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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평점 :
피라냐 떼'가 혓바닥을 물어뜯는 맛.
스티븐 킹 전작주의자'는 아니지만 그가 쓴 소설이나 에세이'는 대부분 찾아서 읽는 편이다. 다른 뜻은 없다. 그가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 열혈 팬이기 때문에 좋아한 것도 아니고, 민주당 지지자'이기 때문에 좋아한 것도 아니다. 그냥 재미있으니깐 읽는 것이다. 그에게는 " 공포소설의 제왕 " 이라는 왕관이 꽤나 잘 어울리지만 자칫 잘못하면 공포소설만 잘 쓰는 작가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이 타이틀'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는 " 공포소설의 제왕 " 이 아니라 " 소설의 제왕 " 이다. 그리고 소설 못지않게 에세이 분야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 공포소설만 쓰는 게 지겨워서 습작처럼 썼다는 < 사계 : 리타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우등생, 스탠 바이 미, 호흡법 > 는 놀라서 다시 볼 정도로 뛰어난 걸작이었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독자는 없을 것 같다.
오죽했으면 소설가 장정일이 < 독서일기 > 에서 사계를 언급하면서 "스티븐 킹이 이 단편을 쉬어가는 의미에서 쓴 작품이라면 한국의 작가는 다 죽어야 한다." 며 넥타이 공장이나 차려야 한다고 말했을까. 빈말이 아니다. 한국의 작가들이 배워야 할 작가는 제임스 조이스가 아니라 스티븐 킹'이다. 한국 작가들이 독자는 거들떠도 안 보고, 평론가들에게 매달려 구애를 보내는 태도는 지향해야 될 덕목이 아니라 지양해야 될 대목이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비겁하다. 고전은 재미있기에 오래 읽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스티븐 킹은 재미와 작품성을 두루 갖춘 작가이다. 그는 교양 어투 대신 저잣거리 입말을 사용해서 작품에 생생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하지만 모두 다 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킹의 저잣거리 입말을 개짓거리 쌍말'이라고 폄하하는 클래식한 교양인'도 있을 터이다.
녹차를 즐겨 마시며 티타임을 한가롭게 보내는 교양인이 보기에는 킹의 소설이 영 못마땅할 것이다. 스티븐 킹 특유의 저잣거리 입말이 까끌까끌하고 거친 맛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치 탄산 거품이 혓바닥을 사정없이 긁어내리는, 코카콜라 특유의 톡 쏘는 맛처럼 말이다. 스티븐 킹'이라면 이 맛에 대하여 " 피라냐 새끼들에 떼거지로 몰려와서 내 혓바닥을 물어뜯는 맛이군 ! " 이라고 묘사하지 않았을까 ? 내가 킹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바로 그 맛 때문이다. 나는 피라냐가 떼거지로 몰려와서 혓바닥을 물어뜯는 것 같은, 그 거친 문장 때문에 매료되어 킹'을 읽는다. 이런 문장은 찰스 부코스키와 함께 독보적이지 않을까 싶다. 스티븐 킹은 작법서'라며 자세를 낮춘 인생론 < 유혹하는 글쓰기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글쓰기에서 정말 심각한 잘못은 낱말을 화려하게 치장하려고 하는 것으로, 쉬운 낱말을 쓰면 어쩐지 좀 창피해서 굳이 어려운 낱말을 찾는 것이다." 킹의 지적은 글쓰는 요령이기에 앞서 그가 가진 평소의 철학에 가깝다. 압축미도 좋고, 세련된 은유도 좋고, 미문도 좋지만 모든 문학 작품을 한 가지 입맛에만 맞추면 쉽게 질리게 된다. 영화 < 올드보이 > 에서 최민식이 복수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그 지긋지긋한 군만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군만두 대신에 딤섬을 제공했다면 복수의 서사'는 용서로 끝났을 것이 분명하다. 음식도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건강에 좋듯, 문학도 편애 없이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최신작 < 11/22/63 > 은 시간 여행'이라는 그 흔한 공상과 케네디 암살 사건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엮어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가 원고지 7000매 분량의 소설 [ 언더 더 돔 / 2009年 ] 을 출간한 지 2년 만에 다시 5000매 분량의 < 11/22/63 > 를 선보였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작가 생활 40년 동안, 그가 쏟아낸 작품이 무려 500여 편이 넘는다. 이 가운데 장편만 50편이다. 이처럼 그는 천재적 재능을 갖춘 작가이면서 동시에 노력하는 작가'이다. 그는 제 2의 조르주 심농이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 과거 1958년 " 은 킹이 10살 때'이다. 문득, 열 살 무렵의 어린 소년은 무엇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가 유년 시절을 회고한 에세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킹에게 있어서 1958년은 유독 기억에 남는 해'였던 것 같다. 그는 < 유혹하는 글쓰기 > 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 그것은 1958년의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센터 초급 중학교에 다녔고, 데이브 형은 스트랫퍼드 중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스트렛퍼드 세탁소에서 일했는데, 세탁부 중에서 백인 여자는 어머니뿐이었다. (p.36) " 라고 말하는가 하면 " 나는 1947년에 태어났고 우리가 처음으로 텔레비젼을 구입한 것은 1958년이었다. (p.39) " 고 말한다. 그리고 가난한 어머니가 푼돈을 모아서 킹에게 로열 타자기'를 선물한 때도 그 즈음이었다. 첫 번째 텔레비젼과 첫 번째 타자기, 어쩌면 그해는 어린 킹에게는 지상 최대의 해'였을 것이다. 그는 로열 타자기로 작성한 단편 원고 한 편을 투고했다고 회상했는데 그해가 1960년이다. 출판을 목표로 한 첫 번째 소설이었다. 이처럼 < 11/22/63 > 를 관통하는 과거 1958 ~ 1963년은 작가 킹이 소설가로써 꿈을 키웠던 시발점이자 근원'이었다.
