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무늬만 목재인 것들은 절대로 쓰지 않는 구식 일꾼들을 안다. 그런 목재는 일에 전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다. 숙련된 일꾼은 결심 판사과도 같다는 것을. 왜냐하면 나무는 대패(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나 도끼(역시 패물이 된) 아래에서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성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손으로 느꼈기에 나의 눈으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문외한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 채찍처럼 질긴 " 톱밥과 " 당근처럼 쐐기꼴을 한 " 톱밥의 차이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으며, " 썩은 " 느낌과 " 푸석푸석한 " 느낌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참나무건 너도밤나무건 이런 차이들은 다 고르게 있다. 하지만 실제 작업을 해본 사람들만이 그것을 안다.
- 조지 스터트, The Wheelwright's Shop, < 모든 것은 빛난다' >에서 발췌
대한민국 기독교는 기복 신앙'에 뿌리를 둔다. 내 가족이 아무 탈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신앙 간증을 들어보면 "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 는 말은 틀린 말처럼 느껴진다. 레파토리'가 하나같이 똑같다. 개과천선'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결과를 신의 도움으로 극복한다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최루성 가족 드라마'다. 기적을 경험한 간증인은 매사에 감사요, 축복이니 할렐우야, 다. 대한민국 대표적 삐딱이'인 나는 이 거지같은 노예 근성 앞에서 눈물은커녕 콧물만 훌쩍거리게 된다.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나서 나를 가엽게 여겨서 선도 대상으로 선정한 후 집중 관리 대상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나 또한 감동적인 설교에 감읍해서 주를 섬기는 종이 되고 싶다.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을 가르친 성자'였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만 가르친 성자'라고 말하면 그것은 틀린 말'이 된다. 그는 사랑과 함께 아름답게 분노하는 법도 가르쳐준 성인'이었다.
그는 선동가였고, 혁명가였다. 그런데 대한민국 기독교는 이 대목은 쏙 빼먹은 채, 예수를 계룡산 뜬 구름 위에서 뒷짐 지고 설교하는 모습으로 이미지化한다. 우우, 하지 마라. 당신 입에서 와와, 를 기대한 것도 아니다. 예수가 당신의 소원 나부랭이 따위나 들어주는(당신의 간절한 소망 따위나 들어주는) 그런 하찮은 인물이라면 나는 차라리 산타클로스'를 신으로 섬기겠다. 붉은 악마 응원단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멋진 슬로건'을 내걸고 광장으로 집결했지만 4강의 기적은 간절한 기도가 응답한 결과가 아니라 홈 어드밴티지'가 적용한 오심이 결정적 이유였다. 당시에 우리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기세가 등등했고 허세가 하늘을 찔러서 앞을 보지 못했다.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부흥 집회 때마다 간증 시간에 오르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기적'은 신이 응답한 결과가 아니다. 만약에 신이 당신처럼 보잘것없는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라면 신은 당신보다 더 꾀죄죄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당신이 자식이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를 하거나 딸이 좋은 남편감을 만나도록 기도했을 때, 신이 그 응답을 들어주느라 바쁜 잔무에 시달려서 정작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비극적 상황을 모르고 지나쳤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진짜 신앙인'은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안다. 자기 자식새끼에 대한 청탁은 하지 말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 기독교는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유는 行 할 수 있으면서 不行 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다 아는 바, 예수는 기적을 행하는 자'이다. 앉은뱅이를 서서 걸을 수 있게 만들었고 나병 환자의 병을 치유하였으며 앞을 볼 수 없는 자는 앞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하지만 예수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채찍이 살 속을 파고들어도, 못이 손과 발을 뚫어도, 한 모금의 물이 목숨보다 간절한 순간이 와도 그는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나라면 그리고 당신이라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 아마도 온갖 요술을 부려서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다. 내가 이 지점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 " 예수는 < 나 > 가 아닌 < 너 > 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그런 점에서 사이비 한국 기독교 목사들이 믿음의 결과가 행복과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예수는 행(幸) 과 불행(不幸)'을 말한 자'라기보다는 기적을 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하지 않은 < 行과 不行의 철학 > 에 대해 말한 성자'였다. 기독교의 참된 미덕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행복(幸福)을 얻으려는 욕망이 아니라 권력을 행할 수 있지만 행하지 않는 不行 에 있다. 초월적 힘을 남용하지 않으려고 했던 예수의 깊은 뜻이었다. 성서는 " 잘 표현된 不行 " 에 대한 텍스트이다. 그러므로 기적이 넘쳐나는 한국 기독교 간증 집회는 가짜'다.
< 모든 것은 빛난다 > 에서 저자는 호메로스를 통해서 다신주의를, 기독교를 통해서 유일신의 등장을 고찰한다. 저자가 보기에 일신주의는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이러한 부작용은 결국 니체가 신은 죽었다, 고 선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니체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은 니체가 " 신의 죽음 " 을 선언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신'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니체는 무신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다신주의'로 돌아가자는 의미에서 신은 죽었다고 말했을 뿐'이다. 저자는 6장 < 백경 > 을 통해서 " 우주는 인간에게 무관심하다 " 는 사실'을 읽어낸다. 내 식대로 말하자면 "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 " 이다. 요즘 유행하는 < 응답하라 시리즈 > 로 설명하자면, 당신이 아무리 신에게 삐삐를 치고, 시티폰으로 통화를 시도해도 신은 당신의 전화를 생깐다. 그는 지구를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우주를 다스리는 자'다. 광활한 우주를 중심으로 보자면 지구는 모래알처럼 작지 않을까 ?
당신이 자꾸 " 하느님, 응답해주세요 ! " 라며 징징거린다면 당신은 하느님을 꾀죄죄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불경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배교자(背敎者) 는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결국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신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 이웃의 대부분은 노동자'다. 그러므로 노동자를 사랑해야 한다. 조지 스터트는 " 나 자신의 손으로 느꼈기에 나의 눈으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문외한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 채찍처럼 질긴 " 톱밥과 " 당근처럼 쐐기꼴을 한 " 톱밥의 차이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으며, " 썩은 " 느낌과 " 푸석푸석한 " 느낌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 " 다고 말했지만 배운 게 많은 놈들은 그 느낌의 차이를 허세 가득한 문장으로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는 있다. 대패를 만져본 적도 없는 놈들이 하는 말이니 그 말은 그럴 듯하자만 가짜다. 기적을 경험한 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
훌륭한 목수가 연장 탓을 하지 않는 이유는 대패질을 하기 전에 이미 좋은 목재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연장을 망가뜨리는 것은 질 나쁜 목재'이니 자신이 가진 연장이 망가졌다는 사실은 좋은 목재를 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옛날, 예수는 목수'였다. 목수의 나무 木에 손 手다. 목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득을 취하는 자가 아니라 오로지 팔의 힘으로 먹고 사는 독립적 인간이다. 그것은 신에 의지해서 징징거리는 나약한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어떤 숭고한 지점이다. 성경을 펼쳐 본다. 잘 표현된 不行'을 읽는다. 사진 속 남자는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가 배운 것은 인간 서열에 따른, 인간 관계에 따라서 얻게 되는 이득이 아니었다. 오로지 手의 힘으로 가계를 이룬 숭고함이었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 나 자신의 손으로 느꼈기에 나의 눈으로 아는 " 사람이었다. 아들은 커서 어른이 되었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으며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도 손으로 느꼈기에 눈으로 아는 사람'이 되었다. 건투를 빈다.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