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마술
아내가 슬프고
슬픈 아내를 보고 있는 내가 슬프고
그때 온 장모님 전화 받으며, 그러엄 우린 잘 지내지. 하는
아내 속의 아내는 더 슬프다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모자에서 나온 토끼가
모자 속으로 자청해서 돌아간다
내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딱딱한 면은 왜 나를 막는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밖에 길을 쏟아버리자
미망 迷妄 이 그 길을 받아 품에 한번 꼭 안았다가 바로 버린다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게 하려고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처음 보는 신기한 마술이다
ㅡ 심보선, 시집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중에서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슬픔은 유행성 독감보다도, 에볼라 바이러스보다도 전염성이 강하다. 슬픔은 수인성전염병 水因性傳染病도 아니고 수인성전염성 手因性傳染病도 아니다. 시인성전염병 視因性傳染病 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전염이 된다. 아내가 슬픔에 빠지자 그 모습을 곁에서 보고 있던 남편이 슬픔에 빠지고, " 아내 속의 아내 " 는 더 슬프다. 그리고 이 시를 읽고 있는 독자도 슬픔에 빠진다. 이런 식으로 슬픔은 세계를 잠식할 것이다. 감염 속도를 감안하면 일주일 이내에 대한민국이 슬픔에 빠질 것이고, 일본이, 중국이, 과테말라가, 갈라파고스 군도가, 세계가, 인류가, 지구가 슬픔에 빠질 것이다. 이 재앙의 시작은 " 아내의 슬픔 " 이다. 시인은 "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 " 에서 살고 싶다. 그곳은 신나는 세상이지 슬픈 세상은 아니니까. 하지만 마술처럼 완벽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인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유토피아는 " 어느 곳에도 없는 곳 " 이라는 의미이니깐 말이다. 현실은 잔혹하다. "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 직업이 아비를 버리고 / 병이 아픈 자를 버리고 / 마술사도 결국 토끼를 버리고 // 매정한 집이, 너 나가, 하며 문밖에 길을 쏟아버 " 린다고 말한다. 꾀죄죄한 현실'이다. 슬픔은 늘 이런 식이다.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스크린 속 영화나 티븨 속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대부분은 구질구질한 현실 때문에 슬퍼진다. 시인의 아내도 꾀죄죄한 현실 때문에 슬퍼했으리라. 시인은 아내가 " 온 세상을 슬픔으로 물들게 하려고 / 우는 아내가 식탁 모서리를 오래오래 쓰다듬고 있다 " 고 말하지만, 그 지적은 틀렸다. 아내는 각진 모서리 끝을 쓰다듬어, 천 번을 더듬어 둥글게 마모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자기 치유이면서 슬픔에서 벗어나려는 묵언수행'이다. 시인은 뾰족한 각을 둥글게 만들고 있는 아내의 " 신기한 마술 " 을 보고 있다. 어루만진다는 것은 뾰족한 것을 둥글게 만드는 행위'이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언제가 아내는 식탁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