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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 ㅣ NFF (New Face of Fiction)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 지음, 이경아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환상 없이 쓴 환상소설
나는 만연체로 이루어진 긴 문장에 대한 해독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플로베르나 프르스트'를 읽지 못하는 것 같다.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의 옷차림을 설명하느라 몇 페이지를 할애할 때는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보바리 우먼'이 차라리 바바리 맨'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하여튼, " 내 취향은 아니군 ! " 프루스트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골골거리는 소설을 읽으니 내가 다 골골거리는 느낌이었다. 홍차와 마들렌이라는 과자 이미지만 남았다. 어느 날, 마들렌이란 과자를 먹을 기회가 생겼다. 도대체 마를렌 맛은 어떤 것일까 ? 한 입 베어 물었다. " 내 취향은 아니군 x 2 " 처음에는 " 난독증 " 이 아닌가 의심을 했다. 곰곰 생각하고 후딱 결론 내렸다.
난독증'보다는 급한 성격 탓'이었다. 내가 일일 드라마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내용을 질질 끈다는 데 있었다. 내가 네 애비다, 라는 천기누설은 날마다 지연되다 더 이상 미루지 못할 상황이 닥치면 뒷목 잡고 쓰러지거나 기억상실증이 찾아온다(는 식이다). 드라마만 보고 있으면 대한민국에서 기억상실증은 감기보다 흔한 증세'처럼 보인다. " 뭐, 민식이가 기억상실증에 걸렸어 ? 별거 아닌 거 가지고 그동안 호들갑을 떨었군...... " 복잡 섬세한 문장'보다는 간단 명료한 문장'을 좋아하다 보니 추리 / 판타지 / 공포 소설을 주로 읽게 되었다. 적어도 이들 소설은 " 의식의 흐름 " 따위로 독자를 지리멸렬하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했고, < 언젠가 소설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 라는 같잖은 허세를 평소 좋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라는 러시아 작가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 떠오른 이름은 아팟차퐁 위세라타쿤( 태국 영화 감독 ) 이었다. 이름 한번 더럽게 어렵군. " 이름 한번 더럽게 어려운 " 러시아 작가가 쓴 단편집 <<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 >> 는 B가 적극 추천한 작품이었다. " 근래 읽어본 소설집 중 최고 " 라는 평가를 내린 후 " 인간에 대한 그 어떤 환상도 없이 담백하게 써내려갔다 " 고 평가했다. 중매는 잘 서면 술이 석 잔이요, 못서면 뺨이 석 대'라는 속담이 있듯 특정 책을 주위 사람에게 자신있게 추천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대목이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며 추천한 책이 그네에게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싸늘한 눈빛을 보며 늘 생각하고는 했다.
시바, 앞으로 책 추천하는 짓 따위는 하지 말자.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어디 그런가 ! 좋은 책 읽고 나면 소개하고 싶다. 이번 경우는 내게 중매를 선 그녀에게 술 석 잔을 사줘야 할 판이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가릴 만한 작품이지만 내 취향을 고려하자면 이 작품은 " 엑설런트 !! " 다. 이 단편집은 21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었다. 몇몇 작품은 단편이라고 하기보다는 엽편소설에 가까운( 엽편소설 : 단편 소설보다도 짧은 소설. 풀어서 쓰자면 손바닥소설 정도 ?! ) 형태인데 분량이 적다고 해서 깊이가 얕지는 않다. 짧지만 강렬하다. 소설 형식으로 쓴 하이쿠'라고 할까 ? 외형적으로는 공포와 판타지 장르라는 외피를 걸쳤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리얼리즘 계열로 읽힌다.
그러니깐, 듀르밀라페트루셉스카야는 공포 판타지 장르 속에 숨어서 헐벗은 민중의 삶을 폭로한다. 읽고 나면 무서움보다는 슬픔이 크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어떤 " 상실 " 앞에서 고통스럽다. 이 상실은 지속된다. 잔혹 동화'라는 테마를 가지고 있지만 그 흔한 권선징악과 교훈보다는 위로와 슬픔이 팔 할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듀르밀라페트루셉스카야의 환상소설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B의 말처럼 이 소설은 " 인간에 대한 그 어떤 환상도 없이 담백하게 써내려간 " 환상소설이다. 내가 이 소설을 환상소설보다는 리얼리즘 계열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환상소설에서 환상을 빼면 신랄한 리얼리티가 남는다. 환상 없이 쓴 환상소설이라니......
■ 100자평 : 소설로 하이쿠를 짓다.
부록
엽편 소설 : 새벽 3시 동맹자 클럽 ▼
새벽 3시 동맹자 클럽.
앞으로 이 블로그는 새벽 3시 정각에 글을 올리기로 했다. 글은 새벽 5시'까지 공개되다가 그 이후에는 비공개'로 전환할 예정이다. 새벽 3시에 깨어 있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반드시 덧글을 남겨달라. 덧글을 자주 올린 사람은 < 새벽 3시 동맹자 클럽 > 회원이 될 자격 조건이 된다. 이들은 모두 창문 1호, 창문 2호, 창문 3호의 직위를 얻을 것이다. 오프라인 모임도 갖을 생각이다. 3의 배수인 3,6,9,12월 셋째 주 주말 새벽 3시에 종로 3가'에서 모인다. 향후 계획'은 추후 공지를 통해 밝히겠다.
