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옆에 앉다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깐 사람이라 말하고 시인 침연은 외로우니깐 귀신'이라고 말했다 외로운 존재를 전제로 하자면 사람이나 귀신이나 모두 한통속이지만 나는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는 신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귀신을 본 적이 있다, 홀로 서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내 눈 앞에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쓸쓸해 보였다 귀신은 눈을 마주친 사람도 없었고, 대화를 나눈 사람도 없었고, 어깨를 토닥여준 사람도 없었다 귀신은 온종일 혼자 말없이 서 있었다, 쓸쓸해 보였다, 외로워 보였다 그에 비하면 인간의 고독은 외로운 축에도 들지 못한다 인간이란 잠시 외로울 뿐이다 정말 외로운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오래전 버스 안에서 미친 여자를 본 적이 있다 형색이 초라한 여자는 맨 뒷좌석에 앉아서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고, 말을 걸지도 않았으며, 옆에 앉아 그녀를 위로하지도 않았다 아, 저 외로운 짐승 귀신처럼 외로운 존재! 옆에 가서 앉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외로우면 광인이 된다 외로우면 귀신이 된다 당신은 외로운 사람이 아니다.

 

 

 

 

페루는 곳곳이 토말/土末'이다.

 

페루'는 곳곳이 땅끝이다. 국경선도 땅끝이며, 해발 높은 고지도 땅끝이며, 벼랑도 땅끝이며, 마추픽추 돌벽도 땅끝이다. 심지어 페루의 중심인 수도 리마'도 땅끝이다. 그러므로 페루'에는 중심이 없다. 오직 끝만 있다. 그래서였을까 ? 로맹가리는 단편소설에서 < 리마에서 북동쪽으로 10킬로미터'에 위치한 작은 해안가 > 를 새들이 와서 죽는 무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곳은 새(들)의 끝'이다. 한때 홀려서 그곳에 간 적'이 있다. 해바라기 군락'을 보았다. 해바라기'가 피었다가, 졌다. 그곳도 끝이었다. 꽃대는 초식동물인 라마의 아킬레스'보다 질겨서 쉽게 꺾이지 않았고, 하늘에는 듬성듬성 새들이 수련처럼 떠 있었다. 문득 저 새는 새가 아니라 부레로 숨을 쉬는 물고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은 푸른 바다이고, 지금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이 검은 땅은 심해 밑바닥 끝'이다. 페루는 모든 것이 온통 끝이다, 무덤이다, 죽음이다. 하지만 끝이란 절망 끝에 주는 작은 위로. 터널은 끝이 보일 때 환해지듯이, 종종 지긋지긋한 사랑의 끝이 보일 때 위로'를 얻는다. 페루라는 이상한 나라, 이 지독한 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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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쓴다 1 : 소설에 대하여...

 

새 편지지'에 글'을 쓴다. 종이가 구겨질까, 더러워질까 조심스럽다.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글씨체'가 예쁘지 않다고 생각되면 다시 쓴다. 그러니깐 당신에게 보낸 편지는 늘 몇 번의 실패 후에 보낸 편지'이다. 다시 편지를 쓴다. 구겨질까, 더러워질까 조심스럽다. 문장이 마음에 들거나 글씨체'가 예쁘더라도 틀린 문장을 발견하면 다시 쓴다. 조사의 쓰임에도 신경을 쓴다. < - 이 > 대신에 < - 은 > 으로 고쳐 쓴다. 이제 다 쓴 편지'를 편지봉투에 담아야 한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편지봉투에 담기 위해서는 애절한 사연이 담긴 편지지를 접어야 한다는 사실을 ! 접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선명하게 접는다. 이 연서'가 당신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편지지'를 칼날처럼 선명하게 접어야만 한다. 접힌, 흔적. 그것이 바로 얼굴의 주름'이다. 접히는 아픔 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름'은 누군가를 향해 편지를 띄운 흔적(들)이다. 이 세상 모든 연서'는 선명하게 접힌 종이'이다.

 

 

 

 

편지를 쓴다 2 : 시에 대하여...

