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래 아팠다.

 

 

다들 알겠지만, 나는 확실히 자폐적 성향이 짙다. 사람들은 집에 있으면 답답하다고 호소를 하나, 나는 365일 대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갑갑한 느낌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집에서 티븨를 보지도 않고 음악을 듣지도 않는다.  독서는 1년에 100권 정도 읽는데 그나마 몰아서 읽는 편이다. 그러니깐 한 달에 10권 정도를 꾸준히 읽어서 일 년에 백 권을 채우는 쳬계적 독서가  아니라 한 달에 구십 권 정도를 읽고 나머지는 달달이 한 권 정도를 읽어서 백 권 정도를 채우는 충동적 독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정확한 수량을 체크를 하지는 않았으나 많이 읽을 때는 일 년에 이백 권 정도 읽은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을 대충 계산해 보니 대략 4,000권 정도'다.  

 

책은 동시다발적으로 읽는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스피노자의 < 에티카 > 이지만 동시에 요네하라 마리의 < 언어 감각 기르기 > 를 읽고 있고, 에릭 호퍼의 < 맹신자들 > , 고미숙의 < 이 영화를 보라 > , 김영진의 < 평론가 매혈기 > 그리고 수전 손탁의 < 은유로써의 질병 > 은 다시 읽고 있다. 그래야지 지루하지가 않다. 하루 종일 < 에티카 > 만 읽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아 ! 깜빡했다. 화장실에서는 엠브로스 비어스가 쓴 < 악마의 사전 > 을 2년째 읽고 있다. 변기에 앉으면 일단 아무 페이지나 펼친 후 그냥 읽는다. 그래서 읽은 부분은 계속 읽게 된다. 아무래도 나는 자폐성 사회부적응자인 것 같다. 그동안 팔 할의 거짓말을 했고, 이 할은 농담을 했다. 진실을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온갖 잡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인데  병신 같은 생각들이 대부분이다. 왜 아이들은 똥 이야기를 좋아할까 ? 이런 생각이 주를 이룬다. 남은 시간은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망에 대해 생각한다. 내 스스로는 말의 계보학'이라 지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눈(雪)의 연관어'를 생각한다. 눈은 겨울에 내리고 비는 여름에 내리니 눈과 비'는 서로 반대말'일까 ? 곰곰 생각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 눈 > 의 반대말은 < 발자국 > 이었다. 눈'은 가볍지만 발자국'은 무겁다. 발자국이란 눈보다 무거울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발자국이라는 물성(物性) 을 덮는 것은 다시 가벼운 눈'이라는 점이다. 발자국은 누군가가 남긴 존재이며 흔적이고 무게'인데, 눈은 이 무게를 고스란히 지울 수 있다. 무게 위에 다시 눈이 쌓이면 발자국은 존재'를 잃으니깐 말이다. 가벼운 것은 종종 무거운 것을 이긴다. 그러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흥미진진하다. 나는 한동안 < 첫 > 의 반대말을 찾다고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 첫 > 의 반대말은 이 지구상에는 없는 듯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 끝 > 은 첫의 반대말'이 아니라 같은 말'이었다. 첫 = 끝'이었다. < 첫 ~ > 으로 시작되는 낱말은 대부분 과거의 영역에 속했고 항상 그 상태'보다 과장된 감정을 갖기 일쑤였다. 첫사랑이었던 대상은 언제나 소프트 렌즈'가 정착된 카메라로 찍은 달달한 사진 속 주인공처럼 아련하고 예쁘고 순수했다. 첫'이 들어가는 순간 대상은 미화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 첫 ~ > 이 수식하는 대상을 호명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의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끝 > 났기에 < 첫 ~ > 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볼까 ? 첫사랑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다. 미완성이다. 이 미완성은 과거의 것이다. 첫사랑'은 역설적이게도 관계가 < 끝 > 났기에 첫사랑'이라는 달달한 향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 끝 > 은 < 첫 > 과 뗄래야 땔 수 없는 관계이다. 그들은 같은 성질을 가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별사를 말할 때 항상 첫날'을 기억하며 옛날을 이야기한다. " 제가 이 회사에 부임한 지 어언 40년이 지났군요. 회사 첫날 입사한 그날이 떠오릅니다. " 그렇다 ! 첫날은 옛날'이다. 옛날은 항상 첫날이 끝날 때 발생된 과거'다. 첫날의 끝이 옛날'이다.  

 

첫사랑이 이루어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불행한 사람이다. 통증이 없는 사랑은 덜 삭힌 홍어와 같다. 한 여자를 오랫동안 사랑했다. 헤어졌다. 내 마음 속에서 허락한 유일한 사랑이었다. 참사랑'이었다. 하지만 참 사랑의 동의어는 거짓 사랑'이다. 목숨을 걸지 않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 어긋난 관계는 모두 거짓의 결과이다. 참.... 오래 아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립간 2013-08-19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스로 우울증, 대인기피증, 자폐적 성격이라고 칭하는데, 곰곰발님과 꽤 공통점을 보이네요.

지난 주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읽은 책입니다. '왜 똑똑한 사람이 멍청한 짓을 할까'

http://blog.aladin.co.kr/maripkahn/5528157
1번, 20번 질문 답변


곰곰생각하는발 2013-08-19 20:44   좋아요 0 | URL
흠흠...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저 책은 저도 읽었습니다.
우울증, 대인기피, 자폐적이라...ㅎㅎㅎㅎㅎㅎㅎ 판타스틱해요..ㅎㅎㅎ

2013-08-19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0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0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0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히 2013-08-20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춘기의 짝사랑이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로 봐서
무결하게 사그라지는 감정은 없는 듯 합니다.
히히는 님의 가시가 부럽습니다.
가지지 못한 자는 엉뚱한 것까지도 욕심냅니다.
가끔씩은 참사랑과 거짓사랑이 오락가락하는 혼돈으로
미치고 싶네요.
커톳 카

곰곰생각하는발 2013-08-20 18:31   좋아요 0 | URL
첫'이란 단어가 좋죠. 첫'이란 단어는 뭔가 대상을 미화시키지만 그 미화와 허세가 아니어서
좋습니다. 약간 촌스러운 느낌이라고 나 할까요...
전 그렇게 약간 촌스러운 것을 좋아해요.
너무 화보집 같은 추억들은 개나 줘야 합니다. 그런 거슨 대부분 가짜죠..
그래서 제가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나봐요.
촌스럽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