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나에게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매력 있는 여성을 보면 함께 눕고 싶듯이, 좋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 술을 마시고 싶다. 이건 본능적 허기'이기에 참기가 힘들다. 그러나 좋은 영화'라고 해서 모두 술 생각이 나는 것은 아니다. 쓸쓸하고 허전할 때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술과 영화'다. 다음 영화 목록'은 술 생각'이 간절한 영화들이다. 그 전에 올린 글을 다시 정리하여 올린다.

 

 

1. 밀리언 달러 베이비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았다. 심장이 뛰었다. 취하고 싶은 밤이었다. 술집에서 그 여자와 나는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그녀는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며 들었고 나는 쉼표 없이 말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관객에게 원했던 것은 값 싼 동정이 아니라 동의'라는 말을 했다. 마틴 스콜세이즈의  < 성난 황소' > 에 대한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영업이 끝날 때까지 우린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야기를 했다. 그때까지도, 그때까지도 내 심장은 천둥처럼 뛰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눈을 떴다. 여자의 눈동자가 캄캄한 밤 하늘 위에 뜬 인공위성처럼 반짝였다. 그날 우리는  습관처럼 798번째 섹스'를 했고 1098번째 섹스를 끝으로 헤어졌다.  

 

 

 

 

2. 키즈리턴 

 

대학로 동숭 아트 센터'에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 키즈 리턴' > 을 보았다. " 실패했을까 ?  " 라는 질문에 친구가 답한다. " 빠가야로, 우린 아직 시작'도 안 했어. " 영화가 끝나고 나오니 아직도 날이 밝다. 마로니에 공원에 앉아서 혼자 소주를 마셨다.  

 

  

 

3. 다이하드 3 

아뿔사 ! 영화표를 샀더니  친구와 나는 돈이 없었다. 그것도 종로 3가 한복판에서 말이다. 친구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다이하드 3'는 매진,매진,매진'이었다. 결국 우리가 선택한 시간은 마지막 회 영화 상영'이었다. 앞으로 네 시간'은 버텨야 한다. 돈을 다 털어보니 남은 돈은 칠천 원 정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1평 남짓한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간이 탁자 한두 개 놓여 있는 그런 풍경의 구멍가게. 추위도 녹일 겸 우린 두부 한 모를 시켜서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친구야, 이 추위를 버티기 위해서는 술을 마셔야 한다구. 러시아를 봐. 그놈들은 얼어죽지 않기 위해서 보드카를 마시잖아.  우린 존 맥클레인 형사의 활약상을 위해 마시자구 ! 자, 건배. 시작은 좋았다. 그렇게 마신 막걸리가 다섯 병. 취할 때로 취했다. 밖을 나오는데 휘청 휘청. 야, 야야야야. 이거 우리가 존 맥클레인 걱정할 때가 아닌데 ! 빌어먹을. 하여튼 우린 영화'를 보았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가지 말았어야 했다.

 

500석 가까운 좌석은 앞 줄까지 매진이었다.  예고 상영 때부터 졸음이 쏟아졌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참았다. 존 맥클레인 아저씨가 펼치는 대활약'을 보기 위해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묘하게 꼬였다. 덜덜 떨면서 밖에서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따스한 곳'으로 들어오니 속이 좋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뜬 이유는 누군가가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여기저기서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막걸리 냄새가 극장 안에 진동을 했으리라. 친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크억!  친구야. 크억 !   아, 나. 나나나나 토할 것 같아. 크으으으으윽.  토할 것 같다 ! "  이런 빌어먹을, 오도가도 못할 상황은 존 맥클레인이 아니라 나'였다.  씹새끼, 여기서 토하면 우린 모두 죽는다. 밖을 나가자면 좌석 열 명'은 지나쳐야 한다.

 

그때 갑자기 친구가 크으으윽 소리를 요란하게 내면서 일어났다. 마치 무협 만화에서 나오는 의성어 크아아아아앙,  이러한 느낌처럼 말이다.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친구가 입을 막더니 황급히 밖을 나가며 무릎과 무릎들을 헤쳐나갔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낮게 들렸다. 이크. 존 맥클레인 형사'가 일촉즉발 위기'를 모면했다. 관객이 내지른 비명 소리가 어떤 의미'였는지는 아리송했다. 존 맥클레인의 대활약'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날 걸어서 집으로 갔다. 2시간 만에 도착했다. 영화는 다이하드 시리즈 중 최악이었다. 토 나올 만한 영화였다.   

