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이야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기 6-3
< 범선의 역사 > 라는 책이 꽂힌 서점 內 모퉁이 앞에서 한참을 망설인 적이 있다. 망설인 이유는 팔 만원이라는 높은 책값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별로 없을 것이란 실용적 차원도 작용했다. 내가 이 책에 끌린 이유는 범선'이 가지고 있는 우아한 모양새 때문이었다. 범선이야말로 건축 미학의 결정체'였다. 범선은 움직이는 봉정사 극락전'처럼 보였다. 펼쳐진 돛은 아름다웠고 여러 갈래로 이어진 밧줄은 묘한 음악적 운율을 선사했다. 거대한 범선 사진을 볼 때마다 내가 좋아했던 칸딘스키 그림이 생각났다. 고민고민하다가 결국에는 책 한 권 살 돈으로 다른 책 다섯 권을 골랐다.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책이 아니라 범선이었으니깐. 맙소사, 집 한 칸도 없는 놈이 범선을 갖고 싶다니 !
" 고고학계의 거장 브라이언 페이건 신작 " 이라고 소개된 < 인류의 대항해 > 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읽고 싶은 책이다. 바다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바다 위이든 바닷속이든 상관없다. 바다 하니 생각나는 게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읽지 않은 책 소개는 잠시 미루고 당신에게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련다. 내가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가 아홉 살이었다. 바다는 맑고 투명했으며 조용했다. 한여름에는 물 비린내가 났는데 기분 좋은 냄새였다. 푸른 바다를 생각하면 웃게 된다. 어찌어찌하여 나는 날마다 바다를 볼 수 있었지만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에는 바다를 볼 수는 없었다. 비오는 날, 바다를 보러 식당'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깐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바다는 애답지 않게 월드콘 따위의 고급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
바다가 어떻게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냐고 ?! 착각하지 마라. 바다는 사내아이 이름이다. 아이가 식당에서 날마다 보는 방송은 뽀로로'였다. 식당 손님이었던 나는 프로야구 중계 방송을 보고 싶었으나 차마 아이가 넋을 놓고 보는 채널을 돌릴 만큼 야물딱지지 못했다. 바다가 좋아하는 애니'는 뽀로로'였다. 나는 프로이트 학파에 속하는 일반인'이었기에 바로 뽀로로 정신 분석에 몰입했다. " 뽀로로, 저 녀석은 외모 컴플렉스가 강한 놈이군. 깨알처럼 작은 눈에 대한 외모 컴플렉스가 인격 장애. 대따 끈 잠자리 안경은 새우 눈을 숨기기 위한 전략이다. 그리고 안경과 하이바는 대두(大頭)를 숨기기 위한 패션 아이템. 3등신을 4등신으로 보이게 만들거등. 인기란 게 그래. 다 한철이다. 거품 같은 거야. 지금은 뽀통령이지만 커 봐라. 뽀로로의 3등신은 코찔찔이 아이들에게는 인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뽀로로가 어른이 되면 매력없는 수컷이 된단다. 그나저나 뽀로로도 어른이 되면 대머리가 될 팔자'군. 하이바 오래 쓰면 정수리부터 털 빠진다. "
쫑긋 ! 바다의 눈은 텔레비젼 모니터를 향하고 있었으나 귀는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아이가 귀담아 듣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말을 조심해야 했다. 그래서 뽀로로는 심각한 하체 비만이어서 페니스가 살 속으로 함몰되어 성기 왜소증이 의심된다는 치명적 비극은 말하지 않았다. 어른으로서 아이의 동심은 지켜줘야 하니깐 말이다. 아, 참 ! 바다에 대한 소개가 늦었다. 내가 자주 가던 식당 < 바다네 생선 조림 가게 > 외아들 이름이 바다'다. 이 식당에서 늘 밥을 먹었는데 외아들이었던 바다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숙제를 하고, 티븨를 보고는 했다. 당시 바다는 머리를 사자 갈기처럼 길러서 노랗게 물을 들인 아이였는데 드럼을 배우고 있었다. 아이의 꿈은 롹커'였다. 그런 아이에게 학교에서는 동요 나부랭이나 가르치고 있으니......
바다처럼 머리를 길러서 묶은 아이 아버지는 강원도 좌파'여서 대한민국 정규 교육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그와 나는 민노당 지지자여서 죽이 잘 맞았다. 식당 일이 끝나면 좌파 감자 아저씨와 나는 문을 걸어잠그고 막걸리를 마셨다. 주로 허각보다 인기 없는 각하를 욕했다. 그는 아이가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대안학교에 보낼까 모색 중이었다. 나는 그를 " 강원도 좌파 감자 아저씨 " 라고 불렀다. 부부는 늦은 나이에 바다'를 얻었기에 아이를 끔직하게 사랑했다. 그런데 부부에게는 근심이 하나 있었다. 아이가 말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아이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의사 표현을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것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그 일 때문에 담임 선생으로부터 상담을 받기도 했다고. 나는 오히려 과묵한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아이를 볼 때마다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는데 항상 제일 비싼 이천 오백원짜리 아이스크림만 골라서 내 애간장을 태웠다.
건방진 녀석, 얻어먹는 주제에 ! 나는 시위하듯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고르기에 앞서 먼저 오백 원짜리 비비빅'만 골랐다. 그것은 마치 중국집에 가서 " 오늘은 내가 쏜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다 시켜 ! 난 짜장면 보통. 요즘 사교육비가 장난이 아니야. 대한민국은 먹고사는 게 문제야. " 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바다는 눈치가 없어서 아이스크림계의 깐풍기'만 골랐다. 어느 날, 바다가 내게 말했다. 그 아이 입에서 나온 가장 긴 말이었다. " 난... 맛 없던데, 아저씨는 비비빅이 제일 맛있어요 ? "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 아니... "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도 커서 아저씨처럼 부자가 되고 싶어요. 아이스크림 많이 먹어야지...... "
아저씨는 부자'라, 아저씨는 부자라....... 눈물이 앞을 가렸다. 가끔 그 꼬맹이 녀석이 보고 싶다. 건방지게 날마다 얻어먹는 주제에 제일 비싼 아이스크림만 고르던 녀석. 그 녀석과 함께 속초 청초호 엑스포 공원 앞에서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먹고는 했다. 바다'라는 이름 참 좋다. 바다라면 다 좋다. 멸치도 좋고, 대구도 좋고, 모비딕도 좋고, 개복치도 좋고, 바다 위에 뜬 범선도 좋고, 바다를 향한 항해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도 좋다. 삼천포의 반대말은 지피에스'다. GPS로 목적지를 찾아가는 것만큼 끔찍한 여행도 없다. 나침판도 없던 시절에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바다에 길을 냈을까 ? 그 망망대해에서 말이다. 궁금하다면 < 인류의 대항해 > 란 책을 펼쳐보면 될 것 같다. 책 안에 해답이 있다고 한다. ( 역사 분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