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게 있어도 되지만......

 

 

 

http://youtu.be/uW-sjI2wB6k

 

 

사내(社內) 인트라넷'에 < 익명 자유 게시판 > 이 도입된 적이 있다. 보스는 낮에는 진보요, 밤에는 보수 꼴통 마초'가 되는 " 지킬 박사와 하이드 " 형 인간이었다. 많은 참모진이 " 익명 게시판 " 을 반대했지만, 보스는 직원이 익명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며 " 익명게시판 " 을 " 직장 내 신문고 " 로 육성하겠다는 야심 찬 결의를 했다. 직접 백성(평직원)의 말을 듣겠다는 소리'다.  " 사내 직원들이여, 눈치 보지 말고 편안하게 글을 올리쇼 ! " 당시 사내 커뮤니티 관계망은 오로지 실명 인증을 통해서만 글을 쓸 수 있다 보니 불만 사항이 있어도 불만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직원들은 생각보다 익명게시판에 불만을 쏟아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부가 늘었다.

 

어떤 놈은 안으로는 자주 독립을, 밖으로난 민주 번영에 이바지하겠다는 소리와 함께 조직의 강성대국을 위해서 이 한 몸 바치겠다는 말로 매조지하는  습자기 같은 간신도 있었다. 형광등 백한 개를 켜놓은 듯한 아부'는 나중에 술자리 안주가 되어 조롱을 받곤 했다.  가끔 술자리 뒷담화 타임에 불콰하던 얼굴이 불쾌한 표정으로 바뀌는 이도 있었다. 익명이다 보니 누가 누구인지 그 누가 알겠는가 ? 다음날 익명 게시판에는 " 회사 험담이나 하는 족속들 " 이라는 글이 올라오고는 했다. 우리는 불콰했던 얼굴이 불쾌한 표정으로 변했던 김 대리'를 의심했다. 어느 날이었다. 익명 게시판에 평소 마초 꼴통 면모를 보였던 닉네임 뽀로로 님이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우기는 일본을 " 쪽빠리 " 운운하며 맹렬히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독도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나는 그 글에 댓글을 달았다. " 뽀로로 님, 흥분하지 마십시요.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비난하기에 앞서 독도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뽀로로가 반론을 제기했다. " 곰곰생각하는발 님, 친일파 근성은 버리시죠 ? " 나 또한 반박 댓글을 달았다. " 뽀로로 님, 잘하면 대나무 깎아 죽창 만들 기세로군요 ! " 오고가는말풍선이 길어지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며칠 후, 총무부로부터 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익명 게시판을 소란스럽게 만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익명 게시판'이라더니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추적하면 다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이런, 슈발 ! 추측컨대, 나와 말싸움을 벌렸던 이는 사장이었던 모양이다. 몇 달 후 익명 게시판'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개그콘서트 << 편하게 있어 >> 는 "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했을 때. 송대리가 겪게 되는 곤경 " 에 대한 이야기'다.  콩트 설정을 살펴보니 김과장은 고래도 아니면서 고래인 척 고래 흉내를 내는 술고래'다. 그에게 송대리'는 일 잘하는 쎈쓰쟁이요, 믿고 의지하는 아랫사람이다. 3차는 자기 집'이다. 그는 송대리에게 말한다. "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 ! " 송대리 입장에서 보면 편할 리 없다. 김과장이 편하게 있어, 라고 말하는 순간 그곳은 불편한 장소가 된다. 왜냐하면 송대리와 김과장은 공적 영역에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이다. 공적 관계인 송대리가 사적 공간인 김과장 집에 침범하는 순간 사회적 거리'는 무너진다.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가 존재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 상호작용 의례 >> 에서 " 중간 계급이 사는 도심 지역에서 하위 계급이 사는 농촌 지역으로 갈수록 좌석 사이의 간격이 좁아진다 (73쪽, 아카네) " 고 지적한다. " 상위 계급일수록 접촉 금기의 범위가 더 넓고 정교하다 " 권력과 자리가 높을수록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거리'가 탄생한다. 권력과 거리는 비례한다. 백악관 청소부가 오바마와 아무리 친하다 한들 오바마에게 다가가 팔짱을 낄 수는 없다. 하지만 오바마는 청소부에게 다가가 팔짱을 낄 수 있다. 거리를 침범했으니 무례한 태도일까 ?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오바마는 수평적 마인드를 가진 지도자'라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 문제는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허락없이 친밀감을 표현할 권리가 있지만 아랫사람은 그럴 권리가 없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권력의 맛, 아니겠습니까 ?

 

김과장(윗사람)이 송대리(아랫사람)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간 태도는 송대리에 대한 민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친밀감 표현이지만, 송대리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편하게 있어, 라고 말하는 관계는 대부분 불편한 관계'다. 편한 사이는 결코 편하게 있어, 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마치 사랑하는 사이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이 존재한다. 설정에 따라 공적 공간에서는 편하지만 사적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 불편해지는 관계가 있다. 개그콘서트 << 편하게 있어 >> 는 서로 친한 사이'라고 해도 공적 공간에서 느끼는 친밀도와 사적 공간에서 느끼는 친밀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와 말싸움을 했던 뽀로로 님은 익명게시판을 통해 온라인 야자 타임'을 도입하여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도입했지만 한계에 봉착했다. 그는 아랫사람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는 몸짓을 근사한 태도라 생각했지만, 막상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던, 없었던, 없었던 것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예의상 던지는 " 편하게 있어 ! " 라는 말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다. " 편하게 있어,   도 되지만 예의는 반드시 지켜야지 ? "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아니라 입 속으로 삼긴 말(생략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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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6-14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글을 읽고 곰곰발님과 같은(?) 결론에, 같지 않은(?) 결론이군요.

저는 이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 인간 사회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입 속으로 삼긴 말(생략된 말)이 아니라 입 밖으로 나온 말이다.

저도 이 글에도 동의 합니다. ;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아니라 입 속으로 삼긴 말(생략된 말)이다.

인간 사회 관계 - 공적 영역, 인간 관계 - 사적 영역, 또는 양자를 포괄한 영역 ; 위 글의 인간 관계가 공적, 사적을 포괄한 의미라면 그것은 개인의 가치관 선택이 아닐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6-14 22:04   좋아요 0 | URL
저는 좀 프로이트적으로 생각해서 쓴 문장입니다. 물론 프로이트 이론 중 프로이트는 " 말실수 " 가 갖는 의미를 크게 보았지만, 프로이트 정신분석은 대체로 발화된 의미보다는 생략된 언어'를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로이트가 이런 말을 했죠. 당신을 증오한다는 당신을 사랑한다, 라는 말이다... 이런 비스무리한 말 말이죠. 입 밖ㅇ로 나온 말은 증오한다인데, 사실 여기서 생략된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었죠. 그런 의미입니다.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