 

손 편지를 써서 보내던 날들이 있었다. 편지를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편의점 영수증처럼 구겨서 버리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 가을비가 내리니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구나 " 라는 문장은 " 어젠 가을비가 따스하게 내렸다 " 라고 고쳐 쓰다가, 다시 " 가을비가 내렸으니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이다 " 라고 수정했다. 하지만 이내 편지지를 찢고는 다시 " 가을비가 내리니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 라고 보내고는 했다. 얼마나 많은 편지를 썼는지 당신은 모른다. 사실, 그해 가을에 당신에게 보낸 한 장의 편지'는 한 권의 노트였다. 찢어서 버리고, 찢어서 버리고, 찢어서 버리고 남은 노트의 한 페이지'만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 편지 한 장의 무게는 노트 한 권의 무게와 같았다. 가슴이 마른 여자를 보았을 때 오래전'에 당신에게 보냈던 편지'가 생각났다. 저 사람도 한때는 풍성한 가슴이었을 것이다. 찢고, 찢고, 찢고 남은 한 장의 가슴이리라. 파랗게 멍든 가슴이리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말라비틀어진 가슴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한 장의 편지이다. 소설가는 열 장의 종이를 찢어버리고 남은 한 장으로 소설을 쓰고, 시인은 백 장의 종이를 찢어버리고 남은 한 장으로 시를 쓴다.

 

 

 

 

당신이라는 여자, 밑줄을 그었다.

 

오래 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다. 10년 전에 처음 읽고, 4년 전에 다시 읽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펼친다. 그러니까 나는 십 년 동안 이 책을 세 번째 읽는 중이다. 곳곳에 밑줄이 그어진 문장이 보인다. 밑줄을 그은 것으로 보아 그 문장들이 < 의미심장 > 하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때 그은 문장들은 모두 평범한 것(들)뿐이었다. 내가 왜 그 문장 밑에 밑줄을 그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책 속엔 10년 전에 그은 밑줄과 4년 전에 그은 밑줄과 오늘의 밑줄이 전봇대에 걸친 전선줄'처럼 엉켜 있다. 오늘도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낱말과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오늘은 중요한 것이었으나 먼 훗날에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 되는 글 밑에 말이다. 내가 오늘 그은 문장은 4년 전에는 평범하다고 생각한 문장이었으며, 10년 전에도 모르고 지나친 것들이었다. 인생도 같은 순리'가 아닐까 싶다. 한때 한 여자를 사랑했다. 그 여자 밑에 밑줄을 그었다. 헤어지면 못 살 것 같아서 목놓아 운 적도 있다. 고래처럼 오래, 망망해서 울었다. 그 여자는 내 삶의 전부였으나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그은 밑줄은 어쩌면 평범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 없이는 못 살 것 같아서 손목을 밑줄처럼 그었으나 부질없는 짓.  이렇게 살아서 누군가의 위로를 받는다. 그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밑줄을 긋지 않는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그러므로 살아 있으라. 그때 당신이 밑줄 친 미문은 그저 평범한 문장이었는지도 모른다. 먼 훗날 깨닫게 된다.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잊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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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6-14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곳이 온통 끝이라니..
페루라는 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내년 쯤 페루나 갈까?

나도 밑줄긋듯 사랑을 하고 싶은데 그게 안돼.
결국 내 사랑들은 그때 그때 활활 타서는
돌아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어서 떠올릴래야 떠올릴수가 없음.
난 왜이렇게 소모적인 인생 뿐이 못사는 걸까.. 답답하다..곰발동생.
오늘 글들 참 멋지다. 일년만에 다시보는 글도 있어 새록새록 그러네..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4 04:44   좋아요 0 | URL
김신용의 시 중 가시'란 시가 있다. 아주 섬뜩한 시인데...
어제 이러저리 글을 모으고 정리하다가 문득 나란 인간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관계를 가시'로 정의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몹시

웃으면서 코 팠지. 울면서 코 파면 추잡스럽잖냐..

2013-06-14 0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4 0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4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4 0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4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4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히 2013-06-14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등 뒤에 주름을 데리고 있다 하여 반기지 못할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차라리 움푹 패인 흔적을 인내하지 보톡스 한 방으로 해결되는 잔주름은 손사래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4 14:52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등 뒤에 주름이라.. 흠흠... 생각할거리'를 주시는군요. 전 등과 주름은 미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히히 님... 그나저나 히히 님도 알라딘 하나 만드십셔 ~

소나기 2013-06-14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 주름은 그가 마주쳤던 많은 사건들과 타자들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씨실과 날실의 얽힘으로 서로의 얼굴에 주름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 아닐까 싶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5 04:19   좋아요 0 | URL
전 이상하게 주름이 많은 사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말이죠...
깊은 주름은 늘 현자에 대한 상징'이었어요. 내가 만난 사람은 교양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인간적 매력 자체만으로 보았을 때 멋진 주름은 인간적인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