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욋길
- 이 글은 엄동 1인을 위한 맞춤 글이다. 모든 딴지를 불허한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 내 정식 직업은 " 마라토너 " 다. 죽을 둥 살 둥 달려야 하니, 내 인생 이게 뭐니 싶다가도 drunk money '에 취하면 바로 이 맛에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 라는 소리도 새어나온다. 이판사판 악다구니해도 사판'보다 이판'에서 노는 게 낫다는 생각하면 생강처럼 아린 맛도 참고 견딜 수 있었다. 내 소속 팀은 서울역 후암동 동사무소'다. < 그들에게 새로운 날개를 > 이라는 노숙자 재활 프로그램으로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자는 취지로 동사무소로는 최초로 마라톤 팀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지지하는 사람은 후암동 주민이 전부였다. 뛰고, 뛰고, 뛰고, 뛰고, 뛰었다. 기록은 신통치 않았지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가난한 후암동 사람들이 특정 대상을 지지할 팀이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성적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나는 신용불량자였고 노숙자였으며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상인이었다. 불알 두 쪽과 맨발이 전부인 내게 마라톤은 비타 500이었다. 뛰어서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뛸 수 있었다. 결승선에 도착하면 탈수기에서 갓 꺼낸 빨래처럼 다리에 힘이 쪼옥 빠져서 바닥에 주저앉게 되지만, 나는 이 " 힘 없는 무저항의 순간 " 을 사랑했다. 탈탈 털린 빨랫감과 마라톤 경기를 막 끝낸 롱 디스턴트 러너 왠지, 갑자기, 뜬금없이 하루키 흉내를 내고 싶었다 의 공통점은 빳빳하지 않다는 점이다. 둘 다 빳빳해지기 위해서는 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 빨랫감은 좋은 볕이 필요하고, 마라톤 선수에게는 시원한 물이 필요하다.
동사무소 재정 상태가 열악하다 보니 가욋돈이 필요해서 마라톤 학교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마라톤을 가르치고 있다. " 여러분, 영화 << 해적 >> 보셧나요 ? 거기서 유해진이 수영법을 가르치면서 음파음파 하잖아요. 마라톤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흡이 중요해요. 들숨과 날숨을 규칙적으로 쉬어야 합니다. " 그녀를 처음 본 곳도 바로 " 마라톤 학교 " 였다. 그녀가 내게 싸인'을 요청했다. < 행복하세요. - 롱 디스턴트 러너 곰곰발 > 이라고 쓰자,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정정을 요구했다. " 어머, 죄송해요 ! 이미 말씀 드린다는 게 그만.... 마라토너 곰곰발'이 아니라 알라디너 곰곰발'로 써 주세요. "
시간 날 때마다 알라딘 개인 블로그에 " 달리기 " 에 대한 글을 올리고는 했는데, 그녀가 내 블로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했다. 부끄러웠다. 글이라기보다는 허세가 팔 할'이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내가 싸인을 해 준 최초의 독자였다. 나 또한 그녀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체구는 작았지만 야물딱지게 뛰었고 수강생 가운데 하프 마라톤 성적이 가장 좋았다. 그녀가 세운 최종 목표는 마라톤 풀 코스 도전이었다. 여자가 개인 강습을 부탁했을 때 나는 바로 승낙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마라톤을 핑계로 자주 만났으나 마라톤 대신 주로 문학에 대해 말했다. " 왜 그렇게 하루키를 싫어하세요 ? " 여자는 하루키 광팬'이었다.
나는 온갖 이유로 하루키를 비판했다. 개똥 같은 소리'였다. 돌이켜보니, 그때 나는 하루키가 싫어서 그녀에게 뾰족한 불 화살을 날린 게 아니라 질투에 눈이 멀었다. 사랑에 빠졌다. 눈이 멀었다. 아마츄어 마라톤 대회가 있던 날, 나는 결승선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일반 선수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3시간이 경과했지만 그녀는 아직 결승선에 도착하지 못했다. 사라졌다. 그녀는 경기 도중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경기장에 들어온 선수 기록은 5시간 36분 17초'였다. 그를 끝으로 대회는 끝났다. 하지만 나는 강력하게 항의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결승선을 통화하지 못한, 경기를 포기하지 않은 선수가 있다고, 기다려 달라고.......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서 마라톤을 배우는 수강생이 있었다. ㅡ 강사님, 마라톤 선수와 노래 가수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 ㅡ 모르겠습니다. 호흡이 틀어지는 순간 망친다는 거죠. 가수 지망생이 학원에서 배울 때 제일 먼저 배우는 게 바로 호흡법이에요. 숨쉬기 운동만 하죠. 마치 소림사 영화에 나오는 수련법과 동일하죠. 왜 사부는 기술을 가르치지는 않고 제자에게 물 긷고 밥 하고, 마당만 쓸게 하잖아요. 기술은 가르쳐주지 않고 부엌 밥풀때기나 시키니 화가 난 제자가 한마디하죠. 언제 가르쳐주실 겁니까 ? 바로 이 지점에서 << 생활의발견 >> 법칙이 적용되죠. 사소한 가사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기술이었던 거죠. 뭐, 나머지는 다들 아시잖아요. " 하산하거라 ! " 가수에게 호흡법은 제자가 하루 종일 하는 가사일과 비슷해요. 그래서 마라톤을 배우기로 했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가 될 거예요. 하하. ㅡ 건투를 빕니다 ! 그 수강생은 마라톤 선수가 되어도 될 정도로 타고 난 실력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롱 디스턴트 러너 피지컬 트레이닝 시너지 효과는 발생하지 않았다. 노래 실력은 늘지 않았고, 결국 가수가 되리라는 꿈을 접었다. 오늘도 나는 불알 두 쪽 차고 좆빠지게 달린다. 그게 내 일'이니까. 내 최고 기록은 2시간 20분 43.201929343242초'다. 오늘 페이스는 그닥 좋지 않았다. 달리면서 계속 사라진 여자 생각을 했다. 어디로 갔을까 ? 달리는 내내 그녀 생각만 했다.
그러니 기록이 좋을 리 없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이미 2시간이 지났다. 달리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낯익은 건물들이 보였다. 여자가 살던 곳이었다. 산본이었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리기를 멈췄다. 내가 가야 할 정해진 코스를 보다가 다시 그녀가 살던 아파트를 보았다. 저 길은 가욋길'이다. 나는 가욋길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를 알고 싶었다.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날기 시작했다. 바닥을 보니 내 발은 아스팔트 바닥 위에 붕 떠 있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 나는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버스가 나를 쳤고, 나는 10미터나 날아갔다. 비로소 그녀가 사라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달리다가 낯익은 풍경을 보았으리라. 그리고는 가욋길로 뛰었으리라.
경기는 끝났다. 우승은 2시간 13분 12.20381283024823948028420384초를 기록한 삼성생명 소속 김달식 선수가 차지했다. 나는 실종 처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