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를 떠나며......
14. 사랑은 봄비처럼 + 달빛길어올리기
부산 영화제'는 딱 한번 갔다. 규모 면에서 보자면 국내 영화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지만 영화제 자체의 맛은 없다. 도떼기시장 같았다. 영화제의 주인공은 영화이지 레드 카펫을 밟는 영화인은 아니지 않은가 ? 그래서 부산 영화제'보다는 전주 영화제를 자주 갔었다(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다들 아실 것이다). 부산 영화제에 비해 조용할 뿐더라 상영 영화들도 더 알찼다. 그런데 요즘은 정치적 이해타산으로 변질된 모양이다. 영화인과 시네필을 위한 영화제가 아니라 정치 행정에 영화제를 이용하는 느낌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낙원동 아트시네마'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영화제가 더 알차다. 나는 전주에서도 1년 정도 머물렀다.
전주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에게 전주를 대표하는 맛집으로 안내해 달라고 주문하자 그가 내려준 곳은 어느 " 100년 전통 전주비빔밥 " 집이었다. 가격은 꽤 비싸서 일반 백반 가격보다 5배는 비쌌다. 맛, 없었다. 그 흔한 비빔밥들과 견주어 비교했을 때 맛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이 따위가 세계적인 맛인가 ? 한번 빈정이 상하자 계속 삐딱해져서 사람들이 전주 비빔밥'을 으뜸으로 칠 때마다 나는 심통을 부렸다.
" 이보쇼, 전통이라 함은 옛것을 그대로 계승하여 보존함을 뜻하는데 내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상식에 의하면 비빔밥은 바쁜 농사철에 일꾼이나 부역에 끌려온 백성들이 밥 먹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바가지에 이것저것 섞어 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제사 음식을 처리하기 위한 잔반 처리 방식'이라는 소리도 있으니 이래저래 좋은 의미는 아니지 않소 ? 비빔밥을 전통음식, 전통음식 하는데 전통, 전통, 전통 따지자면 농사철 일꾼들이나 부역에 동원된 백성이 먹던 음식을 재현해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오. 비빔밥은 엄밀히 말하자면 빨리빨리의 원조가 아니겠소 ? 전형적인 패스트푸드요 ! 음식이면 그냥 음식이지 뭔 놈의 전통 음식'이오. 전통 하나 들어갔다고 백반을 2만 원에 파는 상술이 나는 못마땅하오. 옛것은 모두 그리 좋답디까 ? 당신은 항상 말끝마다 겨레, 넋, 얼 따위를 섞어서 말하는 습관이 있던데 옛것이 그리 좋소 ? "
내가 보기에는 옛것은 무조건 훌륭하다며 전통'을 강요하는 사람은 " 새것 거부 증후군 환자 " 처럼 보였다. 전통에 대한 맹신은 자칫 국수주의자'가 될 공산이 크다. 시대가 변하면 세대도 변해야 하고, 따라서 문화도 변해야 한다. 음식은 시대를 반영하기보다는 당대'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명태가 많이 잡히면 그 전에는 몇 가지 없었던 명태 요리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음식은 당대의 먹거리 공급에 영향을 크게 받을 뿐이지 전통음식에서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 독립을, 밖으로는 민주 번영에 이바지하겠다고 꼴값을 떨면 안 된다는 소리이다. 음식에 국경이 어디 있나. 맛있으면 장땡이다.
