬러 >> 는 시네마 베리떼 감독이 휴대하고 다니는 카메라로 찍은 고다르 영화'였다. 사악한 간호사 역을 연기한 샐리 스톨러'는 안나 카리나의 망가진 모습처럼 보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는 누벨 바그와 시네마 베리떼를 반반 섞은 듯한 느낌을 주는데, 처음에는 마틴 스콜세즈가 감독하기로 했으나 실제로 도입부를 찍기도 했다 제작사와 대판 싸운 후 감독 권한은 레너드 캐슬'에게 넘어갔다. 그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시나리오 작가'였다. 영화 감독 경험이 전무한 초짜'였다. 하지만 " 초짜 " 라는 우려와는 달리 영화는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만든 걸작'이 되었다.
이 영화는 레너드 캐슬이 처음 만든 영화이자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처음 만든 영화이자 마지막 영화이며 동시에 걸작 반열에 오른,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으로는 찰스 로튼의 << 사냥꾼의 밤 >> 과 허크 하비의 << 영혼의 카니발 >> 이 있다. 카메라가 대상을 잡는 위치'는 생동감이 넘치고 명암 대비가 강렬한 흑백 촬영은 앞서도 지적했듯이 시네마 베리떼的 날(것) ㅡ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장도리 살인 장면은 << 올드보이 >> 장도리 장면'보다 좋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점은 마사 벡'을 연기한 셀리 스톨러'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페르소나'다. 질투에 눈이 멀어서 어린 아이까지 죽인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한다. " 상처받은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러브스토리 " 라고 말이다.
이 말이 묘하게 심금을 울린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우는 연기'보다 어려운 연기는 웃는 연기'이고, 웃는 연기보다 어려운 연기는 무표정한 연기'이다. 관객이 배우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복잡한 텍스트를 읽을 때, 그 배우는 훌륭한 배우'다. 마사 벡을 연기한 셀리 스톨러'는 적어도 이 영화에서 만큼은 불꽃 튀는 연기를 보여준다. 종종 필름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그리워진다. 오랜 세월, 퇴화의 흔적으로 색이 바래고 스크래치'가 난 필름 영화를 볼 때마다 그립다. 이젠 그런 영화를 볼 기회'란 없다. 디지털化된 영화는 퇴화의 흔적도 긁힌 상흔도 없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