  

 

4. 가을의 전설

오후 1시 40분. 그러니깐 그녀는 비행기 안에 있을 것이다. 내 첫사랑 여자'는 일본으로 이민'을 갔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 후 일본인 남자와 결혼한 까닭에,  그 여자'도 엄마를 따라 일본'으로 떠났다. 나는 그날 공항에 가지 않았다. 내가 찾은 곳은 동네 삼류 극장'이었다. 그곳에서 < 가을의 전설' > 을 보았다. 한낮에 울기에는 이곳만큼 좋은 곳도 없었다. 나는 울기 위해서 표를 끊었다. 몇 시간 동안 울어도 됩니까 ? 매표원에게 물었더니, 매표원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껌 씹는 소리와 겹쳐서 들려왔다. " 2시간 30분 정도는 펑펑 울 수 있어요. 이 극장은 대부분 낮에 울기 위해서 오는 관객들이랍니다. 펑펑 우세요. "  

 

극장 안은 온통 남자들로 가득했다. 양복을 입은 40대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집에서는 듬직한 가장이었으니 모두 당당한 어깨였으리라. 그들은 직장에 가는 대신 극장으로 몰렸다. IMF로 인하여 권고사직이나 실직을 한 모양이었다. 집에다가는 직장에 간다고 말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작정한 듯 울기 시작했다. 대성통곡을 하는 이도 있었다. 나도 펑펑 울었다. 소주 네 병은 마신 것처럼 어질어질했다. 가끔 티브이'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면 첫사랑 여자'가 생각나고는 한다. 불이 켜지고 영화가 끝나면 사람들은 극장 로비'로 나가 극장 측에서 준비한 얼음팩으로 부은 눈덩이를 마사지했다. 그리고는 방긋.

 

   

 

5. 조지아 

영화 <조지아> 에서 제니퍼 제이슨 리’는 무명 가수’를 연기한. 그녀가 선술집 무대 위에 오른다. 처마 밑에서 녹는 고드름처럼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박수 소리가 들린다. 예의상 보내는 박수이리라. 그녀는 깊은 주름과 퍼렇게 멍든 눈을 가리기 위해 짙은 스모킹 화장을 한 얼굴로 객석을 바라본다.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한다. 노래를 부른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그 흔한 성공 스토리도 없다. 성공을 빛내기 위해서 실패'를 곁가지로 이야기하는 서사는 촌스럽다.    

 

실패는 오롯이 실패일 때 아름답다. 내가 조지아'라는 영화에서 발견한 것은 담백한 실패'였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멜로디처럼, 담담하게 고백하는 실패담'은 겸손하다. 우리는 술을 마셨다.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여자가 말했다. " 형은... 반드시 실패할 거야.  우리의 연애도 실패할 거야. "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 실패는 재단사의 좋은 도구이지. " 술에 취한 그녀가 내 뺨을 때렸다. 다음날, 나는 대낮에 동네 삼류 극장으로 갔다. 매표원 아가씨'가 나를 알아보고는 말했다. 껌 씹는 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 " 자주 오시네요 ? "   

 

 

6. 사실은 당신과 봤던 모든 영화.

사실은 우리의 데이트 코스'는 늘 일정했다.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헤어지거나 모텔에 갔다. 좋은 영화는 좋은 느낌대로, 후진 영화는 후진 느낌대로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늘 그렇듯이 그녀는 들었고 나는 말했다. 형편없는 영화일 때'는 늘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비교하고는 했고, 좋은 영화일 때도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인용하고는 했다. 그러니깐 그녀와 나는 헤어질 때까지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야길 줄곧 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 심장을 오래도록 뛰게 만들었던 것'은 그 영화 때문이 아니었다. 당신이 있어서, 천둥처럼 뛰었던 것 같다. 내 심장은 그 사실을 몰랐다.언젠가 주말의 명화에서 이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된다면, 당신도 보고 있다면,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때처럼,  천둥이 치겠지. 노장의 말을 빌리자면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는 법이지. 레마르크의 소설 제목을 인용하자면 사랑할 때가 있으면 이별할 때도 있는 법이지. 안녕, 모스쿠라 ! 

 

 

 

 

 

 

 

 

 

 

 

 

 

그외, 나를 술 마시게 만들었던 영화들 

 

 

 

 

 

 

 

연어알,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 2004년 시네마떼끄 기념 상영전  아비정전,  아라비아의 로렌스, 에밀 쿠스트리차의 실패한 몇몇 작품들 : 그의 몰락이 믿겨지질 않았서 술을 마셨다. 

