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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94
박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7월
평점 :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서울에서 돈 3000만 원 가지고 전세를 얻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복덕방 부동산 중계소'라는 이름보다 복덕방'이란 명칭이 좋다 에 들어가 3000만 원 전세 있냐고 물으면 대꾸도 안한다. 자꾸 물으면 오히려 화를 낸다. " 아니 요즘 3000짜리 전세가 어디 있수 ! " 결국에는 서울살이를 포기하고 꾀죄죄한 변두리'로 향하게 된다. 직장은 서울이지만 집은 경기도 거주자가 되는 것이다. 만원 버스를 천 원'만 내고 탔다는 기쁨도 잠시 구천 원 번 건가 ? 서서 두 시간 동안 사과 궤짝 속 사과처럼 사람들과 맞닿다 보면 짜증이 올라온다. 마르지 않은 머리는 헤어드라이 대신 창문 바람으로 말리고 숨을 쉬면 어제 먹은 삽겹살에 소주 냄새 날까 봐 숨을 삼켜 항문 쪽에 가둔다. 내려서 쏟아내야지 !
순간, 왜 사나 싶다. 버스에서 내렸다고 해방된 것은 아니다. 지각하지 않으려면 뛰어야 한다. 퇴근은 역순이다. 내가 살던 집은 안양 충훈부 버스 종점 근처였다. 반지하'였다. 쪽창 하나가 있었는데 창문을 열면 길바닥이 보였다. 방은 늘 캄캄했고 볕은 2시에서 3시 사이에 머물다 떠났다. 이 시절, 나는 바닥'이었다. 애인은 떠났고, 마음은 무너졌고, 헛것은 자주 출몰했다. 투명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온 이가 이었으니 그가 바로 은하철 씨'였다. 올 때는 항상 빈손이었으나 그 마음이 고마워 타박하지는 않았다.
- 괜찮아 ?
- 응, 괜찮아 !
- 긍정적 생각을 가져. 부정적인 것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결실이 이루어질 거야.
- 뭔 개소리야 !
- 좆됐어 열 번 외쳐 봐.
- 왜 ?
- 하라면 해 !
-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좆됐어, 좋겠어 !
- 봐, < 좆됐어 > 를 열 번 외치면 < 좋겠어 >가 되잖아.
- 음... " 좆됐어 " 의 동의어는 결국 " 좋겠어 " 네. 감동적이다. 시발.
쪽창을 열고 밖을 보면 길바닥이 잘 보인다. 당시 내가 벽에 그린 벽화를 보면 답답한 심정이 잘 나타난다. 커다란 창문을 그렸고 환한 볕을 넣었다. 내가 간절히 원한 것은 넓은 창문과 환한 볕이었다. 나는 쪽창을 열어 몇 시간씩 밖을 내다보고는 했다. 반지하 쪽창이다 보니 사람 얼굴이나 상반신은 보이지 않고 다리와 신발만 보였다. 하지만 걸음걸이와 신발만 보고도 생김새를 대충 알 수 있었다. 특히 신발 뒷굽은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뒷굽이 많이 닳은 사람은 보통 두 부류였다. 가난한 사람이거나 성실한 사람. 나는 쪽창을 열고 방에 앉아서 무수히 지나가는 신발을 보며 그 사람을 상상했다.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쪽창을 열고 지나가는 신발을 구경하다가 낯익은 운동화를 발견했다. 낡은 운동화였다. 낡은 운동화는 머뭇거리며 창문 주위를 맴돌다가 사라졌다. 내 애인의 운동화'였다. 뒷굽이 닳았다.
신발 모양'만 보면 그녀는 심성이 곱고 느긋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여자가 내 곁을 떠났다. 생각해 보니, 그토록 오랫동안 그녀를 만났으나 단 한번도 그녀가 걸어온 길을 기억하는 신발 뒷굽을 본 적이 없었다. 부끄러워서 울었다. 그녀는 왜 집 앞에서 서성이다가 떠났을까 ? 캄캄한 밤이 찾아왔다. 뜬눈으로 밤을 샜다. 아침 7시 정각이 되자 은하철 씨가 찾아왔다. 언제나 빈손이었다. 그는 괜찮아로 시작해서 좆됐다 열 번만 외치라는 주문으로 하루 방문을 매조지했다. 은하철 씨는 아침 7시만 되면 내가 사는 집 창문 앞에 날아와 잠시 집구석을 관찰한 후 날아가는 비둘기 이름이었다. 은하철 씨는 쪽창 너머에서 내 방을 들여다보며 나에게 안부를 묻고는 했다.
쪽창으로 바닥만 보다가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니 감동적이었다. 물론 은하철 씨가 사람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비둘기 소리를 내며 말했다. 구구구 ! 그러자 은하철도 구구구, 했다. 나는 장난 삼아 << 은하철도 999 >> 만화 주제가를 부르고는 했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우주 정거장에 햇빛이 쏟아지네 행복찾는 나그네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엄마 잃은 소년의 가슴엔 그리움이 솟아오르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999 은하철도999 기차는 은하수를 건너서 밝은 빛의 바다로 끝없는 레일 위에 햇빛이 부서지네 꿈을 쫓는 방랑자의 가슴에선 찬바람 일고 엄마 잃은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999 힘차게달려라 은하철도999 은하철도999~
저, 어둡고 캄캄한 행성에서도 햇빛이 쏟아지고, 은하수를 건너 밝은 빛의 바다로 끝없이 레일 위에 햇빛이 부서진다는 데 내 방은 언제 볕이 드냐 ?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립다. 은하철 ! 옛 애인의 낡은 운동화와 은하철 씨에게 이 시를 바친다. 내 시는 아니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박형준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전문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