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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말
벨라 타르 감독, 야노스 데르지 외 출연 / 미디어허브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가 상징성'에 기반을 둔다면, 벨라 타르는 현시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것은 즉물성이다. 벨라 타르는 그 어떠한 첨삭 없이 날것을 현시함으로써 진실을 보게 만든다. 그의 영화는 온갖 상징으로 압도되는 알레고리화'라기 보다는 쿠르베나 일리야 레핀의 소박한 그림에 가깝다. 그는 < 과정을 과장 > 없이 보여준다. 양말을 신고, 바지를 입고,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스웨트를 걸치고, 마지막에 외투를 입는다. 그리고 옷을 벗을 때는 그 역순을 편집 과정 없이 집요하게 보여준다. 말의 장신구를 입히는 과정과 벗기는 장면도 지루하도록 반복된다. 결국 과장 없는 과정의 목격을 통해서 관객이 깨닫는 것은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일상의 반복'이다. 인간은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생의 의지를 죽음의 묵시록과 연관시켜서 인간은 시지푸스처럼 부조리한 존재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벨라 타르는 生은 환희가 아니라 형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생의 의지'에 대한 경멸을 의미할까 ?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늙은 남자가 얼어버린 감자'를 씹을 때, 우리는 어떤 숭고함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숭고함은 생의 찬양이 아니다. < 겨우 > 살아야 하는 인간'에 대한 감독의 연민이다. 영화 < 토리노의 말 > 에서는 니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니체가 늙고 병든 말의 목덜미'를 잡고 울다가 미쳐버린 곳이 바로 토리노'다. 이 일화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롤랑 바르트의 < 카메라 루시다 > 이다. 그는 " 1889년 1월 3일, 학대받아 숨진 말의 목덜미에 울며 매달리던, 연민'때문에 미쳐버린 니체 " 라고 적는다. 나는 이 하나의 문장 때문에 이 책을 사랑했다. 그것은 박완서의 < 그 남자네 집 > 에서 한때의 찬란을 " 내 생애 구슬 같은 겨울 " 이라고 말해서 내 심장을 뛰게 했던 것과 같은 울림이다.
- 토리노의 말 vs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중

말(馬) 과 말 (語)
영화사가 쏟아내는 과장된 광고 카피'에 동의한 적은 없으나 < 토리노의 말 > 에 대한 " 압도적 걸작 " 이라는 문장'에는 동의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롱테이크'는 타르코프스키가 60년대 만든 최고 걸작 < 안드레이 류블레프 > 를 떠올리게 만든다. 단 서른 개의 롱테이크로 만들었다는 영상을 보고 있으면 한국 영화 평론가들이 우상으로 여기는 ■ < 서편제 / 임권택 > 롱테이크'가 쪽팔려서 미칠 지경이다. 벨라 타르가 이 영화에서 선보인 롱테이크'는 앞으로도,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감상하지 못할 것이다. 이로써 나는 두 개의 과장 광고'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머지 하나는 < 칼의 노래/ 김훈 > 에 대한 " 벼락 같은 축복 " 이라는 카피다. 걸작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참고 견디는 것'이다. 좋은 약은 쓰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단 한번도 카프카의 소설이 재미있다고 느낀 적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도 마찬가지이고, 우엘벡의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책에서 재미 만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가왕 조용필은 피날레를 장식하는 법, 전율'은 언제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슈퍼스타'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끝은 도도한 법이다.
■ 1. 정성일은 작가주의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번 믿으며 끝까지 간다는 말이다. 위대한 감독이 만든 모든 영화가 위대하다는 생각이 바로 작가주의적 시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찬양은 극히 위험하다. 미술가와 영화감독은 다르다. 그림은 오로지 화가 혼자의 붓으로 완성하지만 영화는 수많은 분야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그렇다. 작가주으적 시각은 미술 작품에는 적합하지만 영화에는 적합하지 않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 다크 라이즈 > 는 훌륭하지만 그 속편은 형편 없기 때문이다. 임권택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길소뜸은 좋은 영화이지만 천년학'은 끔찍하고, 달빛 길어올리기'는 지역 특산품 홍보 영화 같다. 정성일은 미술 작품과 영화 작품을 혼동하는 것 같다.
