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와 대자보 !
대자보'는 大, 字, 報 다. " 대학가에서 내붙이거나 걸어 두는 큰 글씨로 쓴 글( 네이버 국어사전 ) " 이다. 유래는 중국 인민이 자기의 견해를 주장하기 위해 큼지막하게 써붙이던 벽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깐 일종의 벽보'요, 저잣거리에 내걸린 방(榜) 이다. 대자보에 실린 내용은 대부분 귓속말로 소근소근대는 감성'보다는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드는 진영 논리를 대변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진영 논리'는 피를 뜨겁게 달굴지언정 그 확장성에는 한계'가 있다. 운동권이라는 자장 안에서만 울림을 준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 " 안녕 대자보 현상 " 은 그 양상에 매우 다르다. 감성'에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 모두들 안녕하십니까 ? " 라는 안부가 대중의 눈물샘을 건드린 것이다. 신파'라고 해도 좋고 통속이라고 해도 좋다. 누군가는 불순한 정치 세력의 개입'이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은 별로 없을 듯싶다.
< 벽보 > 라는 낱말이 주는 느낌에서 알 수 있듯이, 대자보'는 소통을 전제 조건'으로 한 메시지'가 아니다. 일방적인 게시, 통보, 알림'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응답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다양한 울림으로 도착했다. 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메아리'를 향해 누군가는 다시 응답했다. 그리워서 허공을 향해 " "오갱끼데스까(おげんきですか)? " 라고 물은 안부가 "와따시와 갱끼데스(はたしわ げんきです)." 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안녕하지 못한 세상에서 안녕하냐고 묻자 안녕하지 못한 세상이어서 안녕하지 못하다고 대답했으나 속내는 서로에 대한 안부'이다. 운동권이 머리띠와 걸개 그림 그리고 불끈 쥔 주먹으로 연대했다면 < 안녕 > 이라는 감성 코드'는 일기처럼 쓰여진 손편지로 연대를 하기 시작했다. 선동의 언어'가 아닌 사랑의 언어'로 말이다.
세상이 하, 수상해서 답답한 마음에 말을 할 리 없는 벽을 보고 외쳤으나 벽이 대답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프랑스어 벽/mur과 사랑/amour은 닮았으니깐 말이다. < 안녕 대자보 현상 > 을 두고 여의도 정책 연구원'은 이 기괴한 현상'을 어떻게 분석해야 될지에 대해 난감할 것이다. 불순 세력의 개입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감성적이며 종복 좌파의 선동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여성적이다. 더군다나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이 안녕이라는 현상에 더 많이 반응하는 것을 두고 혼란스러울 것이다. 혹시 여의도 정책 연구원'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들에게 이와이 슌지의 < 러브 레터 > 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권하고 싶다. 그리고 나서 < 안녕 대자보 현상 > 을 분석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 영화 속 주인공 후지이'가 아버지를 잃고 나서 앓는 독감은 대한민국 20대 젊은이가 노무현을 잃고 나서 앓는 독감과 비슷하다.
사랑과 감기의 공통점은 숨길 수 없다는 점에 있고, influenza/감기와 influence/감응력’의 공통점은 강력한 전염에 있다. 손편지처럼 쓰여진 대자보는 20대 젊은이가 앓고 있는 감기'다. 전에 써두었던 < 러브 레터 > 라는 글에서 부분 발췌해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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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주인공 후지이’는 시종일관 독감을 앓고 있다. 카메라가 그녀의 사연을 훑으면 몇 년 전에 독감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지금 딸은 죽은 아버지가 앓던 독감을 앓고 있다. 정신과 의사’라면 후지이의 독감’을 < 강박 신경증 > 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니깐 후지이’가 앓고 있는 감기’의 원인은 독감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 아니라 죽은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에 따른 집착’이 원인이다. 후지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 기침을 흉내낸다. ” 그녀는 기침을 흉내 냄으로써 죽은 아버지’를 계속 상기시킨다. 아버지의 몸 속에 있던 바이러스’는 고스란히 딸의 몸 속으로 침투한다. 그런데 여자 후지이’의 상황은 묘하게 여자 히로코’와 겹친다. 히로코의남자친구는 죽은 후에도 히로코’에게 영향을 미친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강력한 감응력이다.
