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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균형은 발끝이 아니라 손끝에서 나온다.
김신용 시인은 시 < 공, 혹은 空 ? > 에서 누가 가지고 놀다 버린 바람 빠진 공'을 보는 순간 " 늙은 작부처럼 주름투성이의 쭈글쭈글한 얼굴 " 을 떠올린다. 이 쭈글쭈글한 얼굴'은 공기를 채우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노화'다. 시인은 잠시 상념에 젖다가 내뱉는다. " 공의 내장이었던 공기, / 자신의 오장 육부를 이루고 있던 공기... " 시인이 < 공기 > 를 공의 내장'이라고 말할 때, 나는 무릎을 아, 쳤다 ! 그리 어려운 수사'는 아니다. 시인은 내부는 공(空)이면서 외부는 가까스로 외형만 구(球)인 쭈글쭈글한 공'을 본다. 시인은 空이면서 球인 척하는 공'을 보면서 회춘을 버리지 못한 늙은이의 욕망을 읽는다.
공은,
다시 한번 그 공기가 불어 넣어진다면
요가처럼, 허공에서도 머물 수 있다는 듯이
미확인 비행물체처럼, 무중력 속에서도 비행할 수 있다는 듯이
그 쭈글쭈글한 주름투성이의 얼굴로
온갖 쓰레기와 뒤섞인 덤불 속에 앉아
수로의,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다
스며드는 물에 쭈그러진 몸을 한껏 부풀리며
부정 축재로 감옥으로 끌려가는 그 독재자처럼
- < 공 혹은 空 > 중에서
이 심상은 고스란히 기형도의 < 노인들 > 이란 시와 겹쳐진다. "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 김신용이 공이면서 구인 척하는 공'을 통해 쥐새끼 같은 욕망을 읽는다면 기형도는 고사목 가지'를 통해 늙은것의 욕망을 읽는다. 球인 척하는 空이나, 부러지지 않고 죽은 가지나, 죽은 척하는 생태'는 모두 다른 계열과 계통에 속하지만 결국은 한통속'이다. 이러한 행간 읽기는 소설과 시 읽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평론가가 아니어도 이해 가능한 범위'이다. 시'란 본질적으로 서사를 압축하는 형식이기에 필연적으로 독해가 필요하지만 너무 해독 불가능한 자폐적 언어'로 시를 쓰면 나 같은 독자는 독해가 불가능하게 된다. 해독 불가능한 자폐적 언어'를 두고 평론가들이 시인의 귀족적 독백'이라며 설레발을 치면 독자는 한숨만 나온다.
시의 상징과 은유는 보편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함의에서 울림'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해독 불가능한 자폐적 언어'에서는 얻을 수 없다. 자폐적 언어로 시를 쓴다고 해서 모두 다 이상 같은 시인의 명성을 얻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독자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평론가를 위해, 그리고 < ●● > 출판사만을 위해 시를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웃기는 짬뽕이 된다. 신형철은 < 몰락의 에티카 > 에서 남진우를 " 좋은 의미에서 시의 귀족주의자 " 라고 말했는데, 나는 이 표현에 대해 절반은 수긍하고 절반은 손사래'를 친다. 신형철이 남진우를 가리켜 " 시의 귀족주의자 " 라고 한 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남진우는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 나쁜 의미에서 시의 귀족주의자 " 이다. 남진우 시는 공허한 관념만 떠돌다가 죽도 밥도 아니요, 찌개인지 국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애매모호하게 되었다.
국이라고 하기에는 짜고, 찌개라고 하기에는 싱거워서 나는 남진우라는 음식을 냄비에 담아야 하는지 아니면 국 그릇에 담아야 하는지 잠시 망설이게 된다. 관념적 공허만 남발한 채 자기 상처와 환부는 철저하게 감추는 것은 시덥지 않으며 시시한 시'다. 밑바닥에 발 딛지 않고 계룡산 구름 위를 쳐다보는 관조는 곤조(根性 こんじょう ) 가 되기 쉽다.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지나치면 색깔이 아니라 성깔이 된다. 살롱에서 캐비어를 안주 삼아 비어 한 잔 하기에는 좋지만 이 귀족성에 박수를 칠 만한 독자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누가 백로이고 누가 황새인지는 모르겠으나 신춘문예를 위해서 문학 지망생을 스파르티식 교육으로 가르치는 몇몇 국문과/문창과'를 보면 기이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동네마다 걸린 " ●● 고, 서울대 23명 합격 " 이라는 플래카드'처럼 " ●●● 사단 신문문예 등단 7명 배출 " 이라는 플래카드'에서 어떤 기이한 한통속이 읽힌다.
신형철은 < 몰락의 에티카 > 책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 4년 전에 첫 글을 발표한 지면이 문학동네다. 편집위원 여섯 분 선생님의 가르침과 격려 덕분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써왔다. 마지막 글을 발표하는 지면도 문학동네가 되었으면 좋겠다. " 이 글을 읽다가 피식 웃었다. 감사를 표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마지막 글을 발표한 지면도 문학동네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뭔가 대형출판사에 대한 아부처럼 느껴졌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 나는 신형철이 문학평론을 하면서 詩人도 겸하는 겸직은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평론을 하면서 시'까지 쓰는 것은 뭔가 불편하다. 나는 문학평론가와 소설가/시인'은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가 시인들과 가까우면 인정에 끌려서 균형잡힌 시각은커녕 주례사나 정실 비평만 남발할 것이 뻔하다.
내 식구 챙기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도 없다. 이 두 집단이 뭉쳐서 서로 " 우리 친구 아이가 ! " 라고 하면 안 된다. 죽은 척하는 생태'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니 안쓰럽기나 하지, 친하지도 않으면서 친한 척 어깨동무하는 꼴은 꽤나 우습다. 어깨동무하지 마라. "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둘이 친구 아닙니다 ! " 외줄을 탈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곳은 줄을 딛는 발끝이 아니다. 손끝이다. 균형 감각은 줄과 맞닿은 발끝이 아니라 줄과 가장 멀리 떨어진 손끝에서 온다. 문단과 거리를 둘수록 좋은 문학이 탄생한다. 손창섭과 권정생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하자. 중요한 사실이니깐 말이다. 손창섭과 권정생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손창섭과 권정생 그리고 김신용은 문단과 가장 멀리 떨어진 손끝이었다.
덧
힙합 정신'으로 말하자면 라임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플로우(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촌스러운 랩이 된다. 하지만 플로우가 자연스러우면 라임이 무너져도 촌스럽지는 않다. 진정한 래퍼는 라임보다는 플로우에 신경을 쓴다. 라임이 형식미'라면 플로우는 아우라'다. 이처럼 기교가 지나치면 정신이 훼손되는 법이다. 문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권정생은 기교 없는 문장을 선보이지만 플로우가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무덤덤한 기교는 오히려 문장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서 아름답다. 반면 지나치게 기교적인 문장은 촌스럽다. 온갖 기교가 나이트클럽 뺑뺑이 조명등처럼 현란하게 돌아가지만 부자연스럽다. 무교가 기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