쩨쩨하게 살겠다
때는 바야흐로 2048년 대한민국. 한때 뾰족했던 어깨가 닳아서 둥근 어깨가 된 노인이 이웃집 소년에게 말한다. " 내가 말이다. 이 할애비가 옛날에 어느 가난하고 꾀죄죄하며 쪼콤한 녀석을 하나 알고 있었단다. 하고 다니는 꼴은 롹커'인데 노래방 가면 뽕짝만 부르던 놈이었지. 겉과 속이 다른 녀석이었어. 첫날, 라운드티를 입고 왔는데 목 둘레가 닳고 닳았더구나. 남들이 보면 빈티지'라 생각했을 거야. 오래 입어서 너덜너덜해진 건데 말이다. 비루한 인생이었지. 어느 날, 이 사람이 작정하고 블로그에 글을 하나 올렸단다. 너는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블로그라는 인터넷 상호소통창구가 있었단다. 호기롭게 썼으나 오랜 고민 끝에 썼다는 티가 확 나서 읽는 내내 짠했지. 구걸이었어. 이대로는 못 살겠다. 돈 좀 보태달라, 뭐 이런 내용이었지.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꽤 유창하게 자기 변명을 했더랬다. 속는 셈치고 이 작자에게 펀딩을 했지. 그리 비싼 건 아니었어. 10만 원짜리 일일티켓이었거든. 그는 그 돈으로 책을 자비 출간했단다. 300부만 찍었지. 지금 그는 이 세상에 없지만 난 여전히 그 친구를 생각한단다. 이 책을 너에게 주마. " 소년은 책을 받아 이리저리 살핀다. 요즘은 종이 책을 구경하기 힘든 시대다. 모든 책은 전자책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 오쉬프만젤쉬땀 할아버지, 그가 누군데요 ? " " 페루애'란다 ? " " 누구요 ??! " " 노벨문학상 수상자 페루애 말이다 ! " " 네에?!!! 페루애요 ? 할아버지처럼 넙데데하고 두리뭉실한 분이 어떻게 그렇게 위대하고, 위대하고, 위대한 분을 아세요 ? "
어깨가 둥근 노인은 한때 어깨가 뾰족했을 때 알게 된 페루애'라는 사내를 떠올렸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35년 전이었지...... "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소년은 쉴 새 없이 마른 기침을 쏟아냈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은 밤 하늘 높이 뜬 인공위성처럼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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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 곰곰생각하는발 페루애'입니다. 소식 하나 알려드립니다. 그동안 절찬리에 방영되었던 < 새빨간활 > 이 2014년 10월 1일부터 < 새빨간활 시즌 2 > 로 새롭게 문을 엽니다. 희소식이 아니라 개 소식'이라고요 ? 맞습니다. 개 소식이면서 동시에 개소식'입니다. 여러분이 채찍을 휘두른다면 기꺼이 가터벨트 입고 엉덩이를 내밀 생각입니다. 그동안 생선 가게에서 카운터를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책을 써야 겠다고 말이죠. 말이 좋아 월급이지 늙은 노모가 용돈 주기 거시기해서 월급 주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여러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겁이 났다고나 할까요 ?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누에처럼 고치 속에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올 생각입니다. 일단 자비로 책을 300부 정도만 찍을 생각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여러분들에게 염치없는 소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자비 출간이 저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팔순 기념 저서도 아니고 말이죠. 제가 알기로는 니체도 자비로 책을 300권만 찍었다고 하더군요. 10권 정도 팔렸다나 ?! 염치 없는 부탁이어서 자꾸 말이 길어지내요. 툭 까놓고 말하겠습니다. 펀딩입니다. 저를 보고 투자하십시요. 일일찻집 티켓이라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한 장당 10만 원입니다. 30장이 팔리면 얼추 자비 출간을 할 수 있겠더군요.
그동안 네이버 블로그와 알라딘에 쓴 글 가운데 재미있는 글을 엄선하여 추릴 생각입니다. 알라딘 통계를 보니 제가 2013년 알라딘에 올린 글은 신경숙의 < 엄마를 부탁해 > 10권을 만들 수 있는 원고지 분량이라고 하더군요. 2014년에도 꾸준히 올렸으니 합이 20권입니다. 참새처럼 꾸준히 제 블로그를 찾아오셔서 글을 읽으셨다면 당신은 엄마를 부탁해 20권을 읽은 셈이 됩니다. 셈법이 이상한가요 ? 사실이랍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돈 한푼 안 내고 책 20권을 읽은 게 되는 거지요. 책값으로 따지자면 20만 원어치 읽은 셈입니다. 그러므로 티켓 한 장에 10만 원은 그리 큰 금액이 아닙니다. 티켓을 사신 분에 한하여 저자 사인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는 미팅권을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술값은 당신이 내세요 !