 

타르콥스키의 거울,  팀버튼의 피위의 대모험, 비틀쥬스, 가위손, 에드우드, 크리스마스의 악몽,  마틴스콜세이즈의 택시드라이버, 코미디의왕, 비열한 거리. 조단테의 그렘린 2, 마티니. 아, 그리고 기타노 다케시의 모든 영화.  나이 들수록 점점 성숙해지는 알모도바르의 영화들, 캔로치의 레이닝스톤 : 이 영화 보고 정말 많은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 무수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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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orte 2013-07-15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 영화를 보고나서 술을 마실만한 연인이라면 헤어져도 사연과 추억은 많이도 남을듯요. 영화보며 치즈 뿌린 나쵸에 콜라먹고, 영화가 끝나면 택시타고 각자 집에가는 그런 애인에대한 기억은 추억도 없이 가물거리기만.....
오늘은 술...은 못마시니 좀 그렇고, 술안주 땡기는 영화한편 봐야할듯요. 아직 이곳은 일요일....

곰곰생각하는발 2013-07-15 00:50   좋아요 0 | URL
여기도 아직 일요일입니다. 아니구나 월요일이다..ㅎㅎ
말이 좋아 낭만이지 사실 영화 보고 술 마시는 코스... 굉장히 클래식하잖아요.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요.
전 이상하게 영화 보고 나오면 그렇게 술이 땡기더라고요. 할 얘기도 많고....
사실은 몇 달 전에 했던 얘기 다시 하고 그런 거죠....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 함 리스트 올려주십셔. ~~

iforte 2013-07-15 01:17   좋아요 0 | URL
히힛. 제 취향 듣고서 놀리지마세염. 저는 딱 다섯가지 쟝르의 영화만 봐요. 액션, 코미디, 에스에프, 환타지, 애니메이션.
이 장르들이 겹쳐지면 겹쳐질수록 그런 영화는 더 좋아하고요. 가령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 호빗, 맨인블랙 시리즈요. 스릴러나, 공포영화, 재난 전쟁영화는 심장에 받는 압박이 넘 심해서 못보고요. 로맨스는 신경질나서 못보구요. 드라마는 졸려워서 못봐요. ㅡ.,ㅡ;;;;

제 개인적 성격 혹은 인생관을 표현하라고 해도 딱 이 다섯 단어를 말해요. 한마디로 이상과 현실의 완전결합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이 다섯 쟝르의 개성을 한 인간이 가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한마디로... 엽기...그 자체.... ㅍㅎ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07-15 04:17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합체'네요. 전 다행히 장르를 가리지는 않습니다. 정말 닥치는대로 다 봅니다. 그래도 그 5가지 장르가 합치면 뭔가 답은 나오네요. 활동적이고, 쾌활하며, 솔직하고, 낯가림이 없는....
그런 모습이 떠오릅니다. 선천성 명랑함이라고 할까요 ? 포르테 님은 MBTI에서 EN - 쪽 성향을 보이는군요. 외향적 성격 말입니다. 전 INTP예요. 죽으나사나 인피티'더군요.

에스에프 하니 테리 길리엄의 < 브라질 > 이란 영화가 생각났네요. 참... 걸작이었는데 말이죠...

히히 2013-07-15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싱싱한 해산물에 맑은 소주를 찾는 신랑과
다를 게 없습니다.
아마도...
영화라는 푸짐한 안주에 술은 필수지요.

대낮에 일하기 싫어 영화관엘 갔는데
혼자뿐이더라구요.
독방을 차지하고 열심히 관람하고 있는데
뒤가 간질간질하여 돌아보니
아저씨가 영화를 상영하면서 고개를 내밀고
영화감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완전 깜놀!
제목이 '두여자'였으니까요.
상관없는 남자와 둘이 보기엔 진했습니다.ㅋㅋ
예전엔 혼자서 영화관을 즐겼습니다.
순전히 제 시간을 갖고 싶어서.

곰곰생각하는발 2013-07-15 21:45   좋아요 0 | URL
싱싱하 해산물에 소주라.. 최고죠.
정말 제가 해산물에 소주 좋아라 합니다.
회는 별로고 왜 해삼, 멍게 조개 이런 거 있잖습니까.
그거 좋아합니다.

내가 아는 분은 혼자 공포 영화 보다가 너무 무서워서 극장 측에 불 켜달라 하고 봤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켜주었다고 합니다. 왜 예고편 할 때 그때 조명 있잖습니까..

팜므느와르 2013-07-17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왠지 첨 시작할 때부터 6번의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 읽었지요.
역시 곰발님의 센스란! 흐흐~~
근황으로 새로운 '당신'과 본 영화도 소개해주시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7-17 08:29   좋아요 0 | URL
전 대부분 5,60년대 영화만 보느라 요즘 영화들은 안 보는데..
이번에 마스터;라는 영화는 보러 갈 겁니다. 고거 보면 알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