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영화평론집
로저애버트, 위대한 영화 vs 정성일, 필사의 탐독
두 사람의 차이는 명확하다. 로저애버트’는 쉽게 쓰고, 정성일은 어렵게 쓴다는 점’이다. 물론 두 사람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억지스럽기는 하다. 로저애버트’는 대중적 글쓰기/저널리즘 평론’을 하는 평론가’인 반면, 정성일’의 평론은 로저애버트’보다 철학적이며 학술적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평론가인가 ?! 그건 아니다, 둘 다 영화에 대한 평론을 하는 평론가’다.
쉽게 쓰인 문장은 가급적이면 어려운 단어’를 동원하지 않고 쉬운 단어를 선별한다. < 별리하다 > 라는 말 대신 < 이별하다. > 라고 쓴다. 반면 어렵게 쓰인 문장은 < 이별하다 > 나 < 헤어지다 > 대신 < 별리하다 > 라는 단어’를 선택한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알기 쉽게 쓰인 문장’보다는 어렵게 쓰인 문장’이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밑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소리이며, 이명박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말하는 소리이다. 개소리다.
로저애버트’는 매우 쉽게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영화 < 달콤한 인생 >의 주인공’인 마스트로얀니’에 대한 묘사에서, 애버트는 그를 “ 머리가 아파서인지 아니면 영혼의 깊은 통증 때문인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세상을 바라본다. “ 라고 쓴다. 이 단순한 문장’은 사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말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술과 쾌락에 젖어 환락의 밤을 보내는 불쌍한 영혼’에 대한 서사’를 두통과 영혼의 통증’이라는 간략한 말로 압축한다. 반면 정성일은 허진호의 < 외투 > 에서 두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를 다음과 같이 쓴다.
“ 그 씬의 대사 자체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지만 문 앞에서 나눈 쇼트의 사운드는 문에 의해서 ‘구태여’그 대사의 디제시스에 어떤 주관성을, 내면화를, 착각을, 부정확성을, 무엇보다도 비현실성을 부여한다. 그 쇼트는 한 씬 안에서 객관적, 현실적, 실제적 장면을 보여 준 다음, 쇼트를 나누어서 뒤이어지는 대사에 의혹, 기대, 착각, 환청, 무엇보다도 모호함을 통해서 무인가 그 자연스러운 장면을 기괴하게 만든다. “
- 정성일, 필사의 탐독
나는 로저애버트나 밀란 쿤데라 그리고 스티븐 킹의 산문’을 읽으면 < 아! > 라는 감탄사를 뱉는데 반해 정성일의 산문’을 읽으면 < 어? > 라는 의문사’를 뱉는다. 정성일이 잘난 척하며 쓴 저 긴 만연체는 간단하게 <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는 그들이 머문 장소에 어울릴 만한 대사는 아니기에 약간 기괴한 느낌을 준다. > 라고 쓰면 된다. 그런데 정성일은 지긋지긋하게 나열해서 늘린다. 아무것이나 나열해서 병렬로 늘리면 문장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가깝다.
저 위에 쓰인 문장’은 먹물들이 너무나 사랑해서 10초마다 애용한다는 전설의< must have 아이탬 3종 세트 >가 적나라하게 사용된 훌륭한 예이다. < ~ 성/性 >, < ~ 적/的 >, < ~ 화/化 > 다. 이 3가지’번역투 문체’가 없으면 그들은 문장을 하나도 연결하지 못한다. 물론 저런 문장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게는 가재 편이라고, 젠 체하는 먹물들은 저런 문장’이 까리하다고 생각한다. 가지도 아니면서 가지가지하고, 기린도 아니면서 끼리끼리 논다.
저런 문장’은 난해한 문장도 아니고, 좋은 문장도 아니며, 뛰어난 영화 분석’도 아니다. 저 문장은 난해한 것이 아니라 문장을 난도질한 것에 불과하고, 좋은 문장이 아니라 나쁜 문장이며, 뛰어난 분석이 아니라 형편없는 분석이다. 정성일’은 테엽장치 시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에서 분해만 한 채 조립은 하지 않고 방치한 것과 같다. 로저 애버트’는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질질 끌지 않는다. 그는 훌륭한 평론가다. 그는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에 대해
“파스빈더는 감정의 고양된 상태와 침울한 상태를 영화에서 모두 제거하고,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조용한 절망만을 간직한다. “ 고 쓴다. 아마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문장에 감탄했을 것이다.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 조용한 절망 > 이라는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울컥했다. 왜냐하면 오래된 그 영화가 보여준 장면과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쳤기 때문이었다. 좋은 문장은 결코 젠 체하지 않는다. 다음 문장을 보자.
카사블랑카: 마지막 장면의 클로즈업에서 버그먼의 얼굴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표출한다. 혼란스러웠을 법도 하다. 촬영 마지막 날까지도 비행기에 오를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영화 관계자 중에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버그먼은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 배경 사연은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감정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기묘한 결과를 낳았다. 그녀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느 쪽으로 불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버트가 훌륭한 문장가’인 이유는 : 그녀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느 쪽으로 불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라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성일이라면 이 문장을 이렇게 묘사했을 것이다. “ 할리우드 시스템은 배우와 스텝 간의 계급적 차이’를 조성한다. 그것은 결국 비디제시스와 디제시스 간의 운명적 간극의 문제이며, 불화를 조성하고, 소통은 단절되며, 잡음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깐 버그만이 공항에서 보여준 혼란스러운 연기는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녀의 연기는디제시스에 어떤 주관성을, 내면화를, 착각을, 부정확성을, 무엇보다도 비현실성을 부여한다. “
라고 쓰지 않을까 ? 다음은 그가 쓴 취화선 촬영 현장 일지'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아무렇게나 말하지 못한다. 조이스나 프루스트 같은 미로를 헤치고 나온 다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수첩을 들추면서 우리의 하루를 돌아볼 뿐이다. 세잔의 그림을 보고 난 다음 그 감흥을 아무렇게나 말하지 못한다. 브루크너의 제 8교향곡 3악장 아다지오에 대해서 방금 듣고난 다음에도 다시 한 번 더 듣고 말하겠다고 대답을 미룬다. 베케트의 무대는 거의 등장인물이 없는데도 무언가 보지 못한 것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영화는 보고 나오면, 그 영화가 난니 모레티건, 허우 샤오시엔이건, 제임스 캐머린이건, 데이비드 린치건, 임권택이건, 그게 누구의 영화건, 누구라도 영화관 문을 나서면서 방금 보고 나온 것에 대해서 금방 입을 연다.
- 필사의 탐독
장승업이라는 동양화가'를 이야기하면서 조이스, 프르스트, 세잔, 브루크너, 베케트, 모레티, 샤오시엔, 캐머런, 린치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뭘까 ? "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 " 를 좀더 글로벌하게 확장한 예일까 ? 동서양 예술가들이 한자리 한마당에 모여서 어울렁 더울렁 뒤엉켜서 운우지정을 나누는 문장 같다. 모를 일이다. 정성일의 문장은 참... 쓰다. 쓸개 같은 문장’이다. 나는 이런 문장을 오감보쉼빠빠’와 슈퐁크오빠’가 내뱉는 혀 꼬부라진 취중농담’이라고 말하고 싶다. 뭔 소리인지 알기 쉽게 말하라. 니미 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