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과 적멸

 

 

 

첫눈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고라니와 같은 야행성 초식동물'이다. 겁이 많다, 내성적이다, 말이 없다. 기상청에서는 첫눈이 내렸다고 공식적으로 기록하지만 그날 첫눈을 본 사람'은 거의 없다. 말 그대로 小雪'이다. 첫눈은 착한 사람에게는 보이지만 나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입은 투명 망토'다. 지금 저 사진 속에는 첫눈이 내리고 있다. 바람의 영향 때문에 눈이 휘어져 내린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양'도 아니다. 땅에 닿자마자 녹는다. 진눈깨비 같다. 소리없이 내리지만 풍요롭다. 이 사진의 제목을 지으라고 한다면 < 첫눈 > 이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첫눈 이야기를 농담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건 당신의 오해'다. 난, 지금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있다. 나에게는 보이는데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이 내린다. 소리없이 내리지만 풍요롭다.

 

- 11월엔 첫눈이 내린다, 中

 

 

 

 

니체는 24살에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고  보르헤스'는 도서관 사서'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보르헤스는 캄캄하며 축축한 지하 서고'에서 冊만 읽었다고 한다. 보르헤스가 보기에는 캄캄하고 축축한 지하 서고는 마치 검고 촉촉한 동굴의 비유였다. 보르헤스에게는 이곳은 쾌락의 원천이었다. 사람들은 엘리트 집안 출신인 보르헤스'가 쥐꼬리 만한 월급을 받는 도서관 사서'를 하고 있다고 조롱했지만 그는 그저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을 뿐이다. 사실 가장 위대한 작가는 섹스피어가 아니라 보르헤스'다. 섹스피어가 그냥 신라면이라면 보르헤스는 신라면 블랙'이요, 섹스피어가 스필버그라면 보르헤스는 오손웰즈'였다. 전자가 < 딴따라 > 라면 후자는 < 난 달라 ! > 였다. 21세기 현대 문학은 모두 보르헤스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고 해도 그리 큰 허풍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니체와 보르헤스의 공통점은 문헌학에 정통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 속에서 진리'를 찾았다. 서고/書庫는 곧 보고/寶庫'다. 다.  

 

■  보르헤스는 픽션과 팩트'를 혼용했다.어디까지가 진짜이고 가짜인지가 불분명했다. 실존인물을 인용할 때에도 소설 속 프로필은 가짜였고, 실존 인물이라고 우길 때에도 그 인물은 가짜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가 인용한 인용문은 허구이거나 가필'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깐 뒤죽박죽의 세계가 바로 보르헤스의 세계'였다. 에코의 < 장미의이름' > 은 섹스피어 없이도 탄생할 수 있는 걸작이지만, 보르헤스 없이는 탄생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 불멸 > 이라는 단어가 있다. 쉽게 풀어쓰면 " 꺼지지 않는 등불 " 이라고나 할까 ? 불멸은 < 하하의 죽지 않아! 와 하정우의 살아 있네! > 를 관통하는 단어'다. 불멸이란 결국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살아서 권력을 향유하고 싶은 욕망'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박정희'다. 그가 꿈 꾼 것은 영원한 권력'이 아니었던가. 불멸은 본질적으로 불안한 욕망이다. 실리콘으로 부풀린 탱탱한 젖가슴만 남은 늙은 여자의 쭈글쭈글한 몸도 불멸이 낳은 현상이고, 보톡스로 늙어가는 것을 지우려고 하는 얼굴 또한 불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건희가 권력을 자식들에게 세습하려고 하는 욕망도 불멸이 낳은 것이다. 하지만 이 욕망은 추악하다. 기형도의 말을 빌리면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는 추악하다.  

 

이 불멸의 반대말이 < 적멸 > 이다. 적멸은 불교 용어'로 깨끗하게 사라져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불멸이 生의 과잉이라며 적멸은 死의 과잉이다. 왜냐하면 적멸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재'조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적멸的 인간은 이름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욕망을 가진 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無는 바로 적멸'이다. 육체를 버리고 정신을 얻고자 하는 속셈이다.  나는 이 적멸'이라는 단어'가 좋다. 적멸은 6월의 낮에 바짝 마른 빨래처럼, 건조한 무명 옷 같다.  

 

책이란 불멸과 적멸이 묘하게 섞인 영역이다. 어떤 책은 < >와 같고, 어떤 책은 < > 과 같다. 불멸과 적멸도 그렇다. 불멸은 7월에 내리는 빗소리와 같고, 적멸은 11월에 내리는 눈 오는 풍경'이다. 비는 소리와 함께 오지만, 눈은 침묵으로 온다.  불멸은 生의 아우성이고 적멸은 死의 침묵이다. 한겨울, 아주 조용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 우리는 문득 창문을 열어 본다. 눈이 온다. 비가 오면 밖은 시끄럽지만 눈이 오면 밖은 고요해진다. 