만약에 칠순에 가까운 노인이 된 그가 과거로 돌아가서 일주일 간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주저없이 1958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까 ? 당신이 열 살 무렵을 회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 아마도 < 맛 > 에 대한 추억이 아닐까 싶다. 프르스트가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에서 마들렌 과자를 통해 유년을 회상하듯, 킹은 그 시절에 먹던 맛을 제일 먼저 기억했을 것이다. 우리가 유년 하면 "달고나"와 "쫀드기"를 떠올리듯이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 제이크 에핑'이 과거로 돌아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신문과 함께 간단한 음료를 파는 가게에 들려서 " 루트비어 " 라는 탄산음료를 마시는 일이었다. 루트비어는 이름과는 달리 무알콜 탄산음료로 색깔과 톡 쏘는 맛이 콜라'를 닮았다. 속살 고운 아이들이 마시기엔 피라냐가 혓바닥을 물어뜯는 맛일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루트비어'를 마시고는 "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깜짝 놀랐다. " 고 고백한다. 그 고백은 마치 여자의 가슴을 처음 만져보고는, 말캉말캉한 가슴이 솜사탕처럼 부드럽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소년의 독백처럼 들린다. 주인공 제이크 에핑은 젊은 스티븐 킹이 투영된 캐릭터'이다. ( 킹 또한 젊은 시절에 제이크 에핑처럼 교사로써 학생들에게 작문을 가르쳤다.) " 지상 최대의 해 " 로 시간 여행을 떠난 " 지상 최악의 해 " 에서 온 사내는 영화 < 터미네이터 >에서 젊은 용사로 나온 카일 리스 ( 마이클 빈 ) 를 닮았다. 영화 < 터미네이터 > 에서 카일 리스'가 지키고자 했던 이가 미래의 지도자 존 코너'였다면, 소설 < 11/22/63 > 에서 제이크 에핑이 지켜야 했던 이는 케네디'였다. 그는 과연 케네디'를 지켜낼 수 있을까 ? 킹은 시간여행자'라는 흔한 공상 소설과 차별을 두기 위해 몇 가지 다른 장치'를 마련한다. 이 장치들은 아직 이 소설을 읽은 않은 독자를 위해 아껴두련다.
언젠가 헤밍웨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야 한다 ! " 맞는 말이다. 킹은 과연 좋은 작품을 얻기 위해 이 소설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을까 ? 젊은 킹'이었다면 작품에 욕심이 많아서 생각할 틈도 없이 사랑하는 것들을 죽였을 것이다. 그가 그동안 죽인 등장인물을 생각하면 그는 지독한 인간이다. 하지만 한국 나이로 환갑이 지난 킹은 이 작품에서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 작품성 > 과 < 사랑하는 것 > 사이에서 방황한다.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죽인 것에 대한 참회일까 ?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이 갈등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무시무시했던 킹'이 이제는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이며 말랑말랑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책을 덮고 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용필'에게 열광했던 단발머리 여고생이 4,50대 중년 여성이 되어 조용필 무대를 찾아와 눈물을 쏟듯,
콧물 흘리며 스티븐 킹 소설을 밤새 읽던 내가 지금도 여전히 킹의 신작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좋아하는 작가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무한한 감동이다. 조용필을 사랑했던 중년의 팬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무대'는 항상 마지막 무대였듯이, 나에게도 킹의 최고 걸작은 항상 마지막 소설이었다. 이 작품이 비록 작품성과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멜로 드라마'로 살짝 빠졌다 해도 나에게 킹은 언제나 킹이었다. 그렇다고 킹 특유의 문장이 바뀐 것은 없다. 피라냐가 떼거지로 몰려와서 혓바닥을 물어뜯는 문장 또한 여전하다. " 어떻게 지내쇼, 나잇살 처먹은 대머리 양반 ? 요즘 들어 뜨끈뜨끈한 닭 똥구멍에 대고 붕가붕가라도 했나 몰라 ? ( p.79) "
킹 할아버지 !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 소설 읽으면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보내고 있습니다. 붕가붕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엄마에게 물었다가 따귀를 맞았어요. 헤헤. 하지만 괜찮아요. 그런데 다음 신작은 언제 나오나요 ?
신작 언제 나오나요, 에 대한 답 : 기쁜 마음으로 스티븐 킹의 신작 소설 출간 소식을 알린다. 올 9월 < 닥터 슬립 > 이라는 장편 소설을 선보인 모양이다. 아마, 내년이면 한국 독자들도 이 소설을 접하지 않을까 싶다. 속편을 쓰지 않는다는 고집을 꺾고 이번에는 < 샤이닝 그 후 > 를 다룬 내용이라고 한다. 잭 니콜슨이 연기했던 알콜중독자이자 미치광이 잭 토랜스의 아들이 아버지 없는, 동정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서사이리라. 물론 이 눈물의 의미가 슬픔이 아닌 공포에서 연유된 것이란 사실은 안 봐도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