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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텀
찰스 부코우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치나스키, 놀이하는 인간.
똥구멍이 뭐가 나쁘냐고 ! 당신한테도 똥구멍은 있잖아. 나도 똥구멍이 있다고 ! 가게에 가서 큼지막한 쇠고기 스테이크를 하나 사봐. 거기도 똥구멍은 달렸어 ! 지구상에는 똥구멍이 널렸단 말이야 ! 어떤 면에서는 나무들도 똥구멍이 달렸는데 못 찾는 것뿐이야. 나무들도 이파리를 싸잖아. 당신 똥구멍, 내 똥구멍, 세상에는 수십억 개의 똥구멍으로 가득 찼어. 대통령도 똥구멍이 있고, 세차장 직원들도 똥구멍이 있어. 판사들도 살인자들도 똥구멍이 있다고. 심지어 자주색 넥타이핀 남자도 똥구멍이 있어 !
- 우체국, 中
입대하기 전'까지 공사판에서 막일'을 했었다. 입대 날짜'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림잡아 6개월이라는 시간이 남아돌았다. 당시 내 꿈은 집에 근사한 홈시어터'를 장만하는 것이었다. 성능 좋은 진공관 앰프와 빔프로젝트'를 장만하여 거실 쇼파에 앉아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 꿈이었다. 영화가 끝나면 어두컴컴한 거실 쇼파에 앉아서 영화가 남기고 간 진동을 느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편의점이나 주유소에서 깨작깨작 일 할 수는 없었다. 공사판에서 열흘 일하면 편의점에서 한 달 동안 일한 품삯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사판에서 막일'을 했다. 기술이 없으니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목수 시다바리를 했고, 미장공 시다바리를 했다. 첫째 날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둘째 날에도 다리가 후들거렸고, 셋째 날에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공사장 십장은 갓 스물이 넘은 나에게 노가다라는 것이 처음에 힘이 들지 일주일만 버티면 막일도 할 만하다고 했다. 하지만 입곱째 날에도 다리가 후들거리기는 마찬가지였고 여덟째 날에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리고 막일을 한 지 일백 서른 다섯 번째 날에도 다리가 후들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봄이 오자 꽃은 피었지만 내 등골에는 소금 꽃이 피었다. 시멘트 400포를 혼자서 옮겼을 때에는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을 때에는 저절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나이면 또래 여자아이와 뒹굴며 신나게 신음소리를 토해내야 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삭신이 쑤셔서 뒷방 늙은이처럼 신음소리나 내고 있다니, 하지만 거실에 꾸며질 작지만 화려한 극장을 생각하며 참았다. 일이 힘들다 보니 참을 먹는 시간에 틈틈이 술을 마셨다. 몸이 힘들면 술의 힘을 빌려서 벽돌을 옮겨야 했다.
공사판에서 일하면서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씻을 수 있는 곳과 똥 쌀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공구리를 치지 않은 나무 거푸집 위에다 똥을 쌌다. 그러므로 남양주 레미안 105동 11층과 12층 사이에 내가 싼 똥이 남아 있으리라. 그렇게 공사판을 전전하던 끝에 나는 드디어 7월 15일에 훈련소 입소를 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출력 좋은 스피커와 성능 좋은 앰프 그리고 고해상도를 자랑하는 캐논 빔 프로젝트'를 장만했다. 입대 전 공사판에서 피똥 쌌던 생각을 하니, 아...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내가 홈시어터를 만들고 나서 처음 본 영화가 < 라이언 일병 구하기 > 였다. 써라운드 입체 음향을 체크하기 위해서는 < 라이언 일병 구하기 > 만큼 좋은 영화도 없다. 화질은 생각보다 실망스러웠지만 사운드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볼륨을 최대치로 올리고 감상하니 총 소리가 내 뒤통수에서 들렸다. 하지만 며칠 후부터는 귓구멍에 이어폰을 꽂고 영화를 봐야만 했다. 이웃들이 시끄럽다고 지랄을 한 탓이다. 시부랄, 이 좋은 스피커와 앰프를 두고 귓구멍에 이어폰이나 꽂고 영화를 감상해야 하다니. 개새끼들.... 문득 슬픈 농담 하나가 생각났다. 가난한 사내가 큰 맘 먹고 최신식 티븨'를 장만했단다. 다기능 멀티 플레이어'여서 스마트한 티븨였다. 이 티븨'는 어린이 시력 저하를 방지하기 위한 거리 감지 센서가 부착되어서 시청자가 일정 거리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 오면 전원이 자동적으로 꺼지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술에 만취한 남편이 새벽에 들어와서 겁도 없이 아내의 팬티 속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만지려다가 심기가 불편한 아내가 냅다 손을 내려치는 풍경과 비슷했다. 접근 금지'였다 !