주인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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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후 총 5명이 클럽 회원 자격을 얻어 정식 멤버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새벽 3시와 5시 사이에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가장 많은 활동을 펼친 회원은 창문 2호와 창문 4호였다.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불면의 이유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2호의 경우는 어두운 것을 극도로 무서워하는 포비아적 강박이 존재했고, 4호는 우울한 시인'이었다. 새벽 3시만 되면 어김없이 나는 블로그에 글을 올렸고, 글이 올라오자마자 새벽 3시에 잠 못 든 자들은 이곳에 모여 갑론을박'으로 시끌거렸다. 내 블로그는 그들의 사랑방이었다. 정치적 이슈에서 사형제 찬반 논란, 성적 자유와 성적 억압에 대한 담론이 거침없이 이어졌다. 오고가는 댓글이 400개를 넘은 적도 있었다.
3시부터 5시 사이라는, 그 짧은 시간에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간에 모두 곤한 잠에 빠져들었기에 그 사실을 몰랐다. 깨어 있는 자들만의 작은 세계였던 것이다. 새벽 세 시 동맹자 클럽 회원들은 모두 고독하고, 우울하며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세.시.동 클럽 회원'은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었다. 결국 우리는 모임을 갖기로 했다. " 새벽 세 시 종로 3가 만남의광장 ! " 9월 정기 모임에 참가 의사를 밝힌 회원은 창문 2호와 창문 4호였다. 나는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종로 새벽 거리는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아서 을씨년스러웠다. 어둠 속에서 한 여자를 보았다.
긴 머리에 긴 검정 치마를 입은 여자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여자 2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는 나를 보더니 " 창문 1호 ?! " 라며 물었다. 내가 방긋 웃으면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며 4호를 기다렸으나 약속 장소에 여자 4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거리를 서성이다가 24시 영업을 하는 일본식 주점'으로 향했다. 따스한 사케'에 몸을 데울 생각이었다. 여자 2호는 무척 예뻤다. 짙은 속눈썹은 창백한 피부를 더욱 투명하게 만들었고, 쇄골이 두드러진 어깨 라인은 활처럼 아름다웠다. 이런저런 시답지 않은 농담이 오고갔다. 잠시 여자가 깊은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는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여자였다. " 창문 1호 ! 동반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요 ? "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가 말했다. " 사람들이 자살에 실패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 두려움 ?! 공포 ? 아니에요.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그들의 자살을 돕고 싶어요. " " 피식... 마치 저승사자처럼 말씀하시는군요. " 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창백해보였다. 우리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첫 번째 모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렇게 끝났다. 여자 2호는 첫 만남 이후에도 새벽 3시만 되면 찾아와서 나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여자와의 섹스를 생각하며 혼자 자위를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위와 자살은 닮았어 ! 12월 정기 모임에서도 창문 2,3,4,5 호 모두 참석했다. 특히 창문 2호는 나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여자는 언제나 신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긴 검정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날따라 여자는 매혹적이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그 일본 주점에 가서 술을 마셨다. 너무 많이 마신 탓일까 ?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창문 2호는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모텔인 듯 싶었다. 나는 자는 시늉을 하며 여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나를 의식해서인지 서서히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이어 브래지어 훅을 따는 소리가 들리더니 풍만한 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하는 탄성이 나도 모르게 쏟아졌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젖꼭지를 애무했다. 그리고는 이내 긴 치마'를 벗었다. 그동안 긴 치마에 가려졌던 여자의 아름다운 다리가 보였다.아, 다시 감탄사가 다시 쏟아졌다. 저토록 아름다운 벌거벗은 몸 !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여자의 발은 바닥에 붙어 있지 못하고 10센티 정도 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자가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여자가 다가와 키스를 했다. 그녀의 혀가 내 목구멍 속을 타고 넘어왔다. 순간 그녀의 혓바닥은 새빨간 것이 아니라 검은 혓바닥처럼 보였다. 숨이 막혔다.
나는 다음날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모텔 종업원이 신고를 했다. 내 입속에서는 여자의 긴 머리카락 뭉치가 발견되었다. 경찰은 머리카락 뭉치가 기도'를 막아 질식사 한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과학수사팀은 내가 정액을 사정한 시트를 증거로 쾌락을 얻기 위한 자기색정사로 결론을 내렸다. 보험 회사에서는 색정사에 의한 사고사가 아니라 자살'이라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아서 결국은 사고에 의한 사망 사건으로 기록되어서 가족에게 생명 보험 5억이 지급되었다. 그 돈으로 동생은 근사한 차를 뽑았고, 어머니는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다녀왔으며, 누나는 루이비통 가방 3개를 장만했다. 물론, 새벽 세 시 동맹자 클럽'은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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