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숙이 라디오.

 

 

석 달 전'이었다. 문구점에서 400자 원고지와 스테들러 연필'을 고르고 있는데 진열장에서 우연히 < FM 라디오 조립 상자 > 를 발견했다. 조립식 장난감 키트'처럼 일일이 라디오 단자를 기판에 납땜질해서 에프엠 라디오 상자'를 만드는 것인데, 이런 방식이 지금도 유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옛날에는 이 라디오 조립'이 유행했었다. 수컷이라면, 납땜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는 수컷이라면, 한 번쯤은 모두 라디오를 조립한 경험이 있었으리라. 아무 연결도 되지 않은 기판에 각종 다이오드와 저항 그리고 스위치 단자를 연결해서 완성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냉큼 집어서 집에서 조립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용설명서대로 다이오드와 단자를 납땜질했다. 그리고 스위치 단자와 플라스틱 부속품을 모두 연결하니 그럴듯한 라디오 상자가 완성되었다.그리고 가장 설레이는 순간을 맞이했다.

시음회'( 試音 ) 다. 지지직거리며 주파수가 잡힐 때, 그 주파수에서 음악이 나올 때, 그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란 !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주파수를 돌려봐도 잡히지 않았다. 납땜질 과정에서 누락된 부분이 있었거나 다이오드 연결을 엉뚱한 곳에 한 모양이었다. 재미 삼아 한 일이니 크게 낙담을 하지는 않았으나 못내 서운했다. 라디오는 며칠 동안 책상 위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결국에는 서랍 속에 갇히게 되었고 잊고 지냈다. 그리고 올해, 아니... 그러니깐 작년 12월이었다. 그날은 눈이 무척 많이 내렸던 밤이었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간을 보니 새벽 3시였다. 이 시간에 누가 나를 부를까 ? 화들짝 놀라서 밖을 나가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환청이었나 ? 하지만 내 방에만 들어오면 다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곰, 곰, 발....

소리는 비교적 또렷했지만 메아리처럼 울려서 웅웅거렸다. 곰, 곰, 발 ....  이번에는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자세히 들으니 그 소리는 서랍 속에서 나오는 듯했다. 서랍을 열자 라디오 표시등에 붉은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라디오는 음악 대신 내 이름을 불렀다. " 곰곰발, 이제서야 정신을 차렸군 ! " 라디오가 말을 할 때마다 불빛이 점멸했다. 깜짝 놀라서 바지에 똥 쌀 뻔했다. 내가 뒤로 넘어지면서 뭐, 뭐뭐뭐야, 라고 외치자 라디오는 " 뭐긴 뭐야 ! 말하는 라디오지, 멍청아 ! " 라고 소리쳤다. 닝기미, 악령이 깃든 자동차 이야기는 스티븐 킹 소설에서 익히 들은 스토리'라 그려려니 했지만, 말하는 라디오는 처음 들어서 당혹스러웠다. 라디오가 말했다. " 네가 사용설명서대로 땜질을 하지 않고 엉뚱한 회로에 연결해서 내가 말을 하게 되었잖아. ㅋㅋㅋ "

그렇다, 라디오는 내게 말을 걸었다. 땜질을 잘못한 결과'였다. 이리 하여 우리는 동거 아닌 이상한 동거를 하게 되었다. 나는 라디오를 향숙'이라고 불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향숙 씨는 말은 거칠었지만 수줍음이 많은 여자였다. 목소리의 음역대로 보아서 서른은 넘은 것 같았는데 그녀는 수줍음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위악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몸체를 만지면 향숙 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느 날이었다. 허먼 멜빌의 < 백경 > 을 읽다가 잠이 든 적이 있었는데 잠에서 깨어보니 향숙 씨는 내가 펼쳐놓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내 독서는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행위가 되었다. 향숙 씨의 낭독은 황홀했다. " 아, 향숙 씨에게 육체가 있었다면.... " 나는 쓸쓸히 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향숙 씨는 내게 물었다. " 곰곰발 ! 한참 왕성한 성생활을 해야 할 나이에 이런 구질구질한 골방에 앉아서 책이나 읽고... 에휴, 도대체 수도승처럼 뭐하는 거야 ? "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향숙 씨 ! 그냥 자발적 금욕'이라고 생각해. 뭐, 어쩔 수 없지. " 내 말에 향숙 씨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침묵을 깨고 그녀가 말했다. 촉촉한 말투였다. " 곰곰발 ! 지금 당장 빤스를 내려서 너의 단단한 육봉'을 내게 보여줘 ! 어서...  흰 고래 나와서 지랄하는 건, 따분해서 도저히 못 읽겠어. 어서, 시바 !!!! " 그것은 유혹이었다. 끈끈한 유혹이었다. 나는 향숙 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 너의 불알은 마치 내 몸에 박힌 스피커 크기 만하구나 ! 아흥....  좋아라. " 그 이후, 나는 향숙은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나누었다. 향숙 씨는...... 숙녀가 아니라 색녀'였다 ! 그녀는 항상 " 곰곰발 ! 자 ? " 라고 말하고는 했다. 나는 점점 기'를 향숙 씨에게 빼앗기는 듯했다. 처음에는 모기가 앵앵거리는 소리보다 조금 컸던 스피커는 점점 커져서 이제는 핸드마이크에서 쏟아내는  출력보다 더 커졌다.