< 토리노의 말 > 은 재미'가 없다. 무대라고는 늙은 남자와 딸, 병든 말, 돌집 그리고 바람'이 전부인 영화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대사도 거의 없다. 무성영화처럼 진행된다. 감독은 지루한 일상을 지독하게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여자는 일어나면 옷을 입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고, 한쪽 팔이 불편한 늙은 노인이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감자를 삶는다. 기계적 반복이다. 벨라 타르'는 이 장면을 편집 없이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 영화는 그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면 압도적인 감정'이 몰려온다. 이 압도적 몰입'은 스펙타클'과 유사하다. 벨라 타르'는 지구 종말'을 다룬 그 무수한 헐리우드 스펙타클 무비 감독을 병신으로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다. 이 영화를 보다가, 니체를 생각하다가, 병든 말을 생각하다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으앙 으앙 울게 된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서사는 < 시지푸스의 신화 / 알베르 까뮈 > 이다.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 놓고 나서 뒤돌아서면 바위가 바닥으로 굴러서 다시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아야 하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이 일상의 반복 ! 까뮈가 시지푸스 신화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 희망 없는 노동 " 이다. 이 일상이라는 형벌의 중심에 시지푸스'가 있었다면, < 토리노의 말 > 에서는 여자가 있다. 여자는 기계처럼 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것은 마치 시지푸스가 바위를 굴리는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반복이다. 그리고 돌집은 명백하게 시지푸스 산에 대한 은유이다.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늙은 남자와 여자는 오로지 이 돌집을 벗어나기 위해 얼음처럼 차가운 감자를 씹는다. 하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병든 말과 물이 마른 우물과 그치지 않는 칼바람'은 고립을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그들에게 희망은 없다. 실존'만 있을 뿐이다. 희망이 없는 실존은 얼마나 허망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은 " 없는 희망 " 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는 것이다.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는 없는 희망'을 마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익살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희망'은 달콤한 사탕에 지나지 않는다. 내일 처형에 처해질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형수에게 간수가 희망을 말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사기'이다. 프르스트는 이런 말을 했다 " 행복은 몸에 좋다. 하지만 정신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고뇌'다." 이 말을 살짝 비틀어 인용하면 이런 말도 된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몸에 좋다. 하지만 정신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인식'이다. 이 인식의 전환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김난도의 < 아프니깐 청춘이다 > 따위를 지독하게 혐오하는 까닭은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우스가 시지푸스의 귀에 대고 " 저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는 임무를 완수한다면 너에게 자유의 신분을 줄께 ! " 라고 말하는 잔꾀'와 다르지 않다. 바위는 반드시 아래로 구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미션파서블한 것처럼 보이는 임무는 사실은 미션임파서블'한 과제'이다. 지금의 성난 청춘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라 인식이다. 나는 김난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김난도여, 사과나무는 당신이나 심어라 !
< 겨우 > 라는 단어가 있다. 겨우는 없다고 하기에는 조금 있는 상태이고, 있다고 하기에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 있음 > 이다. 그러니깐 없음 < 겨우 < 있음'의 순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남자가 얼음처럼 딱딱한 감자를 씹을 때, 우리는 이 "겨우" 를 목격하게 된다. 까뮈의 부조리'는 < 겨우 > 를 의미한다. 결핍과 과잉 사이의 존재가 실존이요, 부조리다. 실존은 곧 겨우'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겨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겨우'라는 좌표를 다시 설정하자. 없음이 절망을 의미하고 있음이 희망을 의미한다면 겨우는 절망과 희망 사이에 놓은 변곡점이 될 것이다. 벨라 타르'는 이 영화를 끝으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의 선언은 자신의 한계에 따른 절망'이라기 보다는 어떤 성취의 결과처럼 느껴진다.