사람 일이란 건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만약에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탄다면 어떻게 될까요 ?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노벨 문학상을 탄 작가가 최초로 만든 책을 가지고 있게 됩니다. 더구나 사인이 적힌 300권은 전무후무한 희귀본이 되죠. 두 세대만 건너뛰면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겁니다. 이 책 한 권이면 은마 아파트 한 채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가치를 얻을 겁니다. 농담이라고요 ? 허어, 이 양반들 참.... 아, 그리고 한 가지 약속을 하죠. 제가 노벨 문학상을 탄다고 해서 펀딩에 참여했던 당신을 모르는 척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1년에 한 번씩 만찬에 초대하겠습니다. 산다는 거 얼마나 지겹습니까 ? 다람쥐 첫바퀴 도는 생이죠.
하지만 펀딩에 참여하게 된다면 당신은 평생 가장 위대한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일단 참가 의향이 있는 분은 비밀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인정에 끌려서 억지로 참여하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작가로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투자를 하시라는 말입니다. 참여자가 30명이 넘으면 교정 후 바로 제작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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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감성공작소 마담의 일상
번외로 개소식 기념 모임을 갖기로 했습니다. 참여 의사가 있으신 분은 10월 4일 토요일 오후 5시 낙원동 유진식당으로 오십시요. ( 자세한 약도는 낙원동 유진식당'이라고 치면 자세히 나옵니다. ) 노상에서 막걸리 한 잔 합시다. 이 식당 음식이 맛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을에 술 마시기 좋은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펀딩 의사가 있으신 분은 비밀댓글로, 술 모임에 참석할 의사가 있으신 분은 공개 댓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기껏 모여야 대여섯 명 모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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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다 끝나자 소년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 이 할애비가 줄 수 있는 건 이것 밖에는 없구나 ! 전 세계에서 이와 똑같은 판본은 300권뿐이지. 더군다나 페루애 사인이 들어간 책은 30권이지만 현재 남아 있는 책은 이 책을 포함해서 세 권이 전부란다. 이 책을 팔아서 네 병원비로 쓰거라. 책 수집가에게는 꽤 비싼 보물에 해당되거든. 이제 내게 이 책은 필요 없단다. 성격은 괴팍해도 꽤 정이 있는 친구였다. 지금 내 아내를 만난 것도 사실 알고 보면 페루애 때문이었지. 그 자리에서 처음 엄동이란 아가씨를 보게 되었단다. 난 보자마자 심장이 뛰었지. 강남 호박 나이트 성능 좋은 JBL 스피커처럼 말이다. 심장이 너무 뛰는 바람에 스피커 막이 찢어지기도 했지.
그게 사랑이란다. 꼬마야, 몸속에 무엇인가가 찢어지는 아픔이 들 때 비로소 사랑이 시작된다는 점을 명심하렴. 오래 전 일이 생각나는구나. 우린 낙원동 유진식당이라는 술집에서 술을 마셨단다. 그때 페루애가 취해서 옆에 앉은 여자에게 들이대다가 따귀를 맞기도 했지. 그래도 계속 깐죽거리길래 내가 가서 그 녀석애개 죽빵'을 날렸단다. 그 자리에 있던 여자가 지금의 내 아내란다. 그때가 좋았다. 지나가버린 것은 다 그리움이 되니깐 말이다. 페루애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명성을 얻었다 싶었는데 이내 아내를 권총으로 살해해서 감옥에 갈 줄이야, 사랑하는 페루애가 쏜 총에 죽은 불쌍한 눈미. 박복한 년...... "
후일담
소년은 이 책을 팔아서 병을 고쳤다. 훗날 그는 3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쩨쩨하게 살겠다, 고 대답했다. 화들짝 놀란 기자가 되물었다. " 쩨쩨하게 살겠다고요 ? " 대통령 당선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 네에, 쩨쩨하게 살겠습니다. " 다음 날, 헤드라인 뉴스 제목은 " 쩨쩨한 대통령 당선 ! " 이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페루애가 가난하던 시절 이웃 도움으로 출간한 잡문 제목이 << 쩨쩨하게 살겠다 >> 였다. 페루애는 이 책에서 화려한 삶을 꿈꿀 필요 없다고 말했다. 쩨쩨하게 살아도 된다고. 예수도 쩨쩨하게 살다가 갔고, 부처도 쩨쩨하게 살다가 갔다고 ! 대한민국의 자유, 평화, 정의 따위에 목숨 걸지 말고, 동네 난방비 비리에 쩨쩨하게 시비를 걸라고 ! 역설적이게도 그는 이 책을 발판으로 화려한 삶을 살게 된다.
소쉬르의 언어학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차용한 << 깻잎오소리입말사전 >> 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눈 뜨자 돈방석에 앉았다. 개새끼, 이중인격자. 아침에는 철갑 상어알 요리를 먹고 저녁에는 바늘로 거위 간을 108번 찌른 푸아그라 요리를 즐겼다. 하지만 마지막은 비극이었다. 그는 아내를 살해한 죄로 안양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질식사'였다. 화장실에서 동료 몰래 초코파이를 급하게 삼키다가 음식물이 식도에 걸려 사망했다. 쩨쩨한 죽음이었다. 이로서 그의 철학은 완성되었다. 쩨쩨하게 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