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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 ㅣ 시작시인선 49
김신용 지음 / 천년의시작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곳곳에 스며들지만 번지지 않는,
< 글 > 을 읽지만 < 글 > 을 믿지는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글쓴이가 쓴 글이 구구절절 옳다고 해서 그 사람 됨됨이'를 글로 평가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보다 글과 행동이 다른 경우가 더 많다. 글을 보고 사람 됨됨이'를 평가하느니 차라리 직접 목소리를 듣고 평가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음량과 음성 그리고 수정과 검열이 배재된 목소리는 수정과 검열을 통해 만들어진 문장'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노점상 자릿세나 받아먹는 건달 새끼들도 말을 할 때는 육두문자를 사용하지만 글을 쓸 때는 구구절절 옳은 소리만 한다. 팔뚝을 보면 알 수 있다. " 차카게 살자 ! " 이 얼마나 감동적인 글인가 ! 착하게 살자는데 감동 안 할 위인 없다. 원석은 가공을 해야지만 보석이 되듯이, 글 또한 행동과 일치할 때 가치를 얻는 법이다. 글보다 헛것인 것도 없다. 내가 독한 언니 김미경, 쓸데없는 오지랖 김난도, 뜬구름잡이 혜민'에게 " 너나 잘 하세요. " 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乙 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도 아니고 조언도 아니다.
만약에 당신이 유명 인사가 던진 위로와 조언'에 돈오(頓悟) 를 얻었다면 당신은 줏대 없는 사람이다. 팔랑귀'다. 물론 이러한 위로와 조언'에 잠시 용기를 얻어 힘을 낼 수는 있지만 말 그대로 " 잠시 ~ " 일 뿐이다. 일주일이 지나면 긍정적 힘'은 다시 우울한 현실 앞에서 절망하게 된다. 부메랑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그렇다 ! 힐링과 멘토링은 요요현상'이다. 乙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조언이 아니라 甲에게 유리하게 적용도는 근로계약서'를 바꾸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불행은 마음이 만들어낸 탐욕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체질적 우울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있으나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을 유심/唯心 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이다. 사회 구조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이처럼 구조적 모순을 외면한 채 유심'을 강조하는 힐링'은 지나가는 개나 줘라. 그것은 잠시 동안 얻을 수 있는 쾌'에 지나지 않는다.
감량을 통한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요요현상이다. 차라리 다이어트를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힐링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 글 > 이란 매우 위험한 도구'이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글'을 가지고 노는 행위이지만 이 노는 행위의 화룡점정이 바로 < 시 > 다. 시는 시어를 고르고, 배치하고, 나누는 놀이'를 통해 통찰을 얻는 장르'이다. 시는 문학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글'은 지극히 위험한 도구이다. 도끼로 나무를 벨 때에는 유용한 연장이 되지만 사람을 향할 때에는 무기'가 되듯이, 좋은 시는 삶에 대한 통찰과 화두를 던지는 연장이 되지만 나쁜 시'는 좋은 명함을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될 뿐이다. 나는 문창과나 국문과 교수이면서 문예지나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겸하면서 시인까지 겸직하는 시인은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좋은 명함을 얻기 위해 시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들이 쓴 시는 대부분 글 장난'이었다. 겸직은 예의가 아니다. 정치평론가를 하면서 동시에 정치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영화평론가를 하면서 영화감독도 겸하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 이것저것 다 해먹는 꼴을 보면 문학에 대한 열정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탐욕적이다. 그래서 나는 쓰리콤보 시인'이 쓴 시는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김신용이라는 시인'이 있다. 그는 문창과나 국문과 교수는 아니다. 교수는커녕 대학문을 들어가 본 적도 없다. 그는 남대문에서 지게꾼으로 일한 사람이다. 쓰리콤보 지식인과 비교하자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 판단에 의하면 그가 쓴 시는 쓰리콤보 욕심쟁이 지식인'이 쓴 시'보다는 10,000배는 뛰어나다. 이것은 비약'이 아니다.
그는 < 비문증 > 이라는 시에서 " 안질에 걸린 듯 누런 눈곱이 낀 고장 난 가로등 같은, 눈 " 을 " 흘러가야 할 것들이 흘러가지 않고 박혀 있는... " 것이라 진단하고 반성한다. 그래서 그는 < 흘러가는 것 > 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 생각하면 " 모기 한 마리가 날아가 " 는 것 또한 의미를 가진다. 모기는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존재'다. 이런 통찰은 쓰리콤보들이 얻을 수 있는 통찰이 아니다. 직업을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바쁜 세상에 세 가지나 겸직한 양반들이 과연 한곳에 오래 앉아서 어떤 사물을 오래 바라보며 상념을 젖을 수 있을까 ? 회의적이다. 새벽 3시에 깨어있지 않은 자는 시인이 아니다. 사유는커녕 촉새처럼 이곳저곳 중뿔나게 나서서 밤 9시만 되면 에이스 침대에서 단잠을 잘 것이 뻔한다. 그들이 쓰는 시는 시가 아니라 낙서'다. 피카소 같은 천재라면 낙서도 예술이 될 터이지만 별 볼 일 없는 양반들이 쓴 낙서를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같잖다.
고통은 김신용 시를 관통하는 화두'다. < 물렁해, 슬픈것들 > 이라는 시에서 " 마당가의 / 작은 텃밭에 씨 뿌려 띄운 어린 배춧잎에 / 쬐그만 달팽이들이 기어 "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남대문 시장에서 지게꾼으로 일했던 자신의 가난한 누대를 떠올린다. 그는 " 상징은 / 무섭다. / 한때, 나도 은유의 달팽이였다. / 지게를, 달팽이의 집처럼 등에 얹고, 세상의 / 배춧잎을 기어오르던-. " 이라고 회상한다. 살기 위해서 물렁한 몸 위에 딱딱한 지게를 얹고 배춧잎을 오르던 힘든 하루가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그는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작은 달팽이를 바라본다. " 자신을 지킬 뼈 하나 없어, 등에 짊어진 패각까지 보호색을 띤 " 달팽이를 말이다. 김신용에게는 뜬구름 잡는 은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겪은 것들만 보고, 느끼고, 쓴다. 좋은 화선지는 먹물이 빠르게 스며들지만 번지지는 않는다.
그래야 좋은 서체'가 그려진다. < 잉어 > 라는 시'에서는 온몸으로 글을 쓰는 잉어가 등장한다. 잉어가 물속을 헤엄치며 이러지러 돌아다니는 모습이 시인 눈에는 만년필로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인 까닭이다. " 무슨 글자를 쓴 것 같은데 읽을 수가 없다 "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메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몸이 붓이 되는 몸부림이 중요한 것이다. 좋은 시'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서사가 고스란히 시에 스며들지만 구질구질하게 번지지는 않는 시가 좋은 시'다. 김신용은 가난과 고통을 시에 새기지만 구질구질하게 번지지 않는다. 비록 그가 쓴 시가 쉽게 다가오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김신용은 잉어처럼 붓이 되어서 자기가 살아온 고통과 무게를 몸부림으로 재현한다. 중요한 것은 진심을 담보로 한 진술이지 말 장난이 아니다. 그게 그가 가진 미덕이다. 내가 보기엔 당대 최고의 시인은 김신용'이다. 명불허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