 

니체의 고전'을 읽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자주 창밖을 본다. 니체는 세상의 모든 것을 고요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글은 조증에 걸린 울증 환자처럼 수다스럽고 발랄하지만 묘하게 심장을 조용히 후벼판다. 여름에는 빗소리처럼 시끄러운 책이 마음에 드나 겨울이 오면 이상하게 눈처럼 조용한 책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 그랬을까 ? 난 니체'를 늘 시린 겨울에 읽었다. 그럴 때마다 니체의 적멸을 생각하고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의 성정을 읽는다. 그는 왜 미쳤을까 ? 왜 늙은 말의 목을 붙잡고 연민 때문에 미쳐서 쓸쓸히 죽어갔을까 ? 토리노의 겨울은 눈이 많이 온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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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니체의 <아침놀>을 주문한 참인데, 이 글을 읽고 나니 기대되네요.

+ 적멸은 11월에 내리는 눈을 닮았다는 말이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 눈이란 물질은 내가 태어나서 이 지구상에서 만난 것 중에 가장 좋은 물질(물체?) 같습니다. ... 문득 고요해져서 창문을 열면 눈이 온다,는 표현에 겨울이 기다려지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01 23:58   좋아요 0 | URL
제가 겨울을 좋아합니다. 여름 이 새끼는 정이 안 갑니다.
겨울에 보면 갑자기 조용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그럴 때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열어봅니다.
그러면 항상 눈이 내리고 있더라고요.

눈보라를 빼면 눈은 바람도 없는, 조용한 순간에 소리 없이 내립니다.

yamoo 2013-09-02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와 니체가 공히 철학자로 인정한 유일한 사람이 쇼펜하우워...이런 우연은..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는 말로보면 우연이 아닐지도...ㅎㅎ
그나저나 불멸하면, 전 쿤데라의 소설이 번뜩 떠오르네요^^

마지막에서 두 번째 단락이 넘 좋네요! 완전~~공감 만배!!

곰곰생각하는발 2013-09-02 14:29   좋아요 0 | URL
말로만 그러시지 마시고 공감 만 개 눌러주세요 ~

전 요즘 에티카를 야금야금 읽는데 이 양반 진짜 끝내줍니다.
야무 님께 추천합니다. 에티카 조하요 ~~

yamoo 2013-09-03 12:44   좋아요 0 | URL
네네~~~공감, 공감!!ㅎㅎ

에티카는 엔날에 읽었더랬습니다. 서광사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요즘 다시 읽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단 전 올해 베르그손을 마치는 게 급선무 입니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04 03:35   좋아요 0 | URL
오, 베르고송 옹 읽으시는군요. 저보다 늘 앞서 나아가십니다.
전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읽어서 재미있는 것 먼저 읽다보니
철학은 아무래도 늦게 펼치게 되더군요.. 흠흠..

히히 2013-09-0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눈 보다는 비를 좋아합니다만
글을 읽을 때는 봄 보다는 가을이, 여름보다는 겨울이 효율이 높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
비는 음악을 부르고
눈은 글을 청합니다.

'11월엔 첫눈이 내린다' 누구의 글입니까?
곰...발님의 글이라면 링크 걸어 주십시오. 명령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9-02 14:32   좋아요 0 | URL
전 무조건 겨울이 제일 좋습니다. 책을 읽기에는 말이죠.
특히 책 읽다가 창밖 보는데 눈 내리면 정말 기분 좋더라고요....


11월엔... 이거...ㅋㅋㅋㅋㅋ 제가 쓴 글인데 네이버 블로그 문을 닫아서 링크가 안 걸려요.
아버스' 사진에 대한 감상인데요. 여긴 이미지가 엑박이 뜨더라고요...


+
그나저나 왜 내 말투 흉내 냅니깡!

푸르푸르 2013-09-02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마시기에도 가을 겨울이 좋죠
사랑을 하기에도 가을 겨울이 좋고요
여름은 정말 사람답지 못한 계절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9-02 14:44   좋아요 0 | URL
오, 선생님 오셨군요. 평안하시온지요 ?
그나저나 모임 함 가져야죠. 기획력이 있으시니
날 한번 잡아봅시아...

새벽 2013-09-03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 참 좋은데...
저는 겨울을 싫어하고 그보단 차라리 여름을 좋아하지만요.

여름의 생명력(?)이랄까...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겨울에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에도
집 앞 눈 치우며, 차 도로 위에 버리고 종종걸음 치며 '이래서 겨울은 싫어...'라고 할 필요없는
그런 산골짝에서 자급자족하며 살다가 눈에 파묻혀 죽어도 별 아쉬움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종종 생각하지만 이 또한 치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3-09-03 04:20   좋아요 0 | URL
아니 지금까지 안 주무시면 어떡합니까. 새벽 님은 잠을 좀 푹 주무셔야 합니다.
생각해 보니 요즘은 눈도 많이 오고 비도 많이 오고...
덥고... 참, 날씨 때문에 못 살 것 같은 나날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