사내는 이 기능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외제차에나 있을 법한 거리 감지 센서'가 티븨에 내장되어 있다니 ! 그는 침대에 누워 이 똘똘한 티븨로 드라마를 볼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한다. 하지만 침대에 누운 사내는 아무리 전원을 눌러도 티븨가 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티븨와 침대 간 거리는 스마트한 기기'가 보기에는 시력을 저하시킬 정도로 좁아터진 공간이었다. 사내는 포근하고 말랑말랑한 침대를 벗어나서 바닥에 냉기가 도는 딱딱한 방문 앞에 정자세를 하고 앉아서 티븨를 봤다고 한다. 허리가 뻐근해서 눕기라도 하면 성정이 곱지 못한 티븨'는 삐쳐서 핏 ! 소리를 하며 꺼지기 일쑤였다고. 사내는 멋진 스마트 티븨'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방이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개새끼, 좁아터진 단칸방에서 산다고 바보상자마저 나를 우습게 생각하는구나 ! "
며칠 후, 사내는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월드컵 본선 경기를 시청했다. 방문 앞에 다닥다닥 붙어서 말이다. 박지성이 골을 몰고 상대 팀 골대를 향해 달렸다. 너무 흥분한 친구들은 벌떡 일어나며 앞으로 다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불길한 예감, 그렇다. 스마트 티븨'는 가까이 오지 말라며 핏 ! 소리를 내며 꺼졌다. 그 후, 친구들은 똑똑하지만 싸가지 없는 티븨 눈치를 봐야겠다. 소근소근 말했다. 승부차기에서 극적으로 이겨도 친구들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스마트 티븨는 성격이 꽤나 지랄같으니깐.... 곰곰 생각하니, 내가 영락없이 그 꼴이었다. 홈시어터는 근사했지만 집구석은 후졌던 까닭이다. 이웃집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도 들리는 판국에 출력 300짜리 스피커를 장만할 생각을 했다니, 어리석은 일이었다. 3평짜리 방에서 시력 저하 방지 기능을 갖춘 티븨'를 장만하는 꼴이었다.
아마도 그 스마트한 티븨'는 속으로 이런 말을 했으리라. " 코딱지만한 집구석에서 나처럼 우아한 티븨를 장만하다니, 웃겨. 아.. 우껴 " 찰스 부코스키의 < 팩토텀 > 을 읽다가 훈련소에 입소할 때까지 공사판에서 허드레 막일꾼으로 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 또한 팩토텀( factotum : 잡역부, 막일꾼 )이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은 노동과 땀에 대한 숭고함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일하다가는 힘들어서 피똥 싼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몸이 고생해야 큰 깨달음을 얻는다는 꼰대들의 메시지'는 뻥이었다. 몸이 고생하면 그냥 병든다. 고생은 사서 할 필요가 없다. 낚시로 잡힌 갈치는 금갈치'라고 불리며 비싼 가격에 팔리지만 그물에 갇혀서 몸이 찢기고 멍든 갈치는 먹갈치'라고 불리며 싸게 팔린다. 병든 놈은 싸게 팔린다. 그게 자본주의 사회의 진실'이다.
찰스 부코스키 소설은 반-노동소설'이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생산해내는 노동의 신화'를 거부한다. 치나스키는 그저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게 꿈이다. 술 마시고, 노래 하고, 섹스 하는 것이 최고'다. " 좆이 서질 않는다 ! " 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잰 척하는 먹물과 우아한 척하는 속물 문단과 주류 사회에 대한 주객(酒客)의 펄프픽션, 혹은 퍽유-픽션'처럼 읽힌다. 저잣거리와 뒷방 입말'은 캐릭터에 생생한 입체감을 부여한다. 그의 문장에는 후까시'가 없다. 헛과시'가 없다는 말이다. < 우체국 > 에서는 항상 똥구멍'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 펙토텀 > 에서는 자지'라는 단어가 검열 없이 자주 등장하지만 찰스 부코스키 소설은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 만약에 당신이 이 소설을 읽고 외설이라고 격분한다면 당신은 인생을 너무 우아하게 산 사람이다. 콜린 윌슨이 < 아웃사이더 > 를 쓰기 전에 부코스키 소설을 읽었다면,
그는 부코스키 소설을 전형적인 아웃사이더'라고 정의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내린 결론은 그대로 소설 속 주인공 치나스키에게도 적용된다. " 나는 이렇다 할 재능도 없고 이룩해야만 할 사명도 없으며, 반드시 전달하지 않으면 안될 감정도 없다. 나는 가진 것도 없으며 무엇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무언가 보상'을 바라고 있다. " 치나스키는 이렇다 할 재능도 없고, 사명도 없다. 그리고 가진 것도 없고 무엇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지만 그는 멋진 클래식을 감상할 수 있는 성능 좋은 앰프와 출력 좋은 스피커를 욕망한다. 비록 1.5평짜리 좁은 방에서 뒹굴지만 시력 저하를 방지하기 위한 거리 감지 센서가 부착된 스마트한 티븨'를 원한다. 게으른 놈이어서 지나치게 뻔뻔한 욕망인가 ? 얼리버드'였던 이명박 각하는 너무 부지런하셔서 오히려 더욱 뻔뻔하지 않았던가 ?
이 세상 모든 욕망은 뻔뻔하다. 뻔뻔하지 않은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는 10분마다 여자와 섹스하는 생각한다는 수치가 있으니 치나스키는 뻔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욕망에 충실한 것이다. 사르트르의 < 구토 > 에 나오는 로깡탱'처럼 24시간 내내 실존과 존재에 대한 상념에 사로잡힌 인간은 없다. 사르트르는 고뇌하는 지식인 흉내를 내며 으스대고 거들먹거렸지만 그 또한 10분마다 여자와 하는 상상을 하며 아랫도리를 뜨겁게 달구었을 것이다.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