히로코의 몸 속에는,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지 못한, 2년 전에 죽은 후지이’가 있다. 내 안에 너 있다. 애도 행위’는 슬픔의 절차’를 통해서 타자’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는 태도인데, 여자 후지이와히로코’는 애도’라는 절차 과정 없이 바로 우울증’에 빠져서 죽은 타자(들)은 그녀(들) 곁에서 떠나지 못하고 맴돈다. 그래서 죽은 자’는 산 자의 몸 속에서 산다. influenza/감기와 influence/감응력’의 공통점은 강력한 전염에 있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이어서 쓰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 문장에서는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서 인용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과 감기에 걸린 사람의 얼굴은 숨길 수가 없다. 그들은 심한 몸살을 앓는다!히로코와후지이는 같은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매우 강력한 하나’이다. 히로코는 우울증을 앓고 있고, 후지이’는 독감을 앓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날마다 훌쩍인다는 점이다.
영화는 히로코’가 죽은 남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애도’로 돌아서서 그를 용서하는 것으로 끝난다. 동시에 오타루첩첩산중 얼음 골짜기 마을에 사는 여자 후지이’도 독감을 떨쳐버리고 건강을 찾는다. 감독은 이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면서 “주술의 동일화“를 강조한다. 드디어 그들은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아버지’를보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뽑으라고 하면 백이면 백, 메아리 장면과 독서 카드 장면을 뽑을 것이다. 히로코는 사랑하는 사람을 삼킨 설산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 잘 있나요 ?“ 이번에는 메아리가 된 죽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 잘 있나요 ?“ 여자는 답한다. “ 전 잘 있어요 !“ 남자도 답한다. “ 저도 잘...있습니다 !“ 워낙 유명한 장면이어서 잊혀지기 힘든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메아리’는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과학 시간’에 졸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라면 메아리의 원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소리가 산이나 벽’에 부딪혀서 되돌아오는 것이 바로 메아리’다. 히로코가 설산을 향해 잘 있나요 ? 라고 부를 때, 그녀의 소리는 설산의 벽에 부딪혀서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것이다. 설산의 벽’이 사랑하는 사람을 삼킨 주체’라는 점( 남자는 등반 중 사고로 죽는다. ) 을 감안한다면 이 메아리’는 사랑하는 남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히로코는 남자가 자신의 곁을 떠난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안부를 묻는다. 그것은 < 당신이 나만 남겨두고 내 곁을 떠날 수 있어 ? 어떻게 그럴 수 있어 ?> 라고 화를 내는 것과는 다르다. 그녀는 지금 애도’를 한다. 이처럼 사랑과 용서의 시작은 바로 발화’이다. 사랑이란 주고 받는 것이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편지의 소통 기능’처럼 말이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한다고 외쳐야 한다. 그래야지 설산도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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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 노무현의 죽음 > 도 이제 4년이 지났다. 하지만 쉽게 잊기에는 지나치게 폭력적이었다. 애도의 기간은 없었다. 7월의 우기처럼 우울'이 집요하게 길게 이어졌다. 후지이'가 죽은 아버지를 잊지 못해서 감기를 흉내 내고 히로코가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해서 우울증에 빠지듯이, 대한민국 20대 청춘 또한 감기를 흉내 내거나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집단적 감염이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슬픔을 나누지 못하고 혼자서 간직하면 우울이 된다. < 안녕 대자보 > 에서 그들이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며 안녕하냐고 묻는 것은 일종의 애도'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놓아주고 내 이웃에게 눈길을 돌리자고 제안한다. 혼자서 간직하던 슬픔을 이제는 나누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나도 당신에게 묻겠다. 오갱끼데스까(おげんきですか)? "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신이 할 차례다. "와따시와 갱끼데스(はたしわ げんき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