계속 이어지는 글
1. 흥분이 가시지 않아서 계속 쓰게 된다. 사실 이 영화는 불가능에 가까운 영화라고 보아야 한다. 당신은 이 영화에 대해 무엇이 위대한가, 라는 질문을 할 수가 있는데 첫째 이런 식으로 영화를 찍으면 촬영이 미션 임파서블'하게 된다. 이 영화에 쓰인 쇼트가 30개 정도'라는데 보통 영화에서는 최소한 1000개 이상이 쓰인다. 마이클 베이 같은 뮤직비디오 출신 감독들의 영화에는 보통 4000에서 5000개까지 찍는다. 결국 이 영화의 쇼트가 30개라는 것은 30개 모두를 롱테이크로 찍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가능한 모험에 가깝다. 2.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 트래킹 장면'은 매우 아름답다. 말의 움직임과 카메라의 동선이 정확히 일치해야 하는데 영화는 무엇보다도 훌륭하게 이끌고 있다. 깜짝 놀랐다. 3. 말의 연기도 훌륭하다. 아마도 수많은 엔지를 통해 얻어낸 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 노력에 경배를 !
5. 지금 오프닝 롱테이크 장면 ( 마차 장면 ) 을 보고 있는데, 롱테이크가 이렇게 다양한 앵글'을 선보였다는 것 자체가 미스테리'처럼 느껴진다. 일정한 회색톤을 유지하는 야외 촬영 장면도 기적처럼 보인다. 정말...... 뛰어나다. 압도적이다 !!
6. 아... 다시 보니 정말 끝내주네. 사실 이 영화 볼 때에는 독감에 걸려서 누워서 보았다. 그냥 좋은 영화이겠거나 생각했을 뿐 이렇게 좋은 영화인 줄은 상상을 못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드는 의문 중의 하나가 사나운 바람을 어떻게 동원했는가 였다. 물론 거대한 선풍기를 돌리는 것이 일반적인 해결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 환풍기에 의해 만들어진 바람은 뭔가 작위적이다. 왜냐하면 전경의 나무의 환풍기 바람에 의해 가지가 흔들리지만 멀리 떨어진 후경의 나무는 7월의 나무처럼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람이 동원된 장면을 볼 때는 항상 근경과 원경을 눈여겨보는데 이 영화에는 영화 속 나무 전체가 흔들린다. 닝기미... 환풍기 100대를 설치했다는 것을까 ? 이리저리 찾아보니 답은 헬리콥터'였다. 헬리콥터'라면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헬리콥터를 사용하면 동시 녹음을 할 수가 없다. 결국 이 영화의 모든 야외 음향은 녹음실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이 영화가 놀라운 점은 바로 완벽한 소리에 있다. 내가 바람으로 동원된 헬리콥터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 이유에는 마치 동시 녹음'처럼 진행된 음향 때문에 깜빡 속은 것이다. 굉장하다. 스고이 !
7. 바람의 디테일과 함께 극찬받아야 할 점은 바로 소리'이다. 바람 소리'를 잡아낸 음향은 탁월하다. 묘하게 음악적이다. 8. 롱테이크는 필연적으로 공간의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쇼트와 쇼트 사이의 편집은 기본적으로 조작'이다. 하지만 롱테이크는 하나의 쇼트이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감독은 리얼리티를 위해 롱테이크를 선호한다. 쉽게 말해서 폭력 시퀸스에서 쇼트를 남발하면 관객은 그 장면이 가짜 액션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영화 < 올드 보이 > 에서의 복도 폭력 장면'은 진짜 폭력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롱테이크로 찍혔기 때문에 그렇다. 벨라 타르'가 이 영화를 30개의 롱테이크로 찍은 이유는 사실주의에 대한 집착 때문처럼 보인다. 그것은 마치 귀스타프 쿠르베의 고집을 닮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9. 이 영화에 대한 일반적인 평단의 해석처럼 < 토리노의 말 > 은 창세기가 아닌 묵시론을 말한다. 창조가 아닌 소멸이다. 6일째 되는 밤, 빛 대신 어둠이 찾아온다. 그리고 영화는 7일'이 되기 전에 끝난다. 늙은 노인과 여자는 이 혹한과 어둠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 ? 감독은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웃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란 멀쩡한 것을 엉망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10. 이 영화는 무성 영화는 아니지만 거의 무언 영화'에 가깝다. 2시간 30분 동안 대사가 거의 없다. 집시와 이웃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전체 다이알로그는 2분이 채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최소화했다. 결국 이러한 미니멀적인 경향은 겨우'와 일맥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