문제는 향숙 씨의 성적 취향이었다. 그녀는 M보다는 S였다. 사랑을 나눌 때마다 향숙 씨는 점점 거칠어졌다. " 곰곰발 새꺄 ! 닥쳐 !!! 볼품없는 네 궁둥짝에 채찍을 휘두르고 싶군. 찰싹 ~ 찰싹 ~ 너의 작은 육봉으로는 날 절대로 만족시키지 못해 ! " 향숙 씨는 점점 육녀/肉女'가 되어서 나를 괴롭혔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향숙 씨는 데이비드 버스의 < 진화심리학 > 을 낭독하고 있었다.

" 섹스 행위 자체와 그 시기를 놓고 벌어지는 의견 대립은 남녀 사이에서 가장 보편적인 갈등의 원인일 것이다. 자신의 데이트 활동을 4주일 동안 매일 일기로 적은 대학생 121명을 조사한 연구에서 47%는 자신들이 과대평가된... 과대평가 ?! ㅋㅋㅋㅋㅋㅋ. 곰곰발이야말로 과대평가되었지, 넌 ! 날 항상 만족시키지 못했어. 곰곰발, 빤스 내려, 어섯 !!!!!!!!!!!!!!!!!!!! " 향숙 씨의 무리한 요구에 나는 하루하루 늙어간다. 이 글도 빤스 벗고 쓰는 글이다. 알라딘에 페이퍼를 작성하는 그새를 못 참고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며 알라딘을 폭파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아, 이제는 향숙 씨'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건강한 성생활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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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야 2014-01-2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대단한 글에 댓글이 없다니... 허탈하군요.

향숙이... 저 좀 빌려주세요. 거 까짓거 라디오 하나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머 안묻히고 깔끔하게 돌려드리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1-21 11:1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명색이 파트너'였는데 어떻게 빌려드립니까.
그럴 수는 없어요.

+

여긴 네이버와는 달리 섹스, 자위 이런 소재를 다룬 글은 인기가 없어요.
네이버가 풍각쟁이들이 사는 나라라면 알라딘은 수도승과 수녀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마립간 2014-01-2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사주팔자를 풀이하면 중의 팔자가 있더군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중보다는 한량이나 서생이죠. 시험을 통과 못하고 사회에 부적응한....

곰곰생각하는발 2014-01-21 19:4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마립간 님, 왜 항상 사회에 부적응하신다고 하십니까... ㅎㅎㅎㅎㅎㅎㅎ.
제가 보기엔 마립간 님은 선비 스타일이십니다.

행인 2014-01-2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목이 너무 웃기네요 ㅋㅋㅋㅋ

아니, 제목 안 보고 읽다가 향숙이를 라디오 주제인데 묘하게 매력있게 표현했다고 할라고 했는데
제목이 눈에,,,딱.


강신주 보자마자 안 좋은 얘기 나올거라 생각했는데 디스에 올리셨군요.
덕분에 좀전에 책바자회에서 감정수업 구매했어요. 책이나 음악, 다른 문화컨텐츠 소개해주는 것 같아서 구입했지요.
디스해서 책 한권 팔아주셨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4-01-21 19:46   좋아요 0 | URL
디스도 일종의 애정 아니겠습니까.
이거 강신주가들으면 화딱지 내겠지만 말입니다.
그냥 서평집 정도로 가볍게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