스시'를 좋아하면 애국자가 아닌가 ? 전주'는 전통 문화의 도시답게 예스럽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 이미지'는 뭔가 작위적이어서 도시 전체가 민속박물관 같다. 전주는 " 보여주기 위한 도시 " 다. 임권택 감독의 < 달빛 길어올리기 > 는 전주 특산물 홍보 영화 같아서 보다가 잤다. 그가 전주 한지'에 대한 우수성을 알리려고 했다면 극영화가 아닌 다큐로 접근했어야 했다. 정성일은 분명 이 영화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을 것이다. 안 봐도 뻔하니깐 ! 비빔밥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지만 전주는 비빔밥만 빼고는 그럭저럭 좋은 도시'다. 웽이집에서 먹던 콩나물 국밥 맛을 잊지 못하고, 그 수많은 가맥집에서 보낸 불멸의 밤을 잊지 못하며,
베테랑 칼국수와 중앙시장 매운 순댓국도 잊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아가씨들이 예뻐서 좋다. 사실 나에게는 " 전주 " 하면 떠오르는 것은 영화제, 한옥마을, 비빔밥, 웽이집, 삼백집, 막걸리 거리'가 아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거리에서 나오는 노래 하나를 듣다가 갑자기 울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 내가 평소에 듣던 음악 취향은 아니었으니 즐겨 듣고 좋아할 만한 노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안개가 자욱한 바다 위 솟아오른 바위에서 사이렌이 부르는 노래처럼 들렸다. 나는 길을 걷다가 멈춰섰다. 서울에 두고 온 애인 생각이 났다. 전주 하면 항상 이 노래가 생각난다. 내가 전주를 떠나던 날 비가 왔다. 파란 방수 비닐'로 덮었으나 책 절반은 젖어서 울고 있었다. 나도 울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이 트럭은 금강 하구를 지나다가 전복되어 물에 빠졌다. 1.5톤짜리 트럭은 빠르게 바닥을 향해 내려앉았다. 차창 밖은 온통 캄캄했다. 차 앞 부분이 뻘에 쳐박힌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창문을 닫아 놓은 상태여서 물이 운전석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 정도 공기라면 5분은 버틸 수 있으리라. 나는 라디오를 켰다.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오늘 봄비치고는 많은 비가 내립니다. 운전 조심하십시요. 임현정이 부릅니다. 사랑은 봄비처럼.... "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 음악을 끝까지 들을 수 있는 희박한 공기를 선물한 죽음의 신에게 감사했다. 눈물이 봄비처럼 주르륵 흘렀다. 가사를 유심히 새겨들었다.
묻지 않을께 니가 떠나는 이유 / 이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 야윈 너의 맘 어디에도 / 내 사랑 머물 수 없음을 알기에 / 이해해 볼께 혼자 남겨진 이유 / 이젠 나의 눈물 닦아 줄 너는 없기에 / 지금 나의 곁에 있는 건 / 그림자 뿐임을 난 알기에 / 사랑은 봄비처럼 내 마음 적시고 / 지울 수 없는 추억을 내게 남기고 / 이제 잊으라는 그 한마디로 / 나와 상관없는 다른 꿈을 꾸고 / 이별은 겨울비처럼 두 눈을 적시고 / 지울 수 없는 상처만 내게 남기고 / 이젠 떠난다는 그 한마디로 / 나와 상관없는 행복을 꿈꾸는 너
기도해볼께 니가 잊혀지기를 / 슬픈 사랑이 다신 내게 오지 않기를 / 세월 가는 대로 그대로 / 무뎌진 가슴만 남아있기를 / 왜 행복한 순간도 사랑의 고백도 / 날 설레게한 그 향기도 / 왜 머물순 없는지 떠나야 하는지 / 무너져야만 하는지 / 사랑은 봄비처럼 내 마음 적시고 / 지울수없는 추억을 내게 남기고 / 잊으라는 그 한마디로 / 나와 상관없는 다른 꿈을 꾸고 / 이별은 겨울비처럼 두 눈을 적시고 / 지울 수 없는 상처만 내게 남기고 / 떠난다는 그 한마디로 / 나와 상관없는 행복을 꿈꾸는 너
- 사랑은 봄비처럼
사랑은 봄비처럼 내리고 이별은 겨울비처럼 내리는구나. 눈물이 앞을 가렸다. 눈물은 가면과 같아서 뒤가 없으니깐. 그러므로 눈물과 가면은 같은 말이다. 앞을 가리는 것은 눈물과 가면뿐이다. 나는 캄캄한 트럭 안에서 내 죽음에 쓰이는 장송곡을 감상했다. 그때였다. 옆에 있던 트럭 운전수가 내게 소리쳤다. " 안 내리고 뭐하쇼 ? 재수 없으라니깐 이게 뭔 꼴이람. 한 길도 안되니 다행이지 물이 깊었다간 황천길 갈 뻔했오. 오지게 재수없구마이. " 운전수가 와이퍼를 작동하자 진흙이 씻기면서 밖에 보였다. 트럭은 깊은 물에 빠진 게 아니라 얕은 물에 빠진 것이었다. 책들이 죽은 물고기처럼 둥둥 떠다녔다. 나는 낮은 신음소리를 토하며 